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92화 (93/277)

92화

* * *

악덕 엔터 기획사에 속아 노예 계약서를 쓴 연예인처럼 굴려지며 쪽잠으로 연명하던 하루하루.

나는 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똑똑.

“아가씨, 다비드입니다.”

끄으으. 또 오즈월드의 노비로 열심히 일할 시간인가?

“들어와…….”

오늘은 또 무슨 일정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울적한 마음으로 꿈틀꿈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무, 뭐, 뭐야? 용?!”

웬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용 두 마리가 내 곁에서 자고 있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마침내 헛것마저 보는 거야?’

아침 식사를 실은 웨건을 끌고 들어온 다비드가 이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더니 태연히 말했다.

“키케, 베니토. 변신이 풀려있습니다. 아가씨가 놀라잖습니까.”

이 용들이 쌍둥이라고?

그때 쿨쿨 자고 있던 두 마리의 용 중 하나가 눈꺼풀을 스르륵 들어 올렸다.

확실히 호박색 눈동자는 쌍둥이들의 것과 똑같았다.

<신의 유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존재에 나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너희 용이었어? 용인데 생각보다 작네? 그래서 인간 모습도 작은 거야? 헤츨링 같은 건가? 그렇다기에는 생긴 건 동양의 용인데.”

키케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날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은 없지만 날 질려 하는 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탈피해서 작아졌을 뿐, 원래는 성체다.”

그래도 내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은 성실하게 해주는 편이었다.

“탈피도 해? 그런 건 이무기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데 탈피랑 몸이 어려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 환골탈태 같은 건가?”

키케가 빵 조각을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식사할 거니까 말 걸지 마.”

“으응. 미안….”

그때 베니토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후 귀에서 귀마개를 쏙쏙 뽑았다.

어쩐지 계속 잘 자더라니…….

키케가 다비드에게 빵을 불쑥 내밀었다.

‘설마 다비드를 챙겨주는 건가?’

“다비드, 토스트 구워줘.”

아니었다.

“제 여우불은 토스트 굽기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불로 구워야 맛있다.”

다비드는 반론을 포기한 얼굴로 대량으로 토스트를 구워내기 시작했다.

가엾은 다비드. 하루 이틀 착취당하는 게 아닌 듯했다.

그건 그렇고 키케의 말대로 그윽한 불 향이 느껴지는 토스트는 상당히 맛있었다.

가져온 빵을 몽땅 구워 토스트 무덤을 쌓고 그 옆에는 포도 무덤을 쌓은 다비드가 말했다.

“저는 이만 출근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내가 의아하게 물었다.

“응? 나 오늘은 일정이 없어?”

“네, 이제 일정은 끝났으니 쉬시면 됩니다.”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일정 지옥에서 해방인가? 만세!’

다비드가 떠나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포도를 먹고 있는 쌍둥이에게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키케는 첫째라서 눈물점이 하나, 베니토는 둘째라서 눈물점이 두 개야? 놀라운 유전 시스템이네. 푸하하하!”

“이상하게 열받는다. 아가씨에게 포도알을 던져도 될까, 베니토?”

“임무에 어긋나는 행위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뭘 하면 좋을까? 성의 풍경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탐방이나 다닐까?

아니면 오즈월드 방에 있는 와인셀러나 다 털어버려?

이런저런 즐거운 계획을 세우던 중 문득 내 곁을 꼭 지키고 있는 쌍둥이가 눈에 들어왔다.

쌍둥이는 날 성가셔하면서도 꿋꿋하게 곁을 지켰다.

“나랑 붙어 있는 거 피곤하지 않아? 가서 쉬어도 되는데.”

그러자 내 질문을 유독 질색하는 베니토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터무니없이 약하다. 그러니 우리가 지켜야 한다.”

“오…….”

그런 말을 이렇게 귀여운 모습으로 하면 내 마음이 사르르 녹지.

나는 베니토를 끌어안고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언뜻 베니토가 한숨을 쉰 것 같기도 했다.

키케는 남은 포도알을 뜯어 먹은 후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우리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니 판테온에 있는 동안 절대로 죽지 않게 지켜줄 생각이다.”

