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물러나며 햇살에 눅눅한 어둠이 씻겨 내려갔다.
테레제의 죽음으로 절망에 잠긴 것처럼 느껴지던 세상이 갑자기 빛으로 물드는 순간, 라울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가주님!”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도노반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왔다.
“아가씨께서 살아계십니다! 지금 저택으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라울은 허벅지를 관통당한 탓에 포션을 쏟아붓고도 멀쩡하지 못한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나? 테레제가 살아있다고?”
“예, 가주님. 황립 공원에 나타난 던전에서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심지어 마수들도 전부 정화하셨다고 하십니다.”
라울은 마지막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이미 침실을 벗어나 무아지경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으니.
그는 달렸다.
마수의 공격에 꿰뚫렸던 허벅다리가 욱신거리도록 달렸다.
“아버지!”
맞은편에서 저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날개처럼 나풀거리며 말에서 뛰어내리는 테레제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정말로 살아있었다.
라울은 그대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너무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치밀어 목소리조차 턱 막혀버렸다.
대신, 저를 향해 다가온 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품에 안긴 작고 마른 몸이 가엽고 안쓰러워 오열했다.
테레제는 어쩔 줄 모르며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언니이이이!!”
“누나! 진짜로 누나야?!”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리비와 주세페,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로잔까지 달려와 안은 순간.
테레제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 흐윽… 죽는 줄 알았어요.”
여전히 제게는 마냥 작고 여린 딸이 바들거리는 손으로 가족들을 마주 안았다.
그간 억눌러 온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잘 돌아왔다, 테레제.”
그들은 오래도록 서로를 안은 채 재회했다.
* * *
테레제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졌다.
이사장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필 때마침 테레제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석상이 완성되어 설치 중인 이때 살아 돌아왔다는 보고를 듣다니.
그뿐일까?
상심이 클 라울을 위로한답시고 곧 오픈하게 될 발할라 내 신규 식당과 카페의 권리를 완전히 넘기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클라이드가 작성한 보고서를 봤을 땐 죽은 게 분명한데, 어찌 살아 돌아왔을꼬?”
그러자 테레제의 생환 소식을 보고하러 와있던 고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콰이어의 비전 마법을 깨우쳤다면 가능합니다.”
그 말에 이사장이 눈을 번득였다.
“진정으로 비전 마법을 손에 넣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 없다. 게다가…….”
이사장은 말을 하다 말았다.
“어쨌든, 진짜 비전 마법을 깨우쳤다면 내가 모를 리 없으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석연찮았다.
정녕 비전 마법을 깨우친 게 아니라면 테레제를 비호하는 신이라도 있어야 작금의 상황이 가능했으니까.
“이것들은 다 어찌할까요?”
이사장은 고든의 물음에 석상을 노려보며 마뜩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 그게 더 체면 구기는 짓일 테니.”
“…하지만 이래서는 테레제 스콰이어가 학교에 돌아왔을 때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겁니다.”
발할라는 단순히 마법사 양성 학교 따위가 아니었다.
혈연, 학연, 지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가치다.
그런 만큼 발할라에서 생성된 영향력은 졸업 이후에도 유지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허허. 호랑이 새끼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어.”
그것도 제 손으로 직접.
“테레제는 가만히 두어라. 새로운 던전을 클리어하여 황실 마법사 열 명을 살리자마자 마수 떼까지 정화했다지? 지나치게 기세 좋은 자는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본전도 못 찾고 된통 당하기 마련이다.”
자라는 싹을 밟아주는 것도 때가 있는 법.
심지어 지금 테레제는 자라는 싹이 아니라 비상하는 매였다.
“차라리 그런 이에게는 박수를 쳐주고 추켜세워라. 그리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올라선 자리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리다 추락하는 때를.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보통은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시적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 아이가 던전에서 대신 죽을 만큼 클라이드에게 열렬하다는 점이겠지.’
황실에 보고한 내용에는 일부러 삭제시켰으나, 이사장은 두 사람이 던전 안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제 손자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겨난 것까지도.
“클라이드는 어찌하고 있지?”
“새로운 던전으로 보냈습니다.”
이사장은 주름진 손으로 착잡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문질렀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아들이 낳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존재.
동시에 제 손으로 직접 감시하고 관찰하느라 어느 피붙이보다 가까이 두고 키워낸 끔찍한 괴물.
가문을 생각하면 당장 없애야 마땅했으나,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해 죽일 수가 없었다.
클라이드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아침까지 멍하니 있기를 반복했다.
“…그랬군. 어차피 클라이드는 발할라에서 더 배울 것도 없으니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계속 던전으로 보내라. 더는 테레제와 엮이지 않도록.”
어차피 그 아이는 죽지 않을 테니까.
고든이 담담하게 고개 숙였다.
