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장 매력적인 학생.
<신의 유희>에서 꽤 유의미한 투표 시스템으로, 매력과 명성 수치에 따라 매월 평가가 달라졌다.
최근에 마수를 정화한 일로 단번에 유명세를 얻은 것 때문에 1위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니의 주장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뭐, 당연한 투표 결과였죠. 선배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황제 폐하께서 최초로 관심을 보인 여자잖아요?”
“쿨럭-! 쿨럭, 쿨럭!”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설마 학교에 그런 헛소문이 돌고 있는 거야?”
“어… 모르셨어요? 그럼 학생회장님이 결국 선배한테 반해서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기로 했다는 소문도 모르세요?”
…잠깐만, 리비 친구들?
비밀로 해준다면서. 아무것도 못 봤다면서!
심지어 그거 오해라니까!?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레이니는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골치 아픈 대화 화제에서 더 골치 아픈 화제로 바꾸었다.
“선배, 공부는 잘돼 가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멸악 활동 점수랑 사교댄스만 어떻게 하면 총점 A-가 영 불가능한 성적은 아닌데.”
사교댄스는 [중급 댄싱] 스킬 덕분에 최소 B-는 받을 자신이 있었다.
실력이 엇비슷한 녀석들의 성적이 딱 그 정도였거든.
‘하지만 총점 A-가 필요한 상황에서 B-가 확정적으로 뜨는 과목이 있다는 건 리스크가 커.’
그때였다.
띠링!
[상점에 입고된 상품이 있습니다.]
이 타이밍에 상품이 입고됐다고? 뭔가 께름칙한데.
‘상점.’
▼
[상점]
▹소원권 [1,000,000,000코인]
: 어떤 소원이든 1회 들어준다.
▹중급 댄싱→댄싱 머신 업그레이드 [100,000코인]
: 전설의 무희가 될 수 있다.
▲
하다 하다 업그레이드가 나오는구나.
‘진짜 끈질기네.’
띠링!
[성좌 ‘기적의 수학자’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원래 댄싱 머신은 150,000코인이었고 중급 댄싱 39,800코인이었죠. 100,000코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게 10,200코인 이득입니다.]
애초에 [댄싱 머신]이라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댄싱 머신]을 사면 사교댄스 점수는 A+ 확정이잖아.’
스킬 덕분에 공부 없이 성적을 거저 올릴 수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나?
게다가 스킬 가격도 더 저렴해졌다.
그러면 사는 게 무조건 이득이지.
‘[댄싱 머신] 구매.’
[스킬 ‘중급 댄싱’이 ‘댄싱 머신’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방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 사교댄스 성적은 확보했어. 남은 건 멸악 활동 점수야.”
“…저는 한 번씩 선배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레이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멸악 활동 점수가 얼마나 필요하길래 그래?”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 판하고 온 건지 윗단추를 풀어헤친 흰 셔츠만 달랑 걸친 데미안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니는 낯가리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가 레이니 로즈구나? 만나서 반가워.”
데미안은 붙임성 좋게 웃으며 인사하더니 내 옆의 빈 의자 등받이를 쥐었다.
“여기 앉아도 돼?”
“응.”
나는 직원을 호출해 데미안이 먹을 시원한 차와 맛과 향이 강하지 않은 간식거리를 주문했다.
“이건 내가 재단 이사로서 사는 거니까 얼마든지 먹어.”
그러자 데미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애교스럽게 말했다.
“하하! 네, 이사님. 아, 그러면 저도 레이니 로즈 후배님처럼 종종 이사님이랑 같이 점심 먹어도 돼요?”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돼.]
“…그럼 다음에 같이 점심 먹자.”
식사에 대해 말하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참, 다음 달에 새로 오픈하는 식당이랑 카페는 우리 재단 소속 학생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따로 안내문을 보낼 테니까 확인해줘.”
“아, 지금 내부 인테리어 중인 그 가게들 말하는 거지?”
“맞아.”
내가 관리하게 될 새로운 식당과 카페는 5월 초 오픈 예정이었다.
‘어차피 경영은 다른 전문가가 다 하겠지만.’
한데도 최종 서류 승인이라든가 관리 감독 등 은근히 할 일이 있었다.