“이름을 부른 게 날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지 우리를 이름으로 부른 사람은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반면 쌍둥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은 이상하게도 금방 죽었지.”

“어… 왜?”

“이유는 모른다. 우리가 그런 것으로 행동에 차등을 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항상 그랬다.”

키케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걸 두고 쌍둥이 법칙이라 부르기로 했다.”

쌍둥이 법칙이라니.

굉장히 귀엽고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어쨌든 난 그 법칙에 합격했다는 거지? 다행이네.”

이번엔 키케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포도는 언제 전부 먹어버린 거야? 난 하나도 못 먹었는데.”

베니토가 키케를 가리켰다. 키케가 다 먹었다는 뜻이었다.

“됐어. 토스트나 마저 먹지 뭐. 한참 먹은 것 같은데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잖아? 언제 다 먹어?”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쌍둥이들이 잼과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다섯 장씩 겹쳐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다비드가 토스트를 왜 이렇게 많이 구웠나 했더니, 쌍둥이가 엄청난 대식가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뚜벅. 뚜벅.

그때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인기척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처럼 새빨간 슈트를 입은 오즈월드였다.

그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다가와 토스트를 우물거리고 있는 내 뺨에 키스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물우물.

나는 버터와 잼을 잔뜩 바른 토스트를 입에 가득 욱여넣은 채 우물거릴 뿐이었다.

이제는 뺨을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대신 미리 만들어 둔 잼 버터 토스트 한 조각을 내밀었다.

“먹을래?”

오즈월드는 빵가루가 잔뜩 묻은 내 입가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아뇨. 비위가 상해서.”

아, 예. 비위가 상하시는구나?

나는 보란 듯이 마주 웃으며 입을 와앙 벌려 토스트를 먹어 치웠다.

그러자 오즈월드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따라 귀엽게 구는군요.”

윽. 끔찍한 말에 속이 메스꺼워져 먹던 토스트를 내려놓았다.

씹고 있던 건 꿀꺽 삼킨 후 용건이나 물었다.

“여기는 뭐 하러 왔어? 다비드는 출근했는데.”

“방금 당신의 사망 판정 결과가 나왔거든요.”

오즈월드가 화면을 띄워주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시스템의 판정이 어떠니, 설정이 이러니, 퀘스트 완료 시점이 저러니 등등 길게 쓰여있었으나 요점은 이러했다.

“채널 관리 위원회에서 퀘스트 보상 수령 후 방송을 재개하라고 했습니다.”

내 표정은 더없이 환해졌다.

판테온에서의 생활이 마냥 불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갑갑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날 반겨주고 좋아해 주는 성좌가 많다는 건 알지만, 그만큼 나를 싫어하는 성좌도 많이 봐서일까.

판테온에서의 나는 무력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오즈월드가 하단의 서명란을 가리켰다.

“서명하면 보상 수령에 대한 안내와 함께 방송이 시작될 겁니다.”

“이렇게 바로?”

얼른 <신의 유희>로 돌아가고 싶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제대로 작별 인사할 시간도 없이 이렇게 등 떠밀리듯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쌍둥이들을 꼭 끌어안았다.

쌍둥이들은 날 귀찮아하거나 한숨을 내쉬는 대신 처음으로 마주 안아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비드에게도 안부 전해줘.”

“알겠다.”

“혹시라도 내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올 수 있다면 꼭 와. 거기도 토스트랑 포도는 있으니까.”

“응.”

그때 오즈월드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쌍둥이들과 떨어뜨렸다.

“그새 정든 것까지는 좋습니다만, 이들도 엄연히 성인 남자입니다. 로맨스 방송의 BJ인 만큼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나는 말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오즈월드는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시스템 창이 떴다.

띠링!

[보상을 수령 하시겠습니까?]

“네.”

[던전 퀘스트 보상 ‘발할라로 복귀’가 통로 소멸로 인하여 다른 보상으로 변경됩니다.]

[발할라로 복귀→테레제 스콰이어 장례식으로 복귀]

“…응? 내 장례식이라니?!”

나는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오즈월드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열받게 손을 살랑거리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을 시작합니다.]

시야가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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