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생명의 은인이 살아 돌아왔으면 재깍 인사하러 와야지. 코빼기도 안 내비쳐?
내가 못마땅함에 혀를 차고 있을 무렵, 성좌들은 클라이드를 언급하자마자 난리가 났다.
[‘클라이드’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직접 만나러 가길 강력히 바라고 있습니다.]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제발 클라이드 보러 가자 ㅠ]
이외에도 클라이드가 보고 싶다, 잘생긴 얼굴을 비쳐달라, 이승에서의 재회가 궁금하다는 식의 후원이 거듭되었다.
역시 던전의 여파가 큰 듯했다.
“잠깐만, 이승이라니? 던전은 저승 같은 게 아니라고요.”
각각 다른 던전을 만들어내느라 들인 비용과 노동력이 얼만데.
나는 투덜거리며 기숙사를 나섰다.
클라이드의 기숙사 위치야 훤히 꿰고 있었다.
“이쯤일 텐데.”
그의 기숙사는 유난히 깊고 으슥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똑똑.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훤칠한 남자가 나왔다.
“어?”
나는 상대를 보자마자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하며 인사했다.
“아, 안녕, 자카리.”
자카리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탄력적인 몸매, 빛바랜 듯한 짧은 캐러멜 블론드 헤어와 청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라울 급은 아니지만 잘생겼네? 평범한 조연은 아닐 것 같음]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왜 비교 대상이 라울이야?’
물론 라울의 외모는 본인을 빼닮은 테레제와 주세페를 낳은 만큼 상당히 근사하기는 했다.
자카리가 내게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스콰이어 공녀님.”
그는 오랜 시간 클라이드를 돌보고 있는 최측근 가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자카리는 악마를 감시하러 인간계에 잠입한 ‘천족’이거든.
‘게다가 악역이지.’
대의만 놓고 보자면 정의로운 인물이지만, 플레이에 따라 여주나 남주를 죽일 수도 있는 사망 변수였다.
그래서 악역으로 분류한 거기도 했고.
‘플레이 중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클라이드는 안에 있어?”
“도련님께서는 던전을 공략하러 떠나셨습니다.”
“뭐? 던전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자카리는 말없이 날 쳐다보았다.
“아하하… 난 이만 가 볼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냐! 나 원래 혼자 잘 돌아다녀. 들어가, 얼른.”
나는 직접 문을 열어 자카리를 기숙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카리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미적지근한 태도로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어. 물론이지.”
악마만큼이나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천족도 무섭고 거북하단다.
아니, 외려 악마는 인간을 이용할 생각에 살살 구슬리기라도 하지, 천족은 인간 따위 몰살당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일리야가 괜히 인간을 벌레 보듯 하는 게 아니라고.’
천족은 굉장한 종족 차별주의자들이거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클라이드의 기숙사에서 멀어졌다.
“어우, 다시는 저 기숙사에 안 가야지.”
[성좌들이 의문을 드러냅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자카리가 천족이자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띠링!
[성좌 ‘물음표살인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간간이 보이는 다른 귀족 기숙사들에 사람이 없는 것 같네요?]
“실제로 없어요. 귀족들은 기숙사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래서일까? 우거진 나무들과 고요한 길, 텅 빈 집이 뿜어내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으로 인해 한낮인데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으, 으흐흠.”
나는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실수로라도 빈 기숙사 창문 안쪽을 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유령이 나온다거나 뭔가가 숨어있는 등의 시나리오 같은 건 없었지만, 자꾸 무서운 쪽으로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전력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여기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게다가 저 방향은 내 기숙사가 있는 곳…….’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에서 누군가가 곡예 부리듯 훌쩍 뛰어내렸다.
“클라이드!”
클라이드는 숨을 헐떡이며 내게 다가오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며칠 보지 못한 사이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마른 턱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한껏 찡그리고 있는 미간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뭐야, 너 울어?”
한데, 아니었다.
클라이드는 돌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미세하게 어깨를 떨었다.
가려지지 않은 마른 뺨과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거친 물살을 가르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모르는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야, 야아…. 갑자기 울면 어떡해. 내가 곤란해지잖아….”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말하는 거 어질어질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싸이코패스인가요? ㅠ]
띠링!
