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필요한 거 있어?”
혹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나 싶어서 얼른 다가가니 클라이드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 쳤다.
“아!”
깜짝 놀란 내가 비명 지르며 이마를 감싸자 클라이드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이마가 함몰된 줄 알겠다?”
나는 작게 툴툴거렸다.
“이건 정신적인 통증이야.”
“헛소리하는 걸 보니 좀 낫네. 넌 정신 나간 소릴 하는 게 어울려.”
“뭔 소리야…….”
“방금까지 어울리지도 않는 표정 짓고 있었잖아.”
“……무슨 표정?”
“죄책감 느끼는 표정.”
‘내가 그랬나?’
분명 안심시키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환자를 앞에 두고 즐거워하는 건 이상하잖아.”
클라이드는 고개를 내젓더니 화제를 돌렸다.
“새로운 꿈을 준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뭐였어?”
“어?”
“이번 꿈은 뭐냐고.”
“아, 그거? 그냥 뭐…….”
나는 괜히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러자 클라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꿈 카드를 달라는 뜻이었다.
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카드를 주지 않자 그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하아. 미치겠네.’
나는 울상으로 카드를 건넸다.
꿈 카드를 읽은 클라이드가 한쪽 눈썹을 휙 치올렸다.
“흠….”
그러더니 곧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꿈에 민망함을 넘어 수치스러웠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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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
‘제발 이 끔찍한 던전에서 나가고 싶어.’
만일 다음 꿈이 있다면 뭐가 될지 두려울 정도였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전날의 악몽 같던 기억이 떠올라 몸이 움찔했다.
클라이드가 그런 날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들어와라.”
방을 들어온 사람은 영주성 시녀였다.
그녀는 쟁반을 들고 다가오며 물었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협탁에 내려놓은 식사는 1인분이었다.
“몸은 괜찮다만 왜 식사가 한 사람분이지?”
시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영주님께 오늘 일을 말씀드렸더니 잠시 작업을 중단하시고 아가씨를 정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델브가 나를 초대했다는 말에 클라이드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신음을 흘렸다.
“큭…. 영주님이 왜 테레제를 부르시지?”
“영주님께서 테레제 아가씨의 이름을 들으시더니 어린 시절에 다니던 학교에서 사귄 친구분인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사실인가요?”
클라이드가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녀의 말에 오류가 많은 탓이었다.
나는 클라이드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사실이에요.”
그러자 시녀가 곧장 예를 갖추었다.
“영주님과 같은 학교에 다니셨다면 아가씨께서도 귀한 집안의 자제이실 터. 부디 제게 하대해주십시오.”
“그러지.”
시녀는 내게 더 깊은 호감을 느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께서 상냥하시고 친절하셔서 제가 그간 무례한 언행을 저지른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클라이드는 상대가 시녀이기에 내내 하대를 썼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나리오에서 리비가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을 때 시녀가 더욱 협조적으로 나오지.’
“영주님께서 기다리시겠군. 어서 가도록 하지.”
“제가 다이닝 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나와주십시오.”
시녀가 먼저 방을 나가자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클라이드가 물었다.
“혼자서 델브를 보러 가는 건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 이 던전은 즐거운 일을 해야 하는 곳이고 델브는 살인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게다가 내 팔찌는 녹색인걸? 델브 입장에서는 나만큼 탐탁한 주민도 없어.”
클라이드는 이상한 데서 트집을 잡았다.
“인사도 해본 적 없다면서 그를 잘 아는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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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 질투한다 ㅋ]
‘질투라고? 혹시 호감도가 오른 건가? 하긴. 생사를 오가는 날을 보낸 동료인데 당연히 호감도가 올랐겠지.’
[호감도: ♥♥♥♡♡]
‘쳇.’
괜히 설레발쳤다가 기분만 상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시비 걸듯 말했다.
“뭐 그런 걸 물어? 혹시 질투해?”
클라이드는 대번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헛소리할 거면 나가.”
“흥.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갈 생각이었거든?”
나는 성큼성큼 방을 나가 멀리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말했다.
“어서 영주님을 뵈러 가지.”
다이닝 룸은 1층에 있었다.
앞을 지키고 선 장난감 병정이 내가 다가서자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화려한 차림의 델브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어서 와, 테레제! 와,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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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애한테 친한 척이야?]
‘그야 지금 델브의 기억은 본인 입맛에 맞게 죄다 조작되어 있으니까.’
나는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넌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아니다, 더 멋있어졌나?”
델브는 뺨을 붉혔다.
“무, 무슨 그런 말을 해. 너야말로 그대로네. 학교에서 가장 예쁜 애였는데 지금도 우리 영지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겠는걸.”
우리는 하하호호 서로의 얼굴에 금칠해주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호화로웠고 델브는 나를 오랜만에 본 절친한 친구처럼 대했다.
나는 그의 조작된 기억에 맞춰 추억을 이야기했다.
델브는 우리 팀에서 서사를 부여한 캐릭터였으니, 나는 손쉽게 그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즐겁기만 한 대화를 쭉 이어 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델브는 점점 대화에 푹 빠진 표정을 지었다.
중간에는 울컥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델브는 자신이 늘 듣고 싶었던 말만 골라서 하는 내게 엄청난 호감을 느낀 건지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지만, 너는 내 유일하게 날 이해한 사람이야.”
그새 나에 대한 기억에 새로운 설정을 추가한 모양이었다.
“유일은 무슨. 다들 네가 그린 그림을 좋아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을 뿐인데.”
델브의 조작된 기억 속 본인 모습은 천재 예술가였다.
모두가 그의 그림에 열광했고 안목을 칭송했다.
델브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지. 테레제, 네게 어울릴만한 드레스들이 많이 있어. 지금 옷은 네 격에 맞지 않으니 다른 걸로 갈아입는 게 좋겠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저 말은 지금 옷차림이 델브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드레스 룸에는 옷과 장신구가 막 생겨나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던전이 뒤늦게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델브도 나도 이 현상에 대해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드레스를 골랐다.
그는 목이 넓게 파인 스퀘어 넥 드레스를 꺼냈다.
“넌 검은 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오늘 있을 만찬용 드레스로 입으면 되겠어. 어때?”
여기서 좋다는 식의 대답은 금물이었다.
‘6시가 되면 악령이 나타나는 세계에서 만찬? 당연히 함정이지.’
만찬에 참석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하면 [델브의 뮤즈]라는 데드엔딩이 뜨게 된다.
나는 얼른 손사래 쳤다.
“만찬까지 대접받는 건 내게 너무 과분한 일이야. 성에서 머물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드레스는 입어봐. 분명 잘 어울릴 테니까.”
“알겠어.”
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에 보석이 박힌 검은 머리띠를 하고 어깨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으니 마계의 군주 같았다.
델브는 내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보더니 힘없이 입술을 벌렸다.
“내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
“고마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로 아름다워. 널 그리고 싶을 만큼.”
델브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서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어. 그러면 난 행복할 거야.”
‘이건 시나리오에 없는 일인데?’
내가 아부를 너무 잘해버린 탓일까?
만찬을 거절했음에도 델브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지?’
내가 위기를 빠져나갈 적당한 핑계를 찾고 있을 때, 갑자기 드레스 룸 문이 열렸다.
벌컥!
델브의 표정이 순간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누구냐!”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이드였다.
그가 삐딱하게 서서 나와 델브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내를 데리러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