102화
“쿨럭! 쿨럭!”
석상이라니. 엘로이즈에게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다만 지금까지 인지할 일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
“선배 석상, 요즘 발할라 명소예요.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대요! 저희도 가봐요.”
“아니, 난…”
[성좌들이 석상을 궁금해합니다.]
“…보러 가자.”
석상은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휴식처 한가운데에 우뚝 설치되어 있었다.
“오, 저기.”
내 존재를 알아차린 학생들이 수군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그들은 전부 석상을 구경하러 온 듯했다.
나는 석상을 확인하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화한 표정으로 숲속의 동물들과 뛰노는 듯한 석상은 아르테미스 신상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석상의 과도한 미화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주변에 학생들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꽃과 과일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지어 술병도 보였다.
“뭐야, 이 불길한 광경은?”
띠링!
[성좌 ‘꼰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레제 제단인가요?]
제단인지 제사상인지 모르겠지만 내 석상이 뒤틀린 샤머니즘의 온상지가 되어있는 건 알겠다.
레이니가 설명했다.
“선배한테서 영험한 기운을 얻으려고 공물을 올린 거예요.”
“대체 왜 산 사람한테 공물을 올리는데? 애초에 신성모독 아니야?”
“많은 걸 따지시네요.”
도무지 상식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석상을 찾아온 사람 중에는 내게 유감있는 녀석도 존재하는 듯했다.
“테레제 바보?”
대단히 수준 낮은 낙서였다.
“미모사인가?”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석상 주변에 접근 금지 울타리라도 쳐놔야지.’
낙서든 공물이든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 아파. 여길 벗어나야겠어.
“난 이만 클럽 룸으로 가볼게.”
“저도 슬슬 연구실에 가야겠어요.”
우리는 혼란한 공간을 벗어나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달칵.
“나 왔어.”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우중충한 나와 달리 클럽 룸에 모인 영애들은 바람이 간지러운 코스모스처럼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들은 생명력이 넘치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셨어요, 테레제 님! 오늘 날씨가 너무 좋죠? 까르르!”
“테레제 님! 여기 앉으실래요? 저희는 하인스 양이 생에 처음으로 구운 쿠키를 맛보고 있었답니다!”
얘들에게도 고충이라는 게 존재는 할까?
나는 혹시 루미오가 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영애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오늘도 모습이 보이지 않네.’
하긴. 달에 열흘만 등교하니까 마주치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그때 한 영애가 우울하게 말했다.
“아아. 요즘 클라이드 님 금단 증상 때문인지, 강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저만 그런가요?”
“영애도요? 저도요.”
“클라이드 님을 멀리서라도 뵈었을 때가 호시절이었다는 걸 몰랐어요. 이래서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하는 거군요….”
띠링!
[성좌 ‘잘생긴 게 죄라면 클라이드는 사형’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제작자 누구야? 옥상으로 따라와]
이들의 인생 최대 역경은 클손실이었다.
“우리 클라이드 님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쉴 틈 없이 던전에 보내실 거까지는 없잖아요!”
“이사장님도 정말 너무하세요!”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플레이어랑 같이 던전을 공략하는 거면 몰라도, 게임에서는 클라이드 혼자 뺑뺑이 돌리진 않는데.’
이는 확실히 원작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그렇다는 건 다시 말해서 나로 인해 생겨난 변화라는 뜻.
‘혹시 이사장이 우리가 친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갈라놓으려는 건가?’
그것도 석연치 않은 추측이었다.
리비로 플레이할 때도 스콰이어 가문이 장벽이 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갈라놓는 설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짝!
그때 패트리샤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자자, 이제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오늘의 안건을 이야기해보도록 할까요~? 다 같이 축제 때 클예부에서는 뭘 할지 정해보도록 해요.”
“네에~”
띠링!
[성좌 ‘물음표살인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축제는 왜 하는 건가요?]
설명은 패트리샤가 했다.
“우리 귀염둥이 신입생분들을 위해 발할라 축제의 목적부터 말씀드릴게요.”
“네에~”
1학년 클예부 회원들이 병아리처럼 대답했다.
“발할라 축제는 대규모 자선 파티랍니다. 축제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마수나 던전으로 인한 피해지역을 복구하는 데에 사용되지요.”
요지는 간단했다.
악마와 마수로 인해 활기를 잃어가는 제국에 생기를 불어넣고, 귀족들이 축제에서 쓴 돈으로 평민의 삶을 돌본다는 게 핵심.
“축제 행사에 참가신청서를 낸 사교 클럽들은 저마다의 재능을 이용해 수익을 내야 해요. 식당을 운영하거나 공연을 해도 되고 상품을 만들어 팔아도 된답니다. 여기까지 이해됐나요~?”
“네에~”
“여기서 퀴즈! 축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열릴까요~?”
그러자 똘망똘망하게 생긴 신입생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이틀입니다!”
“맞았어요! 다들 박수~”
짝짝짝짝!
다들 신입생 영애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박수쳤다.
띠링!
