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일어나세요.”
매끄럽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가라앉아있던 정신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허억!”
나는 침대에 엎어진 채로 물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거친 숨을 여러 번 토해냈다.
송곳으로 찔린 듯 아찔한 두통, 축축하게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나는 새하얀 시트를 내려다보며 쉽사리 고개 들지 못했다.
혹시라도 여기가 작업실이 아닐까 봐.
내가 제작하던 게임 속 악역이 되었다는, 꿈이어야 마땅할 이상한 일이 정말로 현실일까 봐.
“…….”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벽지 무늬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스콰이어 공작저용으로 디자인한 벽지였다.
나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잖아…….”
“전혀 아니죠.”
흠칫!
낯선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초식 동물처럼 몸을 웅크리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꼴깍.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상대는 요란한 탈색 머리에 귀에는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아놓았으며 괴기스러운 새빨간 양복 차림이었다.
아래로 늘어진 눈매와 여유를 머금은 입꼬리.
모든 게 불협화음을 일으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는 우리 팀에서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었다.
“당신 누구야?”
남자는 과장된 동작으로 내게 서양식 인사를 건넸다.
“채널 관리자인 오즈월드입니다. 성좌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원활한 진행을 도와드릴 도우미라고 볼 수 있겠네요.”
나는 혼절하기 전에 보았던 [성좌들이 입장합니다.]라는 알림창을 떠올렸다.
빙의가 꿈이 아니었으니 BJ라느니, 방송이라느니 그것들도 전부 꿈이 아닐 터.
‘……말이 돼?’
그딴 게 진짜라고? 대체 어째서?
오즈월드는 손에 쥐고 있던, 눈에 루비가 박힌 해골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휙 휘둘렀다.
드르르륵!
1인용 소파가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침대맡까지 끌려왔다.
나는 조금 멍해진 눈으로 초현실적인 현상을 쳐다보았다.
오즈월드가 자리에 앉고는 품평하는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하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나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침대에 바로 앉았다.
이불이 견고한 갑옷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꽉 쥐고서.
오즈월드의 시선이 주름진 이불에 닿더니 피식 비웃음을 그려냈다.
“긴장할 것 없습니다. 제가 하는 제안은 당신에게 전혀 해로울 게 없는 거니까.”
“그건 내가 판단해.”
내 딱딱한 대답에 오즈월드는 “좋을 대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널 관리자란 당신이 살던 세계로 빗댄다면 방송국 PD 같은 겁니다. 단, 대상이 인간이 아닌 성좌님들이라는 점이 조금 다르죠.”
오즈월드는 설명을 이어가다 일순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주로 재난, 전쟁, 배신과 복수 같은 어두운 장르를 통해 성좌님들을 만족시켜왔습니다만…… 하아. 최근의 방송 트랜드가 바뀌었지 뭡니까.”
딱!
오즈월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너튜브 인기 동영상 순위를 나열한 화면 같은 게 떴다.
나는 최대한 안간힘을 써서 이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이건 또 뭐냐고!’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번번이 경악스러웠다.
오즈월드는 내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본인이 하고픈 말만 지껄여댔다.
“1위부터 30위까지가 죄다 로맨스인 게 보이십니까?”
쯧. 오즈월드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가 얼마나 사랑 이야기를 싫어하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트랜드가 이렇다 보니 저도 합류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기존에 운영하던 채널들의 인기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던 중 <신의 유희>를 발견한 거죠.”
“잠깐만.”
나는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 방송이라는 건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에 창작자를 빙의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꼭 게임에 빙의하는 게 나일 필요는 없었던 거잖아.’
“……왜 하필 나야?”
그러자 오즈월드가 묘한 미소를 걸치며 대답했다.
“<신의 유희>는 구성 요소가 몹시 전형적이라서 로맨스물의 첫 시작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음, 당신이라는 사람도 그렇고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
자신의 바람을 담은 게임마저 만들 정도로 사랑이 고픈 전형적인 자아의탁형 창작자.
내포된 의미를 깨닫자마자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오즈월드는 저런, 하고 짐짓 나를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창피해할 것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전혀 위로될 리가 없는 말이었다.
나는 진창에 처박힌 기분으로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치욕스럽고 불쾌했다.
당장 저 남자의 뺨을 쳐서 입을 닥치게 만들고 싶을 정도로.
