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황실 마법사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공녀님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죠. 제가 문제를 풀게요.”
나는 아직 열리지 않은 문으로 다가가던 중 걸음을 멈췄다.
“식량은 여러분께 드릴 테니 다른 건 제가 가져도 괜찮겠죠?”
“다른 거요? 식량 말고 다른 것도 있습니까?”
“간혹 보상으로 금화 같은 게 있더라고요.”
“오, 그런 보상도 있었군요!”
그러자 닷새 만에 풍족한 식사로 배가 불러 마음이 넉넉해진 황실 마법사들이 하하 웃었다.
“물론 다 가지셔도 됩니다.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황실 마법사들은 푼돈에 아쉬움이 없는 족속이었다.
‘한 번도 소량의 식량 외의 보상을 본 적 없는 모양이군.’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죽을 뻔한 걸 살려줬는데 양심이 있으면 가진 재산도 다 내놔야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슥슥슥슥.
내가 빈칸에 거침없이 숫자를 써넣기 시작하자 황실 마법사들은 펄쩍 뛰었다.
“헉! 잠깐만요, 공녀님?!”
“아, 아니, 그렇게 고민하지 않고 마구 쓰시면 안에 식량이…!”
덜컹!
문이 열렸다.
“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황실 마법사들을 향해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갈까요?”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황립 공원.
유지스는 시종이 든 커다란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취향에 썩 맞지 않는 독한 담배 연기가 언짢은 심기와 함께 안개비를 뚫고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시종장 베인이 공손히 아뢰었다.
“폐하.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만 들어가심이 어떠실는지요?”
황제는 담뱃재를 떨며 다른 말을 했다.
“저건 언제쯤 해결되지?”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황립 공원에 맞지 않은, 새까맣고 불길한 흑색 돌로 된 문이 버젓이 무덤들 위에 솟아나 있었다.
테레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생겨난 던전이었다.
게다가 인근 마을에 갑자기 마수 떼가 나타나는 바람에 딸의 장례를 치러야 할 라울이 기사들을 이끌고 출정까지 나간, 그야말로 개판인 상황이었다.
“열 명의 황실 마법사가 던전을 클리어하러 들어갔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겁니다.”
“그래. 짐이 열이나 되는 귀족 출신 엘리트 마법사를 사지로 밀어 넣었지.”
황립 공원에 나타난 던전이라 해도 황실 마법사를 열 사람이나 투입하는 건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던전을 클리어해서 국장을 끝내고 싶다는 황제의 의지가 강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어째서 닷새가 흐르도록 소식이 없느냐?”
마력이 통제된 던전일 수 있다.
물리적인 시일이 필요한 시나리오형 던전일 수 있다.
혹은 열 사람으로도 모자란 던전일 수도 있다…….
설명할 말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베인은 그중 어느 것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무엇도 황제가 원하는 답이 아닐 것이기에.
그때 황실 기사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스콰이어 공작이 마수를 처치하던 중 비행형 마수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부상을 입고 피신했다고 합니다.”
“저런. 심각한 상황인가?”
“목숨은 지장 없으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경계를 강화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차라리 죽었다면 딸과 함께 묻어줬을 텐데.
“미리 일대의 경비를 강화해두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몸을 피하십시오, 폐하.”
유지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이번 국장에 거는 기대가 있었다.
‘마법협회원을 내세워 테레제 스콰이어가 마수를 조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라울을 자극하려 했더니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심지어 테레제의 죽음을 확정한 날부터 비가 쉴 새 없이 내렸다.
항간에서는 영웅을 잃은 세상이 비탄에 젖어 비를 쏟아 내리는 것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영웅이라니?
고작 던전에서 개죽음당한 망나니 공녀에게 붙이기엔 너무 과분한 호칭이잖은가.
하지만 사람들은 원래 죽은 이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지는 법이었다.
“지루하니 지치는구나. 황성으로 돌아가자.”
황제는 시종이 내민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끈 후 자리를 옮기려 했다.
“던전이 클리어됐습니다!”
이미 몸을 반쯤 돌렸던 유지스는 공교로운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혀있던 던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황실 마법사 제복을 입은 이들이 전원 무사히 살아서 귀환했다.
