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6/277)

  

어서 가요식이 시작되겠어요!”

나는 서둘러 성당으로 향하는 도중 시녀에게 물었다.

혹시 영주님의 새로운 작품은 언제쯤 완성될까요?”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시녀는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영주님의 새로운 작품이 궁금하신가요?”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완성 시기가 궁금한 거지만 사실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님처럼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도 없잖아요그런 분의 작품이라면 틀림없이 감동적일 테니꼭 감상하고 싶어서요.”

이는 델브의 입맛에 꼭 맞춘 대답이었으므로 당연히 영주성 시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시녀는 경계심을 거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다 기쁜 말이네요아가씨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테레제예요.”

기품이 느껴지는 이름이네요영주님의 작품이 완성되는 날 전시회가 열릴 테니그때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결혼식이 열릴 대성당 앞에 다다랐다.

시녀가 꺅하고 짧게 탄성을 내지르며 앞을 가리켰다.

저기 신랑님이 보이네요!”

그들은 클라이드를 발견하자마자 자지러지듯 좋아했다.

그들 반응이 클예부를 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클라이드의 외모는 맹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탄성을 자아낼 정도지만…….

클라이드는 턱시도 차림으로 성당 앞에서 결벽이 있는 사람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다.

저렇게 똑바로 서 있는데도 껄렁해 보이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이래서 내면의 성품이 외면에도 드러난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가까이 다다를수록 나도 모르게 입술이 헤벌어질 정도로 눈부신 외모가 빛났으니까.

클라이드는 눈을 찌를 듯이 길게 기른 앞머리를 뒤로 말끔하게 넘겨 평소보다 훨씬 강인하고 차가우며 어른스럽게 보였다.

솔직히 껍데기는 완벽하다니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얼굴에 속지 말자저건 악마야.’

비유적인 의미로든생물학적인 의미로든.

클라이드는 기척을 느끼고 나를 돌아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늦었잖아.”

미안준비가 조금 오래 걸려서.”

이 불편한 드레스 차림으로 여기까지 얼마나 부지런히 걸어왔는데 보자마자 타박이라니.

정말 서러워 살 수가 없었다.

더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느라 베일 안에 찬 열기를 빼기 위해 앞을 걷어 올렸다.

…….”

갑자기 클라이드가 말이 없어졌다.

클라이드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묘하게 충격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의아해졌다.

클라이드?”

그래서 이름을 부르니 클라이드는 뒤늦게 정신 차린 듯 사납게 읊조렸다.

베일 내려.”

왜 또 저래참 비위 맞추기 어려운 놈이었다.

나는 속으로 궁싯거리며 베일을 내렸다.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 귀여워]

저 성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콩깍지가 씐 듯했다.

시녀들이 음흉하게 웃었다.

오늘 신부님이 참 아름다우시죠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셨나요?”

지상에 강림한 천사처럼 보이셨어요빛이 나서 눈이 멀 것 같으셨나요?”

제발 그만해…….

시녀들은 상당히 주책바가지였다.

시끄럽군.”

클라이드는 욕만 하지 않았을 뿐살벌한 위압감으로 시녀들의 주책을 불식시켰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팔을 내밀었다.

들어가야지.”

으응.”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도 뚝딱뚝딱 어색하게 팔짱을 낀 자세로 문 앞에 섰다.

이윽고 성당 문이 활짝 열렸다.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다들 생업을 내팽개치고 몰려든 건지 앉을 자리가 없어 틈마다 빼곡하게 서 있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흥에 겨워 소리쳤다.

어이신랑 신부가 왔어어서 연주를 시작해!”

♬♪♬♪♬♪♬♪!

화려한 파티에나 어울릴 느낌으로 편곡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신랑 신부입장!”

사회자의 외침에 우리는 웨딩 로드를 걸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결혼식이 존재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클라이드의 말처럼 결혼식은 격식과 엄숙함이 없었다.

전혀 귀족적이지 않은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난 괜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지도 않고 긴장감이 없어서 좋은데장소도 무척 예쁘고.’

베일에 가려져 시야가 아주 또렷하진 않았지만그래도 이 성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델브의 심상이 반영된 세계관이라 그런지 모든 게 예술 작품처럼 섬세하고 화려했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어.”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클라이드가 말했다.

네 결혼식은 황실에 비견될 정도로 이루어질 텐데 괜한 엄살이군.”

스콰이어 공녀의 결혼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식을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평생 결혼할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까.”

왜 그런 생각을 했지약혼자도 있었잖아.”

이에 대한 대답은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곳에서 시끌벅적한 환호와 축하를 받으며 축제 같은 결혼식을 하다 보니 마음이 들떠서일까?

꺼내기 싫은 내 나약하고 초라한 부분을 입에 담을 용기가 생겼다.

날 사랑해줄 사람이 생길 거라고 믿은 적 없었거든.”

…….”

그 믿음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었지만굳이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대신웨딩 로드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이 말은 했다.

이게 진짜 결혼은 아니지만 그래서 재밌는 추억이 될 거 같아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어?”

클라이드는 내게 무언가 물으려고 했으나 어느덧 신관 앞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주례를 도맡은 신관이 몹시 들뜬 주민들을 진정시켰다.

제발 정숙하세요다들성당이잖습니까.”

그러자 간신히 나팔과 휘파람 소리가 멎었다.

생각해보니 재밌네악마 던전에 성당과 신관을 둔 결혼식이라니.’

이런 의외성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했고덕분에 주례사의 지루한 설교들을 적당히 무시하며 가만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이제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반지도 준비되어 있나?’

놀랍게도 도우미가 벨벳 쿠션에 받친 반지를 내왔다.

귀족의 결혼식에 쓰일 만큼 화려한 예물은 아니었지만중앙에 조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여운 반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인 언약식을 진행할 차례였다.

신관이 물었다.

신랑은 신부를 평생 사랑하고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눈썹을 일그러뜨렸던 클라이드가 다행히도 늦지 않게 대답했다.

신부는 신랑을 평생 사랑하고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신랑은 신부의 베일을 걷고 맹세의 키스로 영원한 사랑을 신께 약속하십시오.”

……뭐라고요?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키스는 분명 새삼스러운 의식이 아니었다.

한데도 나와 클라이드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묘한 기류를 읽은 것일까?

사람들은 점차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랑이 다른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필요에 의한 키스에 불과하니 이미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싫어하는 것이 사랑인 만큼 그에 관련한 모든 행위를 거부하는 남자 주인공인 클라이드였다.

끄응그냥 눈 질끈 감고 내가 해버릴까?’

그때였다.

사락.

클라이드가 베일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 숙였다.

……뭐지?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쳐다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키스할 건데 눈 좀 감지?”

믿기 어려운 말에 내가 눈을 더 크게 뜨자 클라이드가 커다란 손으로 시야를 가려버렸다.

한순간에 어둠이 앞을 가려 전신의 감각이 예민해진 순간.

말캉한 살덩이가 서툰 솜씨로 내 입술을 겹쳐 물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

와아아아아!”

행복하세요!”

휘익-! 잘 어울린다!”

콰아아아앙!!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우리의 입맞춤은 끝났다.

꺄아악!”

뭐야무슨 일이야?!”

곳곳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클라이드는 아무런 무력이 없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소음이 터져 나온 곳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게 무슨 사태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대기자들이 쳐들어온 거야.’

반항하는 자는 다 죽여라팔찌를 빼앗아!”

아니나 다를까무장한 이들이 습격해 사람들의 팔찌를 빼앗고 있었다.

습격이다대기자들이 우리 팔찌를 빼앗으러 왔다!”

성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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