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나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성적을 받아냈다.
<마법의 생명체>: A
<연금술>: A-
<변환 마법>: A-
<마법의 기원과 역사>: A-
남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마침내 전공 성적이 떴다.
<속성 마법>: B-
“이럴 수가!”
<속성 마법> 강의의 평균 성적이 C라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는 분명 엄청난 발전이고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나는 최소 B+가 뜨길 원했다.
그래야 멸악 활동 점수를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학생회 임무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녀석들이 몽땅 채간 상태였다.
갑자기 난데없는 사건이라도 터져주지 않는 이상 멸악 활동 점수를 C+에서 최소 A-로 끌어올릴 방법은 없었다.
아니지. 정말로 없나?
상황이 다급하니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미친 생각까지 들었다.
“클라이드한테 개인 의뢰를 받을 수 없는지 물어보기라도 할까?”
[‘클라이드’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BJ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일리야’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BJ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흐음. 슬슬 파벌이 나뉘는 모양이네.’
역하렘 게임 특성상 취향에 따라서 지지하는 남자 주인공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만 안타깝기는 했다.
‘<신의 유희>의 진정한 콘텐츠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아니지, 지금 이걸 신경 쓸 때가 아냐.
뭐가 됐든, 현재로서는 내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나는 야멸찬 대접을 각오하고 학생회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학생회실에 없었다.
“도서관으로 간 건가?”
혹시나 해서 클라이드가 자주 출몰하도록 설정한 도서관으로 가보았더니 정말로 그가 있었다.
윌로우 가문임을 상징하는 화려한 문장이 수 놓인 하얀 로브를 걸친 또래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번 행사에도 빠질 생각이신가요, 형님?”
“대귀족 가문의 화합을 위한 자리입니다. 윌로우 가문의 후계자라면 마땅히 참석하셔야지요.”
“형님께서 아직 약혼자도 없으시니, 가문 어른들과 가신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녀석들은 정중한 목소리로 귀족답게 질문했으나 기저에 깔린 음습한 질투심과 경계를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독서 중인 클라이드를 열등감 어린 시선으로 주시했다.
“형님. 부디 가문을 생각해주십시오. 이번에도 불참하신다면 다른 가문들이…”
그러자 독서 중이던 클라이드가 시선도 들지 않고 말했다.
“너희는 도서관에서 정숙해야 하는 것도 모르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저희 가문이잖습니까?”
그런 말을 당당히 내뱉을 거면 도서관 문이라도 닫고 하든가.
하긴. 그럴 만한 정신머리였다면 저렇게 가문의 로브를 입고 뭉쳐 다니며 으스대는 짓부터 하지 않았을 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클라이드를 제외한 녀석들이 동시에 위협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스콰이어 공녀님이셨군요.”
시선을 받는 것도 싫지만, 더 싫은 건 그들의 반응이었다.
녀석들은 나를 보더니 비웃거나 경멸하거나 감탄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때 외모에 상당히 신경 쓰는 티가 역력한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비웃는 표정을 빗겨 간 미소로 내게 다가왔다.
“아. 저는 헤리스 가문의 앤서니라고 합니다. 윌로우 공작님은 제 조부님이시죠.”
앤서니 헤리스.
클라이드를 제외한, 윌로우 가문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헤리스 백작의 장남이었다.
나는 그를 본 척도 않고 클라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클라이드,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앤서니는 무시당한 게 불쾌한 건지 단번에 표정이 뒤틀렸다.
“공녀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게 하십시오. 형님께서는 현재 가문의 일 때문에 중요한 대화 중이시거든요.”
앤서니는 점잖고 신사적인 듯 자신의 말을 포장했으나 스콰이어 공녀 주제에 감히 윌로우의 일에 끼어들지 말란 뜻이었다.
나는 성가신 표정으로 앤서니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감히 내게 인사를 건네는 거지?”
“…예?”
“어째서 헤리스 백작가의 장남 따위가 스콰이어 공녀인 내 허락 없이 먼저 인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낮은 신분의 귀족은 안면을 트지 않은 이상 고위 귀족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할 수 없다.
이건 상식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다만 제 부친께서 공녀님과 면식이 있고, 연회장에서 직접 뵌 적도 있기에 인사드린 것뿐입니다.”
앤서니는 뱀처럼 혀를 매끄럽게 놀리며 나를 탓했다.
하지만 어쩌라고.