울컥 치솟은 감정이 나를 뒤흔들었으나 애써 억눌러 삼키고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빙의한 이 몸은 악역이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로맨스를 이끌어나갈 수 없을 텐데?”
‘그러고 싶지도 않고.’
오즈월드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더 재미있겠죠.”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게 사람을 상당히 열받게 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오즈월드는 피식 웃었다.
내 뾰족한 반응이 가소롭지도 않다는 양. 지금껏 너 같은 애가 한둘이었는 줄 아느냐는 듯.
“아아.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성좌님들의 후원금을 모으면 살 수 있는 [소원권]이 아쉽지 않다면요.”
오즈월드가 또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새로운 창이 떴다.
▼
[상점]
▹소원권 [1,000,000,000코인]
: 어떤 소원이든 1회 들어준다.
▲
“원수를 죽여달라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시시한 소원부터 한 차원을 없애 달라는 소원까지 뭐든 가능합니다.”
그렇다는 건 다시 지구로 돌려보내 달라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내 생각을 알아챈 건지 오즈월드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살던 곳에 돌아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선 방송을 종료해야 하지만요.”
“방송 종료…?”
“네. 게임도 결국 끝이 있듯 이 콘텐츠가 종료되면 방송도 끝납니다. 무사히 방송이 끝나면 이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죠. 그걸 원치 않는다면 방송 종료 전까지 10억 코인을 모아서 소원권을 구매하면 됩니다.”
지구로 돌아가려면 이 방송을 끝내고 10억 코인을 모아 소원까지 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방송에서 제작진이 출연진에게 미션을 주는 장면을 본 적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이죠.”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벼락처럼 귓가에 내리꽂힌 순간.
띠링!
[퀘스트: <신의 유희> 하드 모드로 진엔딩 보기]
▸보상: 방송 종료
▸실패: 사망
퀘스트 창이 생성되었다.
오즈월드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방송은 철저히 <신의 유희>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기반으로 진행됩니다.”
게임은 보통 3가지 단계가 있다.
난이도가 가장 쉽고 플레이 중 죽어도 즉시 부활하는 [이지 모드].
진행 난이도는 이지 모드보다 높지만 플레이 중 죽었을 때 즉시 부활하는 [노말 모드].
가장 많은 사망 루트와 배드엔딩 요소가 깔려 있으며 죽으면 그대로 게임 오버인 [하드 모드].
나는 <신의 유희>를 하드 모드로 진행해야 한다. 그것도 악역인 테레제로서.
‘하지만 테레제로는 진엔딩을 볼 수 없어.’
진엔딩은 오직 여주인공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흐르는 피, 타고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처럼 이는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즈월드는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 끔찍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제대로 플레이하지 못한 BJ는 사망 후 지옥에 떨어지게 되죠.”
…죽는 걸로도 모자라 지옥이라니?
“지옥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실현시킬 겁니다. 끝없이 반복해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불행 속에 빠뜨리는 일 같은 것 말이에요.”
오즈월드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개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의 지옥은 높은 확률로 8살부터 20살까지의 인생을 무한히 반복하는 일이 되겠군요.”
“…….”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즈월드는 어딘가 황홀해하는 기색으로 내 턱을 꽉 잡아챘다.
눈 깜짝할 새에 숨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드디어 엿 같이 침착한 표정 대신 제 맘에 쏙 드는 표정을 짓네요.”
시선이 혀처럼 내 얼굴을 핥았다.
탁!
소름 끼치는 불쾌감에 내 턱을 쥔 손을 매섭게 쳐내며 오즈월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표정도 흥을 돋우는군요. 역시 제 안목이 정확했다고나 할까요?”
변태 양아치 새끼. 죽어버려.
“조금 더 설명하고 싶지만 광고 영상을 너무 오래 틀어두면 성좌님들이 대거로 이탈하셔서 말이에요. 이만 방송을 재개하도록 하죠.”
오즈월드가 지팡이로 딱! 소리가 나게 바닥을 찍자 엷은 정전기가 온몸을 훑으며 뒤로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째깍. 째깍.
이어, 그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잠깐 멈췄던 모양이었다.
“부디 대형 채널의 BJ가 되길 바랍니다. 신지우 양.”
오즈월드는 그 말을 마치며 증발하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