[성좌 ‘인싸 판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싸식 말하기]
내 말에 성좌뿐만 아니라 클라이드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가 눈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날 노려보았다.
눈빛을 보니 진짜 짜증 난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하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톡톡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우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아프단 뜻이지….”
클라이드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내가 눈물을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
아무래도 내 죽음이 그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네.’
그리고 솔직히 감동하기도 했다.
날 그렇게 쥐 잡아먹을 듯이 굴던 클라이드가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는데.
마음이 뭉클해졌다.
“혹시 밥 먹었어? 샌드위치 먹으러 갈래? 물론 네가 사는 거야. 내가 널 살려준 건 사실이잖아. 은혜는 갚아야지.”
클라이드는 스트레스받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이 악물고 경고했다.
“제발 입 좀 다물어.”
하지만 사나운 눈빛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클라이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어정쩡한 손길로 내 등을 마주 안았다.
아직 시스템은 전부 복구되지 않았지만, 클라이드의 하트 게이지가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이제 친한 친구 맞지?”
“전혀.”
“하지만 가문끼리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눈치껏 너무 친한 티는 내지 말자.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을 거야.”
“헛소리 그만하라고.”
클라이드의 호감도는 붉은 하트 두 개가 확실했다.
그가 스스로 날 찾아와 살아있음에 안도하고 있었으니까.
* * *
해골이 표시된 노이즈 가득한 스크린이 무수하게 떠 있는 통제실.
오즈월드는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교차해 올린 교양 없는 자세로 앉아 정면에 띄워 놓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클라이드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말갛게 웃는 테레제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클라이드의 귀는 아까부터 터질 듯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나 표정은 설렘으로 달콤하게 젖어있기는커녕 괴로워 보였다.
“흐음.”
그의 심드렁한 시선이 다른 화면으로 이동했다.
바로 클라이드의 인물 정보가 떠 있는 창이었다.
[호감도: ♥♥♥♡♡]
테레제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녀가 끌어안은 순간 클라이드의 붉은 하트는 무력할 정도로 단숨에 2개에서 3개로 늘어났다.
그때, 다비드가 곁으로 다가와 화면을 쳐다보았다.
“테레제로는 공략이 어려운 캐릭터로 분석했는데, 가장 먼저 붉은 하트 3개를 채웠군요.”
“그러게요.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오즈월드 스트림 분석팀에서는 일리야나 데미안이 가장 먼저 붉은 하트 3개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예측했었다.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다비드의 물음에 오즈월드는 테이블에 올린 두 다리를 내리며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자잘한 흐름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역하렘 게임 빙의 콘텐츠에서 상대의 호감도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다비드는 오즈월드가 무엇을 생각하고 또 바라보고 있는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안개 너머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골몰하지 않기로 하고 이곳에 온 용건을 물었다.
“시스템 복원 일정은 언제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좀 더 극적인 타이밍을 기다려보죠.”
“채관위에서 방송 조작을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방송 조작. 이는 판테온에서 중범죄로 간주하는 일이었다.
하나 중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오즈월드와 다비드 두 사람 모두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특히 오즈월드는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하고 깨달음을 얻은 목소리나 낼 뿐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채널 관리자가 방송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그쪽으로 예측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어느 정도 조치는 해두는 편이 좋겠지.
“위원장실로 가봐야겠습니다.”
오즈월드는 지팡이를 휘둘러 채널 관리국 최상층으로 연결되는 포탈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뚜벅. 뚜벅.
채널 관리국 최상층은 일곱 명의 위원장이 사용하는 집무실만 존재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지타. 이타.
직급은 알파가 가장 높았으며 이타까지 순서대로 점점 권한이 작아졌다.
7인의 위원장은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직급이 높을수록 그 정도가 심했는데,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첫 번째 위원장인 알파는 생김새 외의 다른 정보는 알려진 게 없었다.
어차피 업무는 판테온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니 큰 무리가 없기는 했다.
그리고 현재, 오즈월드가 들어온 곳이 바로 알파의 집무실이었다.
알파는 상대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오즈월드 님.”
오즈월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네,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