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01화 (102/277)
  • 101화

    * * *

    다음날, 아침.

    나는 책이 사방에 널브러진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엘로이즈가 내민 레몬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제도 또 늦게 주무셨죠?”

    이는 잔소리 마법 시동어였다.

    “아니. 일찍 잤어.”

    “거짓말은 더 나빠요, 아가씨.”

    “으응…….”

    엘로이즈는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마력 회로를 짜다가 실패한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됐어, 그런 거 일일이 줍지 마.”

    “네?”

    나는 손을 까딱거렸다.

    “모여라.”

    사라라라락!

    그러자 종이는 물론, 널브러진 책들도 단번에 착착착 테이블 위에 정리되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같은 마법을 사용했을 때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어머. 간편하네요.”

    “그렇지? 요즘 연구하는 건 옷을 입은 채로 간단히 샤워할 수 있는 클렌징 마법이야.”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좀 어렵긴 하지.”

    “대단하네요. 하지만 어떤 귀족도 마법으로 방을 청소하고 몸을 씻지 않아요, 아가씨.”

    “으응…….”

    엘로이즈는 “아가씨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시녀가 할 일을 해서는 안 된답니다.”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입막음하기 위해 버터와 잼을 바른 토스트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어쩐 일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네요! 얼른 준비해올게요.”

    한 번씩 판테온에서 먹었던 여우불 토스트가 생각나기도 했고, 엘로이즈는 내가 뭘 먹고 싶다고 말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뭘 먹고 싶다는 말을 안 하는 편인가?”

    띠링!

    [성좌 ‘먹방BJ찾는중’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네.]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마침표까지 찍네 ㅋㅋㅋㅋㅋ]

    나는 눈썹을 긁었다.

    “저기, 전 먹방 BJ가 아니라 로맨스 방송 BJ예요.”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네?]

    …아님 말고.

    나는 머쓱하게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

    “――?”

    “―. ――――.”

    그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찾아온 듯한 소리가 웅웅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래층까지 내려가 보기가 몹시 귀찮았지만, 호기심이 먼저였다.

    나는 미적미적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왔어?”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가주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1층 다이닝 룸의 원형 식탁 위에는 한 품에 안기 벅찰 정도로 큰 마법 식물로 꾸며진 꽃다발과 조그마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진짜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올려놓은 화려한 케이크까지.

    “저희 가주님이 냉혈한이라는 소문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요? 이렇게 로맨틱하신데!”

    확실히 마법 식물로 이루어진 꽃다발은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정도로 예뻤다.

    “마법 꽃으로 이만한 크기의 다발을 만들려면 보석값은 될 거예요!”

    꽃다발에는 작은 카드가 있었다.

    「고생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네 아버지 R.」

    “시험 결과를 들으신 모양이네.”

    “엣헴. 제가 어제 곧장 마법 전서구를 보냈답니다.”

    이런 거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애꿎은 꽃잎을 괴롭히다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어보았다.

    “어?”

    상자를 열자 익숙한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의 로사리오?!”

    2월 말일, 생트리오 호텔 경매장에 출품되었던 그 목걸이였다!

    띠링!

    [성좌 ‘물질만능주의’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참아버지]

    상자 안에도 작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생트리오 경매장에서 이걸 두고 웬 골동품이나 산 일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구나. 다들 가지고 싶어 하는 목걸이라기에 사보았다. 네가 가지거라.

    -네 아버지 R.」

    “너무 예뻐요! 아가씨께 잘 어울리겠어요. 어서 해보세요! 이 목걸이도 실 팔찌처럼 교복 속에 숨기고 다니면 교칙에 안 걸리겠죠?”

    발할라는 학생들 간의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과도한 장신구 착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리비가 준 실 팔찌는 과한 장신구라 보기 어렵지만, 교복 소매에 가려져 겉으로 보이지 않긴 했다.

    하지만 이 로사리오는 얘기가 달랐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이걸 어떻게 교복 안에다가 해?”

    줄과 로사리오 펜던트 전부 보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목걸이는 결코 일상생활에 하고 있을 장신구가 아니었다.

    ‘게임 내에서야 아이템 창에 장착하면 끝이니까 물리 법칙을 무시하지만, 지금은 현실이라고.’

    게다가 아직까지는 교복이 제법 두툼하다지만, 축제가 끝나면 얇은 하절기 교복으로 바뀔 터였다.

    “아쉽네요.”

    나는 목걸이 상자를 챙겨 들며 말했다.

    “이건 내가 따로 보관해둘게.”