“내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테레제는 안면인식 장애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도통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예외는 있었다.
신분이 높거나 외모가 빼어난 경우가 그랬다.
이는 사교계에도 널리 소문난 사실이었다.
그러니 테레제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은 앤서니의 외모가 형편없고 신분도 낮다는 방증이었다.
내가 앤서니를 모욕하자 윌로우 가문 놈들이 동시에 들고일어났다.
“아무리 공녀라 해도 윌로우의 피가 흐르는 이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무례를 사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정식으로-!”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말했다.
“쉿.”
일동 침묵에 잠겼다.
“…?!”
녀석들은 전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매만졌다.
다들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입을 벙긋거렸으나 쇳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듯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흐음. 개량한 침묵 마법이 발할라 학생을 상대로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궁금했는데 잘 통하네. 너희 마법 등급이 어느 정도야?”
“―! ――!!”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나는 아차, 하고 놀랐다.
“앗, 지금은 대답 못 하지?”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마법 오타쿠 혹은 싸이코패스 그 사이 ㄷㄷ]
침묵 마법은 구조가 매우 간단해서 마력만 잘 풀어낸다면 금방 해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윌로우 놈들은 내 마법을 해금하지 못했다.
“기존의 침묵 마법과 마력 회로 구조는 비슷한데 이것도 못 풀어? 응용력이 전혀 없나 보네.”
쯧쯧. 나는 낮은 지능을 보완하느라 술식을 개량하고 마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했다고.
“너희 1학년이지? 발할라에 입학하면 끝인 줄 알아? 자기 주도 학습이 얼마나 중요한데. 노오력을 하란 말이야, 노오력을!”
띠링!
[성좌 ‘꼰레제’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희한하게 날이 갈수록 더 꼰대가 되어가네…]
내가 한껏 위세 부리고 있을 때, 누구에게도 시선 한 톨 주지 않고 세상을 따돌리던 클라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학년 상대로 이겨놓고 좋냐? 너 하나가 얘들 셋보다 시끄러워.”
“…….”
그는 마법도 부리지 않고 나를 침묵에 잠기게 했다.
클라이드는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 무심한 얼굴이더니 날 보고는 굉장히 심기 불편한 티를 팍팍 내보였다.
끝까지 나를 무시하고 싶었으나 계획에 실패하는 바람에 짜증이 치솟은 듯했다.
……괜히 왔나?
‘나약해지지 말자. 상대는 개복치 같은 너그러움을 가진 클라이드지만 내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야.’
나는 거대한 몸집을 위협적으로 움직이며 다가오는 클라이드를 보면서도 기죽지 않고 말했다.
“저기, 내가 좋은 곳 아는데 같이 갈래?”
띠링!
[성좌 ‘팩트도 폭력이다’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참… 말을 개떡같이 한다]
‘어째서?’
내가 말한 좋은 곳은 교수 전용 도서관이었다.
거기는 조용할 테니까 클라이드는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하.”
클라이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탄식했다.
“이런 멍청한 걸 두고 내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짙은 자괴감이 느껴졌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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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멍청한 게 왕 귀엽다!]
‘저 성좌 차단할 수 없나?’
클라이드는 찌푸린 얼굴로 나더러 꺼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도서관 밖으로 내몰았다.
몰이 당한 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본인도 밖으로 나와 문고리를 쥐었다.
문을 닫을 듯한 자세였다.
‘뭘 하려는 거지?’
클라이드는 문을 닫기 전 제 사촌들을 둘러보았다.
피식.
“그래. 도서관에서는 정숙해야지.”
“?!”
윌로우 놈들은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채고 달려왔으나 클라이드가 먼저 문을 닫았다.
“잠금.”
철컥!
교수 정도의 마법사가 오지 않는 한 이 문은 절대 열리지 않으리라.
‘무서운 놈.’
클라이드는 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나는 서둘러 클라이드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당혹스럽게 말했다.
“나 아직 용건 말하기 전인데…!”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말하든가.”
재수 없는 놈. 얼굴, 능력, 집안, 몸매만 믿고 사람을 무시해?
애석하지만 아쉬운 건 늘 나였으므로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멸악 활동 점수가 모자라서 그러는데 혹시 개인 의뢰를 받을 수 있을까?”
클라이드는 걸음을 멈추더니 흡사 시비 거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넌 뭘 해줄 건데?”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결혼해줄게]
‘결혼은 무슨…….’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 자식이랑 결혼할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