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나는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려 스도쿠 던전에서 얻은 방어 마법이 걸린 아이템을 꺼냈다.
“던전에서 얻은 건데,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지?”
“방어 마법이 걸린 아이템이에요. 고대 마도 왕국 시대 때 물건이라 등급이 꽤 높을 것 같더라구요.”
꽤 높은 정도가 아니라 최상급이었다.
“됐다. 이런 게 있으면 네가 가져야지. 애초에 네가 얻은 물건이잖느냐.”
“제 것도 있으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아, 이건 새어머니 거고요.”
나는 대신 전달해달라는 의미로 라울에게 브로치를 내밀었다.
그러자 라울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직접 드리면 기뻐할 거다.”
썩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이템은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니 이런 선물이 싫지 않을 수는 있지만, 테레제가 주는 선물이니 경계하지 않을까?’
하지만 라울의 표정이 워낙 알 수 없는 확신으로 차 있어서 어물쩍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라울의 의견에 따라 직접 아이템을 전하기 위해 로잔을 찾아갔다.
그녀는 파리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로잔은 내가 침실을 찾아온 걸 보더니 잠시 이불을 걷을 듯이 만지작거렸다.
내가 찾아온 게 어색해서 집중을 흩트리려고 한 행동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이니?”
나는 그녀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아이템을 내밀었다.
“던전에서 얻은 물건이에요.”
혹시라도 거절할까 봐, 여러 개를 얻어서 가족들이 다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고 얼른 설명했다.
그러자 로잔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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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두 사람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정작 로잔은 테레제를 썩 미워하는 것 같진 않음]
성좌의 말처럼 나 역시 로잔에게서 날 미워하는 기색을 딱히 느껴보지 못했다.
그게 이상했다.
어떻게 테레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테레제가 살아 돌아온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
나는 로잔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인제 보니 이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만들어낸 것은 몹시도 얄팍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새어머니는 제가 밉지 않으세요?”
로잔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미워하다니?”
“제가 지금까지 새어머니께 못되게 굴었잖아요.”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내가 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설정을 집어넣은 게 바로 나였으니까.
로잔의 인생을 순탄치 못하게 만든 당사자였으니, 그 점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그간 못되게 굴었던 거 죄송해요.”
그러자 로잔이 리비와 너무나도 닮은 얼굴로 웃었다.
“네게 그런 말도 듣고……. 언제 이렇게 자란 건지 모르겠구나.”
새삼 그녀와 테레제가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만큼, 우리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한데 로잔은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건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라 기억나지 않겠지만, 네가 나를 마냥 밀어내기만 한 건 아니었단다.”
그게 무슨 말이지?
“테레제 넌 악몽을 꾸거나 천둥이 치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날은 꼬박꼬박 내 침대에 들어왔단다. 처음에는 베개를 가져오더니 나중에는 내 팔을 베고 누웠지.”
이는 시나리오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나로서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때 갑자기 찌릿하고 뇌리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악몽을 꿨니? 이리 오렴, 테레제. 많이 무서웠지?”]
‘어…? 이건 테레제의 기억인가?’
테레제의 기억은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보였다.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구나. 네가 헬렌 부인을 오렌지로 마구 때렸던 날이 있었는데. 어머, 어떻게 내가 이걸 잊고 있었지?”
“…네?”
“헬렌 부인이 내 드레스와 비교하며 한창 자랑하고 있을 때, 네가 껍질을 깐 오렌지로 그녀의 실크 드레스를 다 망쳐버렸지.”
[“이거 10년은 더 된 드레스 아닌가요? 공작부인께서는 참 검소하시군요. 저는 정말 쇼핑을 못 참겠어요. 이 드레스도 충동적으로 사버렸다니까요? 나비랑 벌 자수가 얼마나 섬세한지,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꺄아악!”
“쥬거! 이 볼레야! 몬생긴 게 까불고 이떠!”
“테레제, 그건 벌레가 아니라 곤충이란다. 푸흡, 오렌지를 내려놓으렴. 프흐흡.”]
“그때 웃음 참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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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참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내가 영상물을 감상하듯 보는 장면들이 성좌들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외에도 로잔의 금빛 머리카락을 콱 잡아당기며 못되게 굴다가도 다른 귀부인들이 새어머니를 괴롭히고 있을 때 꽤애액 소리 지르며 테이블을 엎어버리는 등.
테레제의 패악질 시리즈가 여럿 지나갔다.
‘이렇게 보니까 괜히 사교계에서 개망나니로 소문 난 게 아니었네.’
