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277)
  • 똑똑.

    아가씨일어나셨나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해가 비쳐 드는 것을 보니 아침인 듯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까지 책을 읽은 기억이 났다.

    이후로는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 결국 다 못 읽었네.”

    나는 다 읽지 못한 마지막 한 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강의 전까지 다 못 읽을 것 같은데.’

    책을 다 읽으라고 한 사람이 그냥 교수였다면 고개 처박고 죄송합니다.” 하며 죄송한 척진짜 노력한 척하면 그만이지만애석하게도 상대는 대악마였다.

    책을 못 읽었다고 죽이진 않을 거야.’

    들어와엘로이즈.”

    엘로이즈는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몹시 허기져서 달콤한 빵과 버터를 입에 욱여넣고는 있는데칼칼하게 끓인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다고 직접 요리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꾸준한 도전이 있었지만도저히 먹지 못할 괴식만 탄생시킨 전적이 화려한 탓이었다.

    나름 수학적인 접근으로 요리한 건데 뭐가 문제지?’

    배달 문화가 발달 된 나라에서 태어나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식사를 마치고 씻은 후 엘로이즈가 가져온 새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환복을 돕던 엘로이즈가 속상하게 말했다.

    교복이라는 건 정말 미개한 문화인 거 같아요아가씨께서 공작저에 계실 때는 하루에 최소 두 번은 드레스를 갈아입으셨는데 말이에요.”

    엘로이즈는 가신 가문의 딸이라 그녀 역시 귀족이었다.

    그랬기에 오전용 드레스와 오후용 드레스가 구별되지 않은 교복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교복만 열 벌이나 있는데…….’

    아무래도 세탁과 다림질에 시간이 걸리니 늘 새것 같은 옷차림을 유지하려면 최소 열 벌은 있어야 했다.

    이것도 한 학기에만 입고 말 옷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마음에 드는데.”

    대학생 때는 교복이 입고 싶었다.

    매일 뭘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편한데.’

    나는 귀족 아가씨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교복을 갖춰 입고다 읽은 마법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아직 초반부만 본 마지막 책은 본관으로 가면서 읽을 예정이라 손에 들었다.

    그때 엘로이즈가 화려한 보석 상자를 꺼내왔다.

    아가씨브로치를 아직 하지 않으셨어요.”

    안에 든 것은 클예부를 뜻하는 은나비 브로치였다.

    나는 고개 저었다.

    이 브로치는 치워둬앞으로는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엘로이즈는 놀란 눈으로 멈칫했다.

    브로치를 들켰다간 라울이 당장 잡아 뜯어 버렸을 테니 공작저에서는 착용하지 않았던 거지만.

    오늘까지도 됐다고 하니 몹시 의외였던 모양이다.

    엘로이즈는 기꺼운 기색이 느껴지는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간 테레제가 원수 가문의 후계자를 짝사랑하다 못해 팬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정신머리 없어 보였겠는가?

    그러라고 넣은 설정이지만.’

    나는 기숙사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발할라 본관 건물에 한숨이 나왔다.

    문득 퀘스트 생각이 난 탓이었다.

    학생회 가입이라…….’

    학생회에는 클라이드만 있는 게 아니라 부학생회장인 데미안도 있었다골치가 아팠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급한 불이란 일리야 교수가 빌려준 마법서를 완독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에 시선을 처박은 채 걷고 있을 때였다.

    !

    정면을 보지 않고 걸으면 사고가 나기 마련.

    나는 돌벽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니돌벽이라고 생각했다.

    .”

    .”

    내가 부딪친 건 데미안이었다.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이 전개를 좋아합니다.]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이 전개를 싫어합니다.]

    얘랑 또 부딪쳤네.’

    어제는 데미안이 나한테오늘은 내가 데미안한테 부딪쳤으니 비긴 셈인가.

    나는 재빠르게 데미안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어제는 분명 검은 하트가 하나였잖아어째서 고작 하루 만에 두 개로 늘었는데?!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이 전개를 좋아합니다.]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이 전개를 싫어합니다.]

    어제 도망친 게 실수였나?’

    일은 이미 벌어졌다수습할 방법은… 모르겠다.

    일단 부딪친 거나 사과하자.

    검은 하트가 세 개로 늘기 전에.

    미안책을 보느라 앞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데미안 역시 아침부터 날 보게 될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금세 미안한 기색이 담긴 얼굴로 고개 저었다.

    아냐내가 주의했어야 했는데.”

    후방에서 들이받은 사람을 무슨 수로?

    얘는 가능하겠구나.’

    데미안은 그냥 마법사가 아니다.

    무려 암살 길드 소속 마법사였다.

    본업은 학생부업은 암살자인 부학생회장이라니.

    게임으로 만들 때는 이 이중성이 데미안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했는데 개뿔사망 포인트였다.

    어째서 <신의 유희>에는 평범한 남주가 한 명도 없는 거지?’

    이렇게 빙의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반적인 남자 주인공들을 만들었을 텐데.

    행복한 가정에서 듬뿍 사랑받아서 성격이 말랑말랑한 인물들로 말이다젠장.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뒤에서 멋대로 박은 건데다친 곳은 없어?”

    난 괜찮은데 네 이마가 빨개테레제.”

    데미안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을 뻗어왔다.

    움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

    …….”

    우리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게 다 오즈월드 그 악마 새끼 때문이야.’

    나는 불시에 떠오른 어제의 불쾌한 기억을 억지로 무시했다.

    하지만 미소까지 짓는 건 어려웠기에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그럼 안녕.”

    평민과 귀족은 사용하는 기숙사는 달랐으나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에 본관으로 향하는 길은 같이 사용했다.

    따라서 내가 인사를 건넸다고는 해도 결국 우리는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야 했다.

    하지만 더 할 이야기도 없고난 책도 읽어야 하니까.’

    내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자 데미안도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등굣길은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적막을 다채롭게 채웠다.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롭다.

    흐아암.”

    졸음이 한가득 쏟아질 만큼.

    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낭패감을 느꼈다.

    졸려서 집중이 안 돼.’

    그래도 한 시간은 잔 것 같은데 책을 읽어서인지 지독한 졸음이 시야를 자꾸 흐렸다.

    나는 밤을 지새우는 게 익숙했다.

    본디 개발자와 밤샘은 뗄 수 없는 관계인 법이었다.

    다만 에너지 드링크라는 고카페인 음료를 동반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런 카페인 불모지에서 벼락치기 과제는 좀 가혹하달까…….

    아침에 커피라도 마시는 건데.’

    현대인의 포션인 아이스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커피 마실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 말고도 오전에 카페를 가는 학생들도 있을 테고이 세계관에서는 현대처럼 대단히 빠른 속도로 커피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카페는 교수들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장소라는 점이었다.

    학교 카페에서 일리야 교수를 만나는 이벤트가 종종 발생하지.’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는데 일리야 교수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아니그냥 교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 중얼거림을 들은 데미안이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커피내가 내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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