‘팬지 마을로 보낸 기사단 활동 보고서도 매일 서류로 받고 있고.’
그러고 보니 어찌 된 일인지 팬지 마을에 마수 습격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투베로사 마을에서 늑대들을 정화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데미안이 삼천포로 빠진 주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그래서 멸악 활동 점수가 어떤데?”
멸악(滅惡) 활동.
실습 활동 내지 봉사 활동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학생회 활동도 멸악 활동 점수에 들어가지.’
겨우 두 번 임무에 나갔지만 내 활약이 크게 인정되어 멸악 활동 점수를 무려 C+까지 확보했다.
물론 평균 멸악 활동 점수가 B+임을 고려했을 때, 여전히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였지만.
나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C+에서 A-까지 올릴 수 있을 만큼.”
데미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려면 학생회 임무를 최소 다섯 번은 수행해야 할 텐데, 요즘 경쟁이 치열해서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
에휴. 마음이 심란해져 생크림이 올라간 수플레를 한입 크게 퍼먹었다.
“여기 묻었다.”
데미안이 손을 뻗어 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주었다.
“앞으로는 그냥 말로 해줘.”
“왜?”
넌 주변의 데미사 회원들이 날 죽일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 않니?
“너무 친근하게 보이잖아.”
데미안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반응했다.
“난 너랑 제일 친한데?”
그러더니 엄지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기까지 한다.
까드드득! 챙그랑! 쿵! 와장창!
사방에서 데미사 회원들이 만들어내는 섬뜩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 살기가 느껴지는데.
“이만 공부하러 가봐야겠어.”
나는 데미안에게 붙들리기 전에 재빠른 몸놀림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레이니 성격상 학교 인기인과 함께 있는 상황이 엄청 뻘쭘할 테지만, 원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인맥 쌓는 과정이려니 생각하고 감내하렴, 레이니. 파이팅.’
* * *
나는 열람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인 선물들을 보고 한숨지었다.
“하아.”
몇 번 분실물 찾아가라는 쪽지로 선물들을 무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이러다니.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분실물 보관소임]
여기가 학교 도서관인지 결혼 시장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선물들이 테이블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는 탓에 불편해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안 되겠다. 다른 도서관을 이용해야겠어.’
학교에는 무려 도서관이 다섯 곳이나 있었다.
각 도서관에는 전부 열람 테이블이 있으니 그중 한 곳에서 공부하면 되겠지.
하나 내 계획은 상당히 느슨했고 안일했다.
이 도서관도 만실.
저 도서관도 만실.
1층 메인 도서관을 제외한 다른 도서관들은 규모가 협소하다 보니 훨씬 빠르게 자리가 차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1층 도서관으로 갔더니, 거기도 그새 만실이 돼 있었다.
“대체 헛걸음만 몇 번을 하는 거냐고…….”
온 우주가 나서서 내 공부를 방해하는 거 같달까.
띠링!
[성좌 ‘물음표살인마’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꼭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하나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지능이 두 배 빨리 오르거든요.”
[성좌들이 BJ의 집착적인 행동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복도를 터덜터덜 힘없이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 펠릭스 교수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 우리 과 다크호스! 점심은 먹었니?”
“네. 먹었습니다. 그런데 4학년이 다크호스라는 말을 듣기는 좀 그렇네요…….”
내 기운 없는 반응에 펠릭스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요즘 계속 후후거리면서 위풍당당한 하룻강아지처럼 굴더니 오늘은 왜 시름시름 거리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잘 되는데 자리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요.”
“공부는 아무 데서나 하면 되잖아?”
지능과 사망의 긴밀한 유기성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소리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 표정이 영 좋지 않자 펠릭스 교수는 낄낄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면 교수 전용 도서관을 쓰는 건 어때? 시험 기간에는 종종 학생들도 쓸 수 있게 열어놓거든. 교수랑 마주칠까 봐 아무도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엇, 정말요?!”
“그럼. 방금 데미안에게도 알려주고 오는 길이거든. 내가 좋아하는 학생들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데미안을 피해 식당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뻔뻔스럽게 마주할 만큼 내 얼굴 가죽이 두껍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피하고 내일 가봐야겠다.’
“참고로 교수 전용 도서관은 2층 맨 끝에 있어.”
“감사합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