기억 속의 로잔은 지나치게 가파른 신분 상승으로 인해 대단히 고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친딸을 잃어버리기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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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해 가네… 테레제가 아무리 악랄하게 굴어봤자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 눈에는 어린애지…]
그래. 로잔에게는 테레제의 발악이나 괴롭힘 따위는 그야말로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지는 수준이었으리라.
‘오히려 혈통이 대단한 테레제가 난장을 부려주는 쪽이 로잔에게는 차라리 득이 된 것 같네.’
테레제의 친모는 유서 깊은 후작가의 장녀였다.
‘지금은 연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이제야 로잔이 왜 이불을 걷을 듯이 만지작거렸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테레제가 무서울 때마다 저를 찾아온 기억을 지니고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옆자리를 내어주려 한 거였다.
로잔은 나를 끌어안더니 아기를 재우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많이 무서웠지?”
“…….”
순간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기에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잔은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수천 개의 사망 루트 중 실제로 테레제를 죽음까지 내몬 전적이 있는 그 로잔이 나를, 그리고 테레제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아주 조금 흘렀다.
* * *
“……흥.”
로잔의 침실 문밖에는 주세페와 리비가 나란히 기대어 서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주세페는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표정을 구기고 있었지만, 리비는 이제 이 표정이 진심을 감추기 위한 심술임을 알고 있었다.
“어때? 언니는 좋은 사람이지?”
리비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약간 으스대며 말하자 주세페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고작 이딴 걸로 홀라당 넘어가는 쪽이 멍청한 거예요.”
“좋은 걸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멍청한 거 알아?”
“야!”
같이 지내 온 시간이 짧았던 만큼 리비에게 예의를 지켜 말하던 주세페는 결국 본래의 말버릇으로 돌아와 버렸다.
“너도 테레제랑 똑같아!”
“뭐? 정말 그래?”
리비가 황홀해하며 좋아하자 주세페는 환장할 기분을 느꼈다.
“이, 이 멍청한 누나가 진짜!”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세페와 리비가 화들짝 놀랐다.
문을 연 사람은 테레제였다.
“뭐해, 두 사람?”
“…….”
“…….”
둘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테레제가 씨익 웃으며 얄미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리비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주세페는 버럭 화냈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오늘은 피곤하니까 어렵고, 내일 놀아줄게.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갈까? 어머니는 좀 쉬셔야 하니까.”
주세페는 개소리 좀 그만하라고 화내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리비는 테레제가 로잔을 ‘새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언니가 변했어.’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던전을 다녀온 테레제는 어딘가 달라졌다.
‘좀 더 단단해진 것 같아.’
죽음의 위기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아마 테레제도 큰 위기를 겪고 온 만큼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리비는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나도 언니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이대로 정체되어 있어선 안 되겠지.
그때, 희미한 유백색 빛이 리비의 손끝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 * *
던전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종종 일어나는 사고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불사신이 되어있었다.
“…진짜야?”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하자 엘로이즈는 외려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하죠. 아가씨께서 들어간 던전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게다가 국장까지 준비하고 있었고요.”
진짜 문제는 이후에 더 있었다.
“아가씨의 국장이 결정된 날부터 쉴 새 없이 내리던 비가 생환과 동시에 그친 것도 신비롭지 않아요?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봐요.”
“아니. 조금도 일리가 없어.”
하아. 어째서 날이 갈수록 이상한 별칭이 자꾸 늘어가는 거지?
엘로이즈는 내 반박에 입술을 삐죽이더니 갑자기 히죽 웃었다.
“아가씨께서는 부정하시지만, 저는 세상이 아가씨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확신해요.”
대체 왜 나한테 그런 이상한 자아 의탁을 하는 건데?
내가 중학생 때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아가씨, 생각해보세요.”
“생각 안 할래.”
“현재 발할라에 아가씨를 기리는 석상이 세워져 있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게다가 이번 달에 오픈하는 새로운 식당과 카페의 이름도 전부 테레제 아가씨의 이름이 붙어있죠.”
내 경악한 표정을 보지 못한 엘로이즈는 전율하며 말을 이었다.
“수익에 대한 권한 전부 스콰이어 장학재단이 가지게 되었으니, 남의 집 안방에 한 자리 차지한 셈이죠. 심지어 원수의 안방이잖아요!”
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그런 계약을 체결해?
“아가씨는 살아 돌아오시자마자 마수 떼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도 하셨죠.”
“뭐? 내가 언제 세상을 구해?”
“아가씨도 참.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아가씨의 부름을 받고 강림한 고래 고스트들을 목격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엘로이즈는 배를 쭉 내밀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정상 등교하는 아가씨를 보며 질투로 부들거릴 윌로우 놈들을 볼 날이 너무나도 기다려져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