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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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빛 장발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중년의 사내가 족히 스물은 나란하게 걸어도 될 거대한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이곳은 황성의 심장부.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기거하는 태양궁이었다.

    태양궁은 사방이 황금으로 뒤덮여 있으며 모든 직물에는 자수가 빼곡하여 화려하고 웅장했다.

    누구든 이 공간에 있노라면 세상이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되리라.

    그러나 사내는 몽마의 꿈처럼 달콤한 공간에 취하지 않았다.

    외려 이런 환락에 취하게 만들려는 궁의 주인에 대한 경계심만 높아질 뿐이었다.

    황제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있는 태양궁이라지만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했다.

    사내는 유령처럼 지나가는 하인의 발을 보았다.

    그는 신발에 천을 덧대고 있었다.

    이는 황제의 신경증이 도졌다는 뜻이었다.

    깊은 한숨이 나올 듯했다.

    마침내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문 앞에 있던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 너머로 아뢰었다.

    폐하윌로우 가문의 고든 윌로우 경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안으로 들일까요?”

    들라 하라.”

    윌로우 공작의 차남고든은 열린 문으로 들어가기 전 멈칫했다.

    열린 문 틈새로 독한 담배 냄새가 훅 풍겨온 탓이었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견뎠다.

    감히 황제 앞에서는 함부로 기침을 터뜨려서도미간을 찌푸려서도 안 되니까.

    고든은 즉각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고풍스러운 예를 갖추었다.

    이 나라의 지존이시자 태양궁의 주인이신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황제는 햇빛을 등지고 있음에도 수려함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백금색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찬연히 빛났고열 손가락에 전부 낀 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반지는 그보다 훨씬 반짝였다.

    5살에 황위를 물려받아 이제야 31살이 된거의 평생을 황제로 살아온 자.

    유지스 로드리고.

    그가 흐트러진 자세로 손에 쥔 서류를 한 장씩 팔랑팔랑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

    다분히 경망스럽고 가벼운 행동이었음에도 황제가 지닌 위압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외려 그런 장난스러움이 상대방을 더 긴장시켰다.

    스콰이어 공녀가 첫 학생회 활동부터 대단히 활약했다지?”

    빌어먹을 스콰이어.

    고든은 아찔함에 눈을 감고 싶었다.

    그렇습니다폐하.”

    침식으로 오염된 땅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내다니어떤 마법사도 해내지 못한 일인데 말이지거기다 마법 동물을 다스리는 놀라운 능력까지 보여주었다고?”

    황제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고든은 이게 진실로 흡족한 마음에서 우러난 웃음이라 생각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분노였다.

    짐이 궁금한 게 있노라고든.”

    말씀하십시오.”

    스콰이어 가문이 비전 마법을 잃은 지도 벌써 100년이 흘렀다한데 어찌하여 여전히 건재한가?”

    …….”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비전 마법을 잃었으면 다른 가문들처럼 얌전히 쇠락을 길을 걷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지 않은가?”

    반박의 여지 없이 지당한 정론이었다.

    짐은 스콰이어 가문이 이번에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장녀로 인해 몰락하리라 생각했어.”

    그건 고든도 마찬가지였다.

    테레제에게 마법 동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면 발할라에서 진작 알아보았어야 했을 텐데어째서 파악하지 못한 거지?”

    공녀는 적성 검사에서 이미 최악의 상성을 보여주었었습니다다만 파악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그러한

    퍼억!

    황제가 테이블 위에 있던 국새를 집어던져 고든의 어깨를 강타했다.

    “-!”

    고든은 철저히 비명을 삼켰다.

    오늘은 어떤 고통에도 절대 소리 내어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심기 불편한 황제가 처벌의 강도를 더 높일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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