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9/277)

  

* * *

주근깨가 인상적인 남학생이 압도적인 크기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클라이드 작품전이 진행되고 있는 로비.

남학생은 거칠지만 과감하고세련되지 않으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그림들을 진지하게 감상했다.

뺨에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건 여유롭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뭔 소리야너 클예부였어?”

주근깨 소년델브가 고개 저었다.

학교에서 이렇게 정성을 다한 그림들을 보니까 좋다는 뜻이야.”

델브의 오랜 친구인 주드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학생회장 그림 보고 좋아하는 거 보니 클예부 맞네……됐고 빨리 도서관 가자요즘 자리 잡기 엄청 어려워.”

델브는 잠깐의 여유와 행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주드를 따라갔다.

벌써 자리가 다 찼잖아!”

주드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하아돌겠네이번에 성적 떨어지면 큰일인데둘째 형이 황실 마법사 시험에 합격해서 나도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적이 떨어지면 곤란한 건 델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저히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법은 재미없었으니까.

델브의 마법적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부모가 돈을 쏟아부어 온갖 선생을 붙인 덕분에 간신히 발할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그 이상의 대단한 능력 같은 건 제게 없었다.

……마법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꼭 마법사가 될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시험 기간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주드는 델브의 나약한 소리에 인내심이 뚝 끊기는 걸 느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 학교에 지원하지 말았어야지여기 정원제라고정말 간절하게 발할라를 들어오고 싶었던 녀석이 그딴 말을 들으면 기분 좋겠냐?”

델브는 마법 공부를 싫어하지만 대신 예술을 좋아한다.

뭔가를 만드는 것도 곧잘 해서 주위의 감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델브는 귀족이고 마법사이며 가문의 후계자였다.

예술은 평민이나물려받을 가문이 없는 이들이 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꿈속에 있는 듯한 델브가 못마땅하지만 순수한 친구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주드는 이번만큼은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우리가 4학년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야내년에 졸업하면 네 약혼녀와 결혼하고본격적으로 가문 후계자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나 해?”

…….”

이젠 제발 현실을 좀 봐언제까지 네 의무와 책임을 회피할래?”

주드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돌았다.

오늘은 각자 공부하자널 보면 스트레스받아.”

주드…….”

델브의 망설임 가득한 부름에도 주드는 매몰차게 자리를 떠났다.

내가 이상한 건가?”

자신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귀족다운 것도마법사다운 것도 전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해내는 일인데 그에게는 너무나 힘겨웠다.

어쩌면 내게 잘 맞는 세상은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 세계에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델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 멍하니 서 있는데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불러왔다.

순간 눈물이 울컥 차오를 만큼.

델브는 약간 빨개진 눈으로 뒤돌았다.

외모도성격도능력도 전부 빼어나서 평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동급생이지만 천치 같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남자데미안이었다.

데미안.”

도서관에서 오는 길이야?”

델브는 머쓱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리가 꽉 찼더라.”

요즘 워낙 자리 경쟁이 치열하니까나도 실패하고 오는 길이야.”

데미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실패를 알리며 재미있는 공통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털털하고 수더분한 태도였다.

놀랍게도 그게 꽤 위로되었다.

심지어 데미안은 이런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2층 맨 끝 도서관은 아무도 없을 거야펠릭스 교수님이 알려주셨거든같이 갈래?”

델브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2층 교수 전용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란히 걸으니 자신과 데미안의 차이가 비참할 정도로 실감 됐다.

데미안은 귀족보다 더 귀족 같았다.

내가 아니라 데미안이 우리 가문의 장남이었다면 부모님도 무척 행복했을 텐데.’

델브는 문득 궁금해졌다.

데미안 너는 마법을 좋아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좋아하겠지이 애는 학년 차석을 놓쳐본 적 없는 천재니까.

한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글쎄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델브는 당황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다른 질문을 내뱉었다.

그럼 어떤 걸 좋아해?”

… 운동요리도 좋아해장난감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그건 정말 예상 밖의 말이었다.

