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16. 생환
점멸됐던 시야가 돌아왔다.
내가 이동된 장소는 아무리 봐도 장례식장이 아니라 던전 같았다.
“여기가 어디야?”
던전이라면 내가 아는 곳일 텐데, 내부가 어두워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우선 내가 입은 옷을 확인해보았다.
“흐음. 델브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입고 있었던 옷이네.”
나는 발할라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 리본 위에는 인벤토리 아이템인 브로치가, 손목에는 리비가 생일선물로 준 실 팔찌가 돌아와 있었고.
“그렇다는 건 스토리형 던전은 아니라는 건데.”
스토리형 던전은 플레이어에게 특정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에, 옷차림도 거기에 맞게 바뀌었다.
내 분석은 거기서 잠깐 멈췄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아까부터 미친 듯이 울려대는 후원 알림 때문이었다.
휴방 이후 성좌들을 대면하는 순간이니 후원 코멘트를 읽고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했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으아아아!!!!!!드디어!!!!!!!!!!]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휴방 때문에 생긴 천 년 묵은 고구마가 내려가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휴방 동안 다른 채널 돌아다녀 봤는데 이만한 방송 없더라 ㅋㅋ 방송 재개로 노잼시기 극복☆]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잃어버린 고향에 돌아왔다…]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손실 못 참아!!!!!!!!!!!!!]
띠링!
[성좌 ‘여유로운 오후 티타임’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제 휴방 끝났나 봐요~^^ 축하의 의미로 꽃 한 송이 놓고 갑니다~ @>->-]
이게 얼마만의 후원 코멘트인지.
겨우 일주일 정도 휴방한 거지만, 체감상으로는 더 긴 시간 동안 성좌들과 소통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성좌들이 휴방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네에. 일단 주변부터 좀 볼게요. 제가 어디에 떨어진 건지 모르겠거든요.”
[성좌들이 회포가 너무 짧은 게 아니냐고 항의합니다.]
띠링!
[성좌 ‘철벽왕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판테온에서 맹한 얼굴로 팬미팅하던 테레제 어디 갔어? ㅠ]
‘내 팬미팅에 와 준 성좌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친근하네.’
나는 불빛이 희미한 내부를 유심히 살피며 유독 어두워 보이는 벽면을 건드렸다.
화르륵!
그러자 벽에 설치된 횃불들이 강한 불길을 뿜어내며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내가 건드린 벽은 문이었다.
문에는 81개의 칸과 1~9까지의 숫자가 채워져 있었다.
“아, 여기 스도쿠 던전이었네요. 보너스 던전인데 괜히 긴장했네.”
이곳은 마법사를 골탕 먹이려는 수학자가 만들어냈다는 설정의 던전이라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던전의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있어요. 스도쿠를 풀면 문이 열리고 다음 방이 나타나죠.”
나는 설명하면서 흰 분필로 빈칸에 숫자를 채웠다.
덜컹!
문이 열리고 다음 방이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스도쿠를 다 풀면 다음 방이, 또 다 풀면 다음 방이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그렇그렇게 문제를 풀다 보면 금화나 보석, 아이템 등의 보상이 있는 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보너스 던전이었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보너스 던전이라니. 시작부터 운이 좋은데?”
띠링!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젠 여기가 현실 된 거냐고 ㅋㅋ]
나는 손쉽게 스도쿠를 쭉쭉 풀며 문을 통과해나갔다.
“이렇게 된 거 아이템이나 싹 다 털어야겠다.”
5분도 되지 않아 금화가 쌓인 궤짝을 발견하니 절로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 이 방은 방어 마법 아이템이 있네요? 하나, 둘, 셋, 넷… 가족들한테 하나씩 주면 되겠다.”
띠링!
[성좌 ‘고인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테레제 다 컸네. 가족 챙길 줄도 알고. 이 할미는 이제 더 바랄 게 없어요.]
어떤 방은 문이 여러 개 있기도 했다.
“이런 방은 꼭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해요. 이 중 한 곳에는 무조건 좋은 보상이 들어있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던전을 털고 있을 때였다.
덜컹!
새로운 문이 열리자 웬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지? 갑자기 문이 열렸어.”
“끄으으… 배고파….”
“거기 누구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방을 들어갔다가 무려 열 명의 황실 마법사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죄다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응?”
“어?”