    착용은 못 하지만,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수는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않겠는가?

    엘로이즈가 케이크 위의 티아라를 조심스럽게 들어 보관할 동안 나는 책가방을 챙겨 나왔다.

    아침의 시작이 좋았다.

    기분 좋게 등굣길을 걸으며 원소 마법에 관한 마법서를 읽던 중,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 데미안.”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불렀다.

    하나 데미안은 어느새 다가온 다른 친구들과 같이 본관이 아닌 경기장이 있는 방향으로 떠났다.

    “못 들었나…?”

    나는 다시 마법서를 읽으며 발할라로 향했다.

    이후로도 우리는 곳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안녕, 데미안.”

    “안녕.”

    그럴 때마다 데미안은 내 인사에 간단히 화답만 하고 지나갔다.

    ‘어라. 날 피하는 건가?’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레이니와 함께 새로 오픈한 식당으로 가는 길에 데미안과 마주쳤을 때는 이렇게 제안하기도 했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어쩌지? 먼저 약속한 친구들이 있어서. 나중에 같이 먹자.”

    뭐, 데미안은 친구가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데미…”

    “미안,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말을 끊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데미안 인물 정보.’

    [시스템 오류로 인한 복구 작업 중(67%)]

    시스템도 여전히 먹통이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하트 게이지 수치가 0이 된 것 같은데.”

    <신의 유희>에는 각 하트 게이지마다 남자주인공이 하는 특정 행동이 존재했다.

    [호감도: ♡♡♡♡♡] 상태의 데미안은 여전히 상냥한 표정과 말투로 플레이어를 대하지만, 길게 말을 섞지 않고 같이 자리하지도 않는다는 특징을 보였다.

    띠링!

    [성좌 ‘인싸 판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인싸들이 아싸 친구가 귀찮게 아는 척할 때 하는 행동]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애 이제 인싸거든요?!]

    나는 졸지에 인기인과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애가 되어버렸다.

    “끄응. 대체 이유가 뭐냐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시간이 길긴 했지만, 고작 붉은 하트 1개가 깎여나갈 정도의 공백이었다.

    그러니까 만일 하트 게이지가 0으로 내려간 게 사실이라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던전에서 돌아온 후로 정상 등교한 첫날까지 데미안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호감도를 떨어뜨릴 행동을 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날 피하는지 짐작되지 않았다.

    “하아아아. 이유라도 알자, 제발.”

    내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레이니가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선배?”

    “인간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하는 중이었어.”

    “자두 셔벗이 먹고 싶다는 말이죠? 얼른 테레제 카페로 가요.”

    나는 윽,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흘렸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

    “어째서요? 다들 이번에 오픈한 식당이랑 카페 둘 다 테레제라고 부르는데요?”

    소유권이 나한테 있기는 하지만 난 바지사장이거든?

    그리고 내가 원해서 연 가게들도 아니라고!

    “내 식당이라는 사실이 딱히 브랜드 이미지에 도움 될 거 같지 않아서 그래…….”

    레이니는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으로 카페를 가리켰다.

    “선배. 카페 터져나가는 거 안보이세요?”

    “…오픈빨이야.”

    카페에는 내 전용 자리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기다릴 필요 없이 테라스 자리에 앉아 자두 셔벗과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에는 내 주장으로 오늘부터 아이스 커피 판매를 시작했다.

    레이니는 괴이한 걸 보는 눈빛으로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응시했다.

    그러나 곧 우리는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테라스 자리의 장점을 만끽했다.

    그때 레이니가 물었다.

    “이제 곧 축제인데 선배네 클럽에서는 뭘 하기로 했어요?”

    “오늘 모여서 정하기로 했어.”

    5월은 축제가 있는 달이다.

    원래는 플레이어에게 던전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중요한 에피소드였지만, 지금은 글쎄.

    델브 던전이 일찍 열리는 바람에 축제는 평탄하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듯했다.

    “학생회에 사교 클럽까지 바쁘겠어요. 저 선배님도요.”

    레이니가 가리킨 곳을 보니 데미안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리비도 있었다.

    ‘아. 같은 사교 클럽이라고 했지.’

    리비는 날 발견하더니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주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이미 다른 곳을 보는 중인 데미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날 무시하는 건지,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네.’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그때 자두 셔벗을 다 먹어 치운 레이니가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참! 여기 뒷길을 따라가다 보면 선배 석상 있는 거 알아요?”

    “푸후웁!”

    나는 커피를 화단에 뿜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