[성좌 ‘고인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 클럽에 가입하면 자존감 하나는 기가 막히게 높아질 듯;]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좌의 의견에 동의했다.
패트리샤는 X치동 일타강사처럼 설명을 이어 나갔다.
“축제가 끝나면 수익금 1위를 달성한 사교 클럽을 선정한답니다. 그리고 클럽 멤버 전원 가산점을 받으며 명예의 전당에 클럽 이름을 올릴 수 있지요.”
“우와아아~”
그 순간, 패트리샤가 눈을 서늘하게 떴다.
“어처구니없게도 작년 1위 사교 클럽은 데미사였습니다.”
“아아, 어찌 그런 일이…!”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한 영애가 수첩을 착 펼치며 말했다.
“첩보원에게서 입수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번 데미사는 마법 식물로 꾸민 홀에서 음악회를 열 거라고 하네요.”
그러자 방금까지 온순한 양 떼 같던 영애들이 악마가 깃든 흑염소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흥, 돈만 바른 그런 행사에 누가 가겠어요?”
“어디 홀인지 아시나요? 해코지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최근 평화가 너무 길었죠. 이날을 위한 폭풍전야였던 거예요.”
얘들아, 진정해. 이건 축제지 전쟁이 아니야…….
패트리샤가 고뇌에 휩싸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축제의 변수는 또 있어요. 바로 세실리아 카펜터 공녀와 이자벨 브론테 양의 활약 여부예요.”
그러자 다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두 사람은 어떤 클럽에 가입되어 있나요? 설마 데미사는 아니겠죠?”
“데미사는 아니지만, 부학생회장님이 있는 예술과 교양 사교 클럽 회원이에요.”
“듣자 하니 그쪽 클럽도 오늘 뭘 할지 정한다더군요.”
그러고 보니 리비가 그 클럽 회원이었지?
‘아까 카페에 같이 있더라니, 축제에서 뭘 할지 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나는 알고 있는 정보를 풀었다.
“그 클럽은 단막극을 할 거야.”
이곳저곳에 첩보원을 뿌려두었던 영애가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엿들었어.”
“아하.”
다들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테레제라면 직접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믿는 기색들이었다.
“저희는 더 대단한 걸 준비해요!”
“옳소! 옳소! 올해 명예의 전당은 우리의 것!”
“데미사를 격퇴합시다! 싹도 틔우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아요!”
클예부가 맹렬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울 동안 나는 귀를 팠다.
뭐가 어찌 됐든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띠링!
[퀘스트: 사교 클럽 매출 1위]
▸보상: +2,000,000코인
▸실패: 루미오 던전 개방
“…….”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스템 복구 중이라면서 호감도만 안 보여주고 할 건 다 하네.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오즈월드 죽어. 죽어. 죽어!
내가 속으로 오즈월드 사망 기도를 올리는 동안 영애들은 한 사람씩 손을 들어 축제 때 뭘 하면 좋을지 의견을 내놓았다.
“여기 앞에다 술이 흐르는 분수를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기각. 예산이 너무 든다.
“유명한 서커스단을 불러요!”
기각. 예산이 너무 든다.
“소규모 사냥터를 만드는 건요?”
기각. 예산이 너무 든다.
“저희도 초호화 연극을 해요! 주인공은 클라이드 님이랍니다.”
기각. 걔가 해줄 리 없잖아.
좀처럼 괜찮은 의견이 나오지 않자 영애들은 금방 울상을 지었다.
“으앙. 너무 어려워요.”
……대체 뭐가 어렵다는 거지?
‘한 거라고는 돈으로 사람 써서 남들이 벌이는 재주로 적당히 때우려는 아이디어밖에 없었잖아?’
나는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있는 영애들에게 말했다.
“예산은 적당히 들여야 해. 사용한 예산 대비 벌어들인 수익을 계산해서 클럽 순위를 매기니까.”
“그건 그렇지만요오…….”
핵심은 적은 예산으로 많은 돈을 버는 거였다.
그래야 1위가 될 테니까. 끄응.
“예산은 적게 들면서 외부인은 돈을 펑펑 쓰게 만드는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
“그런 게 정말 존재할까요?”
“제 남동생의 결혼 확률 같은 거네요. 걘 틀렸거든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 가진 재주를 이용해서 장사하는 건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여기 악기 연주할 수 있는 사람 있어?”
그러자 대부분 손을 들었다.
오호. 역시 귀족 영애들이야.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이번에는 절반 정도 손을 들었다.
“글씨 잘 쓰는 사람도 있어?”
이번에는 대부분 손을 들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질문을 더 했고, 영애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다 잘했다.
비록 클라이드 얼굴에 미쳐버린 기이한 집단이기는 하지만, 새삼 이들이 명문 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 실감 되었다.
“우리 클럽, 능력자들 모임이네.”
짝짝짝!
내가 박수치며 감탄하니 다들 영문은 모르겠지만 칭찬을 들어 기분 좋은지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으셨어요?”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사람들이 돈을 펑펑 쓰게 할 방법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