황실 마법사들은 내 옷이 발할라 교복이라는 것에 먼저 놀라고, 그다음은 내 외모에 놀라더니 마지막으로는 내 정체에 놀랐다.
“설마 스콰이어 공녀…?”
“마,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 테레제 스콰이어예요.”
그러자 난리가 났다.
“……악령이다! 악령이 나타났어!”
“으아아아악! 이제는 하다하다 죽은 사람이 나타나?!”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저기요. 죽은 사람이 나타난 줄 알고 놀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악령은 너무하잖아요?
황실 마법사들이 난리치고 있을 때,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르륵!
“끄으윽.”
마법사들은 격렬히 날뛰던 걸 멈추고 도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간신히 분위기가 절망적으로 차분해졌을 때,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내가 들어온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라도 좀 드실래요?”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나쳐온 방들에 있는 식량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고, 황실 마법사들은 풍족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내가 가져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천천히 드세요. 음식은 더 있으니까.”
모자라면 문제를 더 풀면 되고.
황실 마법사들은 감동하다 못해, 나를 찬양했다.
“이 던전만 나가면 반드시 공녀님께 은혜를 갚겠습니다! …컥, 컥!”
“예에, 그러세요. 여기 물부터 드시고요.”
황실 마법사들은 귀족으로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처음으로 극도로 굶주린 경험을 하게 된 정신적인 충격이 커 보였다.
그래서인지 예법도 체통도 다 집어치우고 오직 살기 위해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나마 이들을 이끄는 수장 격으로 보이는 마법사는 금방 정신을 차린 얼굴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다고 음식 먹는 걸 멈춘 건 아니지만.
“이 던전에서 공녀님과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윌로우 소공자께서 자신을 대신해 공녀님이 죽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우걱우걱.”
클라이드가 멀쩡하게 돌아갔을까, 조금 궁금했었는데, 걱정할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바깥에서는 공녀님의 장례가 한창 준비 중이었습니다. 우걱우걱.”
어차피 판테온에 대해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얼버무렸다.
“저도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눈떠보니 던전을 떠돌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여러분을 만났고요.”
던전은 워낙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이들은 내가 지지리도 재수가 없어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던전에 휘말려 휘말렸다고 이해한 듯했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우걱우걱.”
음…. 이쯤 되면 위가 꽉 차지 않나?
황실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어 치웠다.
띠링!
[성좌 ‘나만 아니면 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방마다 식량도 넉넉하던데 얘들은 왜 이렇게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이지?]
나도 그게 궁금했다.
“다들 던전에 들어온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네요?”
“예. 오늘로 닷새째입니다.”
“네? 닷새째요? 이 던전에 왜 그렇게 오래 계신 거예요?”
띠링!
[성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스도쿠 문제를 못 풀어서 그런 거겠죠.]
‘악랄하다니.’
탈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문제가 어려워지긴 해도 성인이라면 무난하게 풀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황실 마법사들은 상당히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저희도 정확한 규칙은 모르겠지만 문제를 틀릴수록 식량이 줄어드는 구조인 것 같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제가 확인했을 때도 빈칸에 숫자를 틀리게 쓰면 다음 방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줄어드는 것 같았어요.”
라고 설정해두었다.
“역시 그렇죠? 저희도 그렇게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공녀님께서는 어떻게 식량이 그만큼이나 남으실 수 있었던 건지……?”
그야 한 번도 안 틀렸으니까.
나는 척 봐도 심하게 고생한 듯한 황실 마법사들에게 눈치 없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는 혼자서 문제를 풀다 보니 식량이 넉넉했던 모양이에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풀어온 방들은 식량이 너무 넉넉했다.
황실 마법사들은 썩 개운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렇습니까?”하고 넘어갔다.
때로는 진실을 은닉하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로운 법이었다.
그들은 지난 닷새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황실 마법사들은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숫자판을 맞닥뜨렸을 때 규칙조차 알 수 없어 엄청나게 틀렸다고 했다.
“그러다 3x3칸마다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그리고 81칸의 가로세로 줄에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겹치지 않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규칙을 깨닫는 것과 문제를 푸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황실 마법사들은 간신히 문제를 풀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도 열 사람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한 식량만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배가 고프니 더더욱 문제를 푸는 일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다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는데 공녀님이 나타나신 거죠. 이게 바로 신의 안배가 아니겠습니까?”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