“예, 아버지.”
* * *
스콰이어 공작저의 응접실.
나, 라울, 로잔, 리비, 주세페는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두덩이에 얼음을 대고 있었다.
이 중에 멀쩡한 사람은 손님인 일리야 한사람 뿐이었다.
띠링!
[성좌 ‘스콰이어 절대 지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붕어눈 가족 ㅠㅠ]
라울이 얼음주머니를 내리며 일리야를 향해 겸연쩍게 말했다.
“이런 꼴로 맞이하게 되어 미안하오, 교수.”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외려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일리야가 이렇게 사회성 넘치는 대답을 할 줄 아는 캐릭터였어?!’
물론 일리야는 나이도 매우 많고, 인간계 생활도 오래 했고, 천계를 박살 낼 생각을 한다는 것 외에는 상식적인 인물이긴 한데…….
그래도 이상하게 놀랍단 말이지.
심지어 그는 이렇게도 덧붙였다.
“저 역시 아끼는 제자가 무사히 돌아와 기쁩니다.”
가장 놀라운 건 전부 진심으로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교수님…….”
나는 뭉클해진 얼굴로 일리야에게 다가가려 했다.
꽈아아악!
양옆에서 나를 포박하듯 붙들고 있는 리비와 주세페만 아니었다면.
‘리비가 보기보다 힘이 무척 세구나. 내 팔 뜯어질 뻔했잖니.’
타고난 힘이 센 것도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라울이 일리야에게 물었다.
“혹시 발할라의 정상 등교 일정이 어떤지 알고 있소?”
“다음 주부터 정상 등교하게 될 겁니다.”
“쯧. 그때까지 황성에 실컷 불려가게 생겼군.”
그때 로잔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그때까지 일리야 교수도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떠신가요?”
‘흐음? 단순히 지도교수를 초대하는 느낌은 아닌데.’
로잔은 음흉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부드러운 태도 속에 모종의 의도를 숨겨놓길 잘하는, 그야말로 공작가의 안주인다운 인물이었다.
그러니 일리야를 공작가에 데리고 있으려는 것도 어떤 의도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의도가 뭔지 모르겠네.’
그러나 일리야는 흔쾌히 응낙했다.
“그러지요.”
로잔은 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참, 일리야 교수.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서른입니다만.”
“어머나. 젊어 보이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서른이면 이미 혼담도 많이 받겠네요?”
“?”
지금 나만 이 호구조사가 이해되지 않는 거야?
“부인?”
다행히 이해되지 않는 건 라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일리야 역시 묘한 기운을 감지한 듯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 올리며 답했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집안에서도 제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고요.”
로잔은 묘한 미소를 띠며 좋은 인연이 곧 나타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 그러니까 지금 로잔이 내 남편감으로 일리야를 고려 중인 건가?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음. 일리야가 남자주인공 후보가 맞기는 맞는데…….’
어쩐지 일리야를 쳐다볼 수가 없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자리는 어영부영 파했다.
나와 라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직계 혈족의 건강은 대단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정보였기에 나와 라울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비켜야 했다.
주치의는 내 상태를 보더니 기력이 좀 떨어졌을 뿐 멀쩡하다며 진찰을 끝냈으나 라울에게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각하, 이제 연세도 적지 않으신데 부상 직후에 전력으로 달리시면 어떡하십니까? 게다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시다니. 무릎에 무리가 간단 말입니다.”
“포션을 더 쓰면 되지.”
“포션이 만능이 아니니까 문제죠. 아무튼 한동안 거동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알았네. 알았어.”
주치의가 우리 부녀에게 말했다.
“아가씨의 건강은 문제가 없지만 이럴 때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탈 나는 법입니다. 두 분 모두 기력을 보하는 약을 꼬박꼬박 드시고 식사도 신경 써서 하십시오.”
“알았다니까. 이만 가게.”
라울은 잔소리가 지겹다는 표정으로 버럭거리고는 주치의에게 손짓하며 얼른 나가라고 명했다.
“내일도 오겠습니다.”
주치의는 라울이 이러는 게 익숙한지 들은 척도 않고 끝까지 할 말을 마친 후에야 나갔다.
엑스트라인데도 깡이 대단한 아저씨였다.
나도 이만 나가려다가 라울이 헛기침하며 좀 더 있다 가라는 기색을 내보이는 바람에 도로 자리에 앉았다.
“…….”
“…….”
눈물의 상봉을 언제 했냐는 듯 지금은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며 몹시 어색해졌다.
애초에 라울과 테레제가 살가운 부녀 사이도 아니었고, 나도 아버지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른단 말이야.
띠링!
[성좌 ‘프로훈수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우 숨 막혀; 던전에서 가져온 선물이라도 드려;]
‘아! 그게 있었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