죽은 줄 알았던 테레제와 함께.
웅성웅성!
황제를 수호하는 수많은 기사와 시종들, 몇몇 귀족이 머무르고 있던 황립 공원은 순식간에 경악으로 들어찼다.
“진짜 스콰이어 공녀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유지스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당장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의 목뼈를 움켜쥐어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스콰이어 가문의 테레제가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 무사 귀환을 보고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사들과 함께 귀환을 보고하는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유지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잘 돌아왔다. 스콰이어 공녀.”
* * *
나는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유지스의 모습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생사를 오가는 위험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왔더니 날 죽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치광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새 호감도에 변화가 있진 않았겠지?’
일단 확인부터 해봐야겠다.
띠링!
[채널 관리자-오즈월드가 시스템을 복구 중입니다.]
[시스템 오류로 인한 복구 작업 중(4%)]
‘…어? 시스템 오류라니?’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마 사망 판정 유예되면서 시스템 과부하 걸린 듯? 이제 방송 재개해서 다 복구하려면 시간 좀 걸릴지도 모름]
<신의 유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호감도를 확인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눈으로 보고 상태를 파악하는 수밖에.’
그때 유지스가 다분히 주위를 의식한 태도로 나를 일으켜주었다.
“정말로 그대였군. 발할라에 생겨난 던전에서 죽었다고 보고받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어째서 제가 다른 던전에 끌려 들어가게 된 건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다른 던전에 끌려 들어갔다?”
유지스가 눈썹을 휙 치들었을 때, 황실 마법사들이 나를 변호하듯 던전에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공녀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꼼짝없이 전멸했을 겁니다, 폐하.”
음. 눈치가 있다면 그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유지스의 열받은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가?’
유지스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황실 마법사 열 명을 구하고 던전까지 말끔하게 클리어해버린 내 공로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공녀는 여러모로 재주가 좋군.”
“미천한 실력이나마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유지스는 때마침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부친이 마수를 상대하다 부상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네?”
내 안색이 나빠지자 유지스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졌다.
“걱정하지 말거라.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으니.”
“폐하, 죄송하지만 아버지께 가봐야겠습니다.”
“짐의 마음 같아서는 허락하고 싶지만 불허한다. 갑자기 비행형 마수 떼가 나타나 매우 위험한 상황이니 공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이치에는 맞으나 날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내 고통을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마수를 상대하겠습니다, 폐하.”
“이미 황실의 마법사들이 상대하고 있으니 공녀가 무리할 거 없다. 게다가 공녀는 인제 막 던전에서 돌아오지 않았느냐?”
내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제가 테레제를 보호하겠습니다.”
일리야가 특유의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이곳으로 다가왔다.
[‘일리야’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환호성을 터뜨립니다.]
나는 일리야를 보자마자 안도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교수님!”
그 순간 언뜻 유지스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던 것 같지만, 금세 내 곁에 다가온 일리야 때문에 제대로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일리야는 남들이 하듯이 황제를 향해 과도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흠잡기 모호한 수준의 예만 갖출 뿐이었다.
“번스타인 교수. 그대가 스콰이어 공녀를 보호하겠다고?”
“예. 제가 직접 테레제를 가문에 데려다줄 테니 폐하께서도 황성으로 이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지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리야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스콰이어 공녀는 짐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정양하거라.”
그때 위험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비행형 마수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보고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미 마수 떼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이래서는 상황을 무시하고 라울의 상태를 확인하러 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그 순간.
파앗!
손등이 빛나며 새끼 혹등고래 고스트와 계약했을 때 보았던 은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이게 갑자기 왜…?”
부우우우우우――――――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개비를 흩뿌리는 불길한 잿빛 구름을 가르고 찬연한 햇살이 들이치며 은빛의 몸체를 지닌 고래가 하강했다.
연이어 금빛의 어미 고래까지도.
신비롭고 압도적인 광경에 사람들이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저길 봐! 고스트다!”
“저 고스트들이 말로만 듣던…!”
“살았다! 우린 살았어!”
고래들을 본 순간 내 입가에는 절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얘들아!”
강력한 아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