장난감을 만든다고?”

너도 관심 있어?”

나도 만드는 거 좋아해그림도 좋아하고조각도 좋아하고!”

델브는 평소답지 않게 흥분했다가 부끄러워졌는지 빨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피식 웃더니 주머니를 뒤져 손바닥 절반 크기의 장난감 병정을 꺼냈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잘 만들었잖아당장 팔아도 될 정도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하네 말대로 졸업하고 취업 못 하면 장난감을 만들어서 파는 것도 재밌겠는데장난감 장인이 되는 거지.”

멋지다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델브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난 할 줄 아는 게 없어그나마 잘하고 좋아하는 건 미술인데 그건 귀족이 직업으로 삼을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하고 싶어.

연둣빛 하늘과 파란 잎사귀눈으로 본 적 없는 천사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예술을 무엇보다 사랑해.

그 이외에는 관심 없어.

현실은 날 힘들게만 해.

그러니까,

현실 같은 건 아예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델브의 눈동자가 한순간 음습하게 빛났다.

검고 끈적한 상념에 잠겨 들어갈 때쯤데미안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난 귀족이 아니니까 이런 말이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어쨌든 중요한 건 너 자신 아닐까?”

나 자신?”

사람들은 마치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떠들곤 하지하지만 정말 정답이 있었다면 수많은 역사책에서 이미 증명되었을 테고 우리는 전부 같은 삶을 살았을 거야하지만 아니잖아?”

맞아나도 그렇게 생각해.”

난 때때로 내가 시계탑의 톱니바퀴 같다고 생각해누군가가 원하는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말이야.”

델브는 소름 끼치도록 공감했다.

가문을 움직이기 위한 톱니바퀴자신은 톱니바퀴였다.

데미안너도 그런 걸 느낄 줄은 몰랐어.”

하하난 평민이잖아귀족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게 일상이니까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데미안이 지은 미소는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오싹한 긴장감이 느껴지면서도눈이 부시게 결연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어설령 그게 나를 망가뜨리더라도.”

!”

델브널 망가뜨릴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너 자신밖에 없어그렇게 생각하면 널 구속하는 현실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거야.”

처음으로 이해받았다.

처음으로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고어쩌면 이 세상이 이상한 거라고 공감받았다.

가슴이 벅찼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려서당장 조각칼이든 붓이든 쥐고 이 감정을느낌을 쏟아내고 싶었다.

캄캄하던 현실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제게 쏟아진 기분이었다.

이런연구실을 가봤어야 했는데 깜빡했네델브미안하지만 공부는 다음에 같이 하자.”

으응.”

델브가 아쉬워하자 데미안이 난처한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 병정을 건넸다.

대신이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이건 내 응원의 선물이야.”

고마워데미안.”

그럼 나중에 보자.”

델브는 매우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으로는 아주아주 소중하게 장난감을 쥔 채.

반짝!

찰나의 순간장난감 병정의 두 눈이 붉게 번뜩였다가 도로 까맣게 물들었다.

* * *

말도 안 돼믿을 수가 없어!!”

사교댄스 교수님은 내 신들린 춤사위에 찬사와 경악을 반복했다.

교수 경력을 걸고 춤의 신이 축복을 내린 것처럼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춤 선은 본 적 없습니다대체 얼마나 연습한 건가요테레제 학생?!”

교수님께서 상상하시는 그 이상일 겁니다.”

상상 그 이상으로 아무런 연습도 하지 않았다.

아아… 이건 단지 연습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천부적인 재능만이 이런 춤을 만들어내니까요내가 천재를 가르치고 있었다니!”

전부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이렇게 겸손할 수가이런 인재가 그동안 실력을 감춘 채 마법 학교에 처박혀 있단 사실이 가장 믿기지 않네요사교계를 휩쓸고 다녀도 모자랄 판국에!”

나는 한껏 겸양한 자세로 있었으나 죽을 만큼 창피해서 빨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수님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성적을 내렸다.

<사교댄스>: A+

첫 시험부터 결과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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