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277)

  

* * *

쓰레기 같은 놈.”

일리야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급스러운 복색을 한 늙은 남자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그의 두 눈은 우아한 암녹색에서 혈향이 풍기는 듯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남자는 허공에 들린 채 발버둥 쳤다.

커억!”

그 식물은 고스트를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으니 일정 수준 이상 기르지 말라 했거늘.”

잘못커허억!”

이래서 인간은 피곤해이딴 하등한 종족과 계약한 게 실수였다.”

쿠당탕!

남자는 성가신 물건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리석은 것은 죽어 마땅하지.”

번스타인 공작은 전신을 벌벌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죄송합니다아블로 님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아블로.

번스타인 공작은 그를 진명으로 불렀다.

일리야는 번스타인 공작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네 죽은 둘째 아들 노릇을 해주고 부인의 생명도 연장해 주었으며 벌레보다 못한 장남을 번듯하게 바꿔주었지.”

그렇습니다.”

그뿐일까네놈 가문이 저지른 과오를 지워주기까지 했다.”

맞습니다아블로 님께서 그토록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제가 어리석어서 실수하였습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겨웠다.

대천사 시절에도 딱 싫어했던 것이 어리석어서’, ‘실수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등의 말이었다.

우수한 종족인 천족이 어찌 우매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하나 인간은 형편없는 종족이니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뭔가를 잘 해내리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화원에서 처리했어야 할 고스트 마수가 공작저까지 오게 만들다니.

그야말로 인간이나 할법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오늘은 조금 화가 났다.

정말로그답지 않게.

자격도 없는 너와 계약해준 것은 단지 내 유희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인간계에 머무를 일이 있었기에 겸사겸사 계약으로 적당한 지위의 인간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유희라기에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인간들은 멍청했고 성가셨으니까.

한데 요즘은 조금 달랐다.

기다림이 지겨워지는 순간 가차 없이 모든 것을 백일몽처럼 지워버릴 생각이었는데꽤 흥미로운 게 생겨버린 것이다.

일리야는 창밖 너머로 누군가를 응시했다.

새빨간 눈동자 위로 부드러운 기운이 일렁거렸다.

주위를 압박하던 기운이 옅어지며 붉은 눈동자가 고요한 암녹색으로 돌아왔다.

혹시 죽지 않을까 벌벌 떨던 번스타인 공작이 안도의 숨을 삼켰다.

살았다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블로가 분노를 푼 것이다.

이번은 이렇게 넘어가지만다음은 없다명심해라.”

감사합니다!”

일리야의 짙은 시선 끝에는 테레제와 클라이드가 서 있었다.

* * *

덜컹덜컹.

클라이드는 매우 뚱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정면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꾸벅꾸벅.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테레제가 머리를 풍차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졸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분명 먼저 마차에 탔다.

그러면 테레제가 당연히 맞은편 자리에 앉을 줄 알았다.

화원으로 가는 길에도 그렇게 앉았으니까.

한데 뭐라고 했더라?

옆에 좀 앉을게역방향은 멀미가 나서 말이야.”

개수작에 이유도 가지가지라고 생각했다.

테레제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태평하게 잠들기 전까지는.

클라이드는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사랑한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한다.

피하는 듯했다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려워하는 듯하다가 누구보다 겁대가리 없이 굴기도 했고.

자꾸만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때테레제의 머리가 제 어깨로 향했다.

!

클라이드는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어깨에 닿으려는 테레제의 얼굴을 손으로 막았다.

우응.”

테레제의 뺨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짓눌려 아까 붕어 입을 만들었을 때처럼 얼굴이 찌그러졌다.

피식.

클라이드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얼른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솔직히오늘 테레제 때문에 하마터면 몇 번 웃음이 나올 뻔했었다.

볼수록 바보 같이 생겼네.”

끄응.”

테레제는 뭐가 불편한지 미간을 찡그렸다.

클라이드는 마력을 풀어 거친 도로를 달리느라 지나치게 흔들리는 마차를 감쌌다.

그러자 훨씬 훌륭한 승차감이 완성되었다.

덜컹거림이 확연하게 줄어들자 테레제의 찡그려진 미간도 온화하게 펴졌다.

참 태평하기도 하지.”

언제 한바탕 구른 건지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보이는 무릎이 갈려 있었다.

손바닥도 살갗이 일어나있었고.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지 쿨쿨 자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무구했다.

어째 날이 갈수록 생긴 게 더 맹해지는 것 같았다.

테레제는 뜻밖에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어차피 당사자는 제 손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으니 내친김에 대놓고 구경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테레제의 잠든 얼굴은 일전에 일리야 교수의 연구실에서 본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좀 달라 보이는데.”

그때도 뭔가 좀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지만최근 들어 유독 인상이 달라 보였다.

얼굴이 폈다고 해야 하나?

그래봤자 테레제가 테레제지.’

사실 달라진 건 테레제의 인상만이 아니었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테레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였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평범해졌다…….”

그래테레제와 있을 때의 자신은 평범한 남자애 같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클라이드는 성유물을 꽉 틀어쥐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최근에 잠잠한 것 같더니 오늘 또 말썽이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마음에 동요가 생기면그래서 내면을 찢고 할퀴던 가시가 조금이라도 거두어질라치면 악마가 속삭였다.

-넌 행복하면 안 되지클라이드.

명백히 경멸과 질투가 섞인 경고음이었다.

-역겨운 인간 흉내는 집어치워.

알아나도 안다고.”

테레제는 그냥 끔찍하게 싫은 인간일 뿐이야.

어차피 우리는 대척점에 서 있지.

절대로 친구 따위가 될 수 없는.

-친구하하고작 그런 걸 원한 거야이렇게 달콤한 걸 두고서?

클라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서 성유물의 힘이 자신을 완전히 옭아매길 기다릴 뿐.

하나 오늘따라 악마는 집요했다.

-손을 떼 봐이 멍청한 녀석아.

…….”

클라이드는 조심스레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조그마한 머리가 어깨에 닿았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동시에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정화 마법을 펼쳤을 때 전신을 황홀하게 적셨던순간 이성을 잃을 뻔하게 만들었던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평생을 갈고 닦은 인내심이 없었더라면 테레제의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겹쳤을 것이다.

마차가 발할라에 도착한 줄도 모르고 끝없이 탐했겠지.

달고 부드러운 감각에 흠뻑 취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인간성은 모조리 녹아 사라져 악마의 본능밖에 남지 않으리라.

그는 잠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워하는 테레제를 품에서 구슬리며 유혹할 터였다.

몽마의 페로몬은 한낱 인간의 힘으로 방어할 수 없다테레제는 자신의 제안을 허락할 게 분명했다.

-꿈으로 찾아갈게.

같이 잠들자영원히.

콰득!

살이 짓뭉개지는 섬뜩한 소리가 입안에서 울렸다.

클라이드가 스스로 입안의 살덩이를 씹어 크게 상처 낸 것이다.

성유물의 힘이 더 강력하게 발휘되며 정화 속도가 빨라졌다.

또한 육신의 상처도 회복시켰다.

-재미없긴.

악마가 사라진 후에도 클라이드는 두 손이 하얘지도록 맞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옆을 쳐다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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