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드가 물었다.
“여기서는 시간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지금 몇 시야?”
“이제 1시 조금 넘었어.”
“젠장. 이 짓거리를 4시간이나 더 해야 하다니.”
“밤이 이렇게 길었나?”
어제도 무섭긴 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클라이드가 짤막하게 한숨지으며 말했다.
“내가 악령에게 강한 건 사실이지만 졸면 그것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져. 그러니까 평소에 하던 그 헛소리들 좀 해봐.”
“난 한 번도 헛소리한 적 없는데.”
“그래. 그런 헛소리를 하라고.”
이게 진짜.
“음……. 밖은 어때?”
“악령이 간간이 보이긴 하는데, 처리 못 할 수준은 아니야. 아, 그렇다고 해도 문은 절대로 열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알겠어?”
“걱정하지 마. 네가 열어달라고 해도 안 열거니까.”
그러자 클라이드의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내가 이 문 부숴버릴 거니까 상관없어.”
“양아치…….”
“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반쯤 녹은 초를 멍하니 응시했다.
하루가 너무 길다.
클라이드가 오기 전까지 과장하나 보태지 않고 일주일은 된 것처럼 시간이 지독하게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얼른 악마를 죽여야 현실로 돌아갈 텐데.”
이건 참 우스운 말이었다.
테레제로 살아가는 게 내 현실이 되다니.
그러다 문득 별거도 아닌 게 궁금해졌다.
“돌아가면 학교 식당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 너는?”
“글쎄.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지금 보고 싶은 건 있군.”
“어떤 거?”
“…….”
클라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지? 설마 악령에 당한 거 아냐?’
불안한 마음이 들어 문짝에 입술을 붙일 듯이 가까이 대고 물었다.
“클라이드? 앞에 있지? 어디 간 거 아니지?”
“있어. 큰소리 내지 마. 머리 울리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이 없어서 놀랐잖아.”
“난 원래 대답하고 싶을 때만 대답해.”
자랑이다.
“지금은 몇 시지?”
“3시.”
나는 말하면서도 조금 놀랐다.
클라이드랑 별로 이야기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흘렀을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랑 있으니까 시간이 잘 가네.”
클라이드가 대답했다.
“그러게.”
우리는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우리 중간고사 시험은 어떻게 됐을까?”
“던전을 나가면 남은 과목은 따로 시험을 보겠지. 그게 교칙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 너한테 멸악 활동 점수 때문에 부탁하려던 거 취소할게.”
“하. 내가 결혼해준 건 또 멍청한 머리가 알아서 기억을 지웠나?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결혼도 했어? 언제?”
내가 안면몰수하자 클라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랬는데.”
“야. 그거 우리 가문 조롱할 때 쓰는 말이잖아, 흰 대가리야. 갑자기 선 넘네?”
“내 머리는 흰색이 아니라 은색이야. 이젠 색깔도 모르는 건가?”
“흰색이나 은색이나 그게 그거지. 넌 늙어도 티가 안 나겠네. 와, 부러워라.”
“넌 이 문이 영원히 안 열릴 것 같지? 그래서 자꾸 까불지?”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한바탕 퍼붓다가 그마저도 점점 목이 잠겨 대답이 느릿해져 갈 무렵이었다.
“지금은 몇 시지?”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4시 30분.”
30분만 지나면 악령이 사라지고 클라이드가 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침대가 하나뿐인데 어떡하지?’
모르겠다. 피곤하니까 일단 가운데에 쿠션이라도 깔아놔야지.
싫은 사람은 바닥에서 자면 된다.
그때 클라이드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 조금만 더 버티면…….”
아무래도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이제 악령은 어때? 좀 괜찮아?”
“…응.”
“병정들이랑 대기자를 잡으러 갔을 때 어땠어? 습격하려고 단단히 벼른 것 같던데 위험하지 않았어?”
“…….”
“어디 다친 덴 없지?”
“…….”
“또 씹어?”
“…….”
그는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내 말을 무참히 씹기는 했지만, 지금의 침묵은 느낌이 이상했다.
꼭, 대답할 수가 없어서 못 하는 것 같은 그런 침묵처럼 느껴졌다.
“너 잠든 거야?”
클라이드는 이런 순간에 잠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갔어? 설마 악령한테 당한……, 그냥 나 놀리는 거지?”
“…….”
“클라이드? 대답 안 하면 나 조금 무서운데.”
“…….”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도 4시 55분이었다.
“클라이드. 대답 좀 해 봐. 클라이드!”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싶었다.
“앞에 있지? 자는 거야?”
지금 문을 열면 안 되는 걸 안다.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면 어떡하지?
쿵쿵쿵!
“클라이드!”
“……시끄러워.”
아.
“놀랐잖아.”
힘이 쭉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윽…….”
문 너머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이 들려온 탓이었다.
“너 무슨 일 있지.”
띠링!
[성좌 ‘질서선’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5시야.]
벌컥!
문을 열자 바닥에 쓰러져 누운 클라이드가 보였다.
복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클라이드!”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의사를 불러올게!”
제발 죽지 마, 제발.
딱! 딱! 딱! 딱!
갑자기 들리는 귀에 익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외다리 병정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꿈을 달성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께 새로운 꿈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클라이드가 다쳤어요. 의사를 불러주세요!”
“여기 카드를 받아주십시오.”
“제발! 이깟 카드 따위가 지금 뭐라고-”
그러자 내 목에 칼이 겨누어졌다.
“꿈을 확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처형하겠습니다.”
나는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
꿈 따위 빨리 확인해버리고 서둘러 의사를 불러야 했으니까.
다급한 마음으로 카드를 꺼낸 순간,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테레제의 꿈: 클라이드와 매일 한 침대에서 잠들기」
아등바등하는 나를 조롱하듯 철없이 달콤하고 한없이 어리석은 꿈이 적혀있었다.
정말이지 역겨운 상황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분노로 전신을 덜덜 떠는 내게 외다리 병정이 말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제발 그 입 좀 닥쳐!’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겠어!
그때 소란을 들은 건지 시녀들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나는 도와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의사를 불러주세요! 빨리!”
* * *
클라이드의 성유물인 유리 방울은 던전의 규칙으로 인해 아공간에 갇힌 상태라 평소에 비하면 회복력이 훨씬 더뎠다.
그렇다고 해도 포션도 없이 자체적으로 피를 멎게 하고 끊어진 혈관과 근육을 잇는 건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유물을 갖고 태어난 아이라는 설정을 부여한 것에 깊이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악령에게 당해 다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악령보다 성내에 돌아다니는 악령이 훨씬 강력하니까.
다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성유물은 클라이드의 마기를 억누름과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클라이드가 계속해서 피를 흘리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제 노크 소리가 끊겼을 때 다른 악령들의 비명도 들렸었지.’
이후로 클라이드는 내내 나처럼 문에 기대어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에도 계속 악령이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성유물의 힘으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거야.’
그러느라 본인의 상처를 회복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거였다.
의식을 회복한 클라이드가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대기자를 잡아들이다가 좀 다친 거니까.”
“거짓말.”
복부를 붕대로 둘둘 감기 전, 상처 주변이 검게 타들어 가 있는 걸 보았다.
“악령에 당하면 상처 주변이 검게 침식돼.”
“……별걸 다 아는군.”
그래도 출혈로 의식을 잃었던 사람치고는 상태가 금방 호전되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백한 안색으로 가만히 누워있는 클라이드를 보았다.
클라이드는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딴 거 이틀이면 나아.”
그의 말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틀이면 이 정도 상처는 나을 테니까.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왜 변명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더니 돌연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