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277)

  

이곳은 번스타인 공작저고 지금은 4월이었다.

그 말인즉슨 차원의 문이 활성화된 때라는 뜻이었다.

차원의 문을 열었을 때 낙원이 나타나지 않을 시에는 다른 이스터에그가 등장했다.

번스타인 공작가의 이스터에그는 전설의 마력 증진 물약’.

비록 효과는 1시간에 그치지만.

부우우우우!

젠장뭐 이렇게 빨리 와?!”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차원의 문은 후원 온실 근처의 은퇴한 정원사의 낡은 오두막에 활성 되어있다.

시야에 익숙한 오두막이 보인다.

인벤토리에서 차원의 열쇠를 꺼내 녹이 잔뜩 슬어있는 자물쇠에 끼웠다.

철컥!

낙원은 없었다.

하지만바라던 바다!’

낡은 탁자 위에 놓인 오색 빛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포션을 열어 꿀꺽 삼켰다.

상태창.”

[테레제 스콰이어]

설명스콰이어 공녀

나이: 22

마법 등급: A

지능: B

마력: S (1,000,000/1,000,000)

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

간간이 울리던 후원 알림이 폭발적으로 들려왔으나 지금 중요한 건 벌써 지척까지 다가온 마수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나는 온실 쪽으로 달렸다.

속력을 이겨내지 못한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으나 바로 일어났다.

아프지도 않았다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내 눈에는 두 마리의 고래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양의 마력이 전신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S급 능력!’

A+급에서 고작 한 단계 위였으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S급이라는 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이었으니.

내 주변은 마치 고스트의 영체처럼 황금빛 마력 입자로 뒤덮였다.

정화되어라!”

마수는 뭔가 느낀 건지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내가 작정하고 펼친 대규모 정화 마법을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은 분명 밤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른 여명에 잠겨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마력: S (1/1,000,000)]

검은 안개가 걷히고 은빛의 고래가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하며 브리칭했다.

그걸 보자마자 안도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이다.”

나는 전신의 힘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 * *

정신 차려!”

찰싹찰싹!

… 어떤 자식이 감히 내 뺨을 치지가만두지 않을 테다.

힘겹게 눈을 뜨자 고여있던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엄청난 미남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 미쳤어한 번에 마력 전부를 사용했다가는 쇼크로 죽을 수 있다는 거 몰라네가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그 정도는 상식이잖아!”

시끄러워머리 울리니까 좀 조용히 말해.”

나는 여전히 혼몽한 정신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면전에서 사자후를 들으려니 고막이 다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러자 클라이드는 몹시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더니 내 양 뺨을 꾹 눌렀다.

입술이 붕어처럼 삐죽 솟아올랐다.

정신 안 차리지?”

… 구모훼!”

넌 입만 열면 사람을 열받게 해.”

누고 헐 소리.”

뭐라고 했냐?”

우웅?”

클라이드의 위협적인 물음에 혼몽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들었으면 일어나너 10분쯤 기절해있었어.”

그가 쓰러져있던 나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뭐야왜 친절해혹시 호감도가 올랐나?’

[호감도♥♥♥♡♡]

어림도 없었다.

나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의아하게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눈이 안 떠지지설마 마력을 너무 사용한 부작용인가?”

눈이 팅팅 부었으니까 그렇겠지.”

.”

생각해보니 기절하기 전에 멀쩡해진 고래를 보고 펑펑 울었었지.

그 때문에 눈이 퉁퉁 부은 모양이었다.

너 어떻게 이 일대를 정화 마법으로 다 뒤덮은 거야분명 마력이 모자랐을 텐데.”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나한테 마력 증진 포션이 있었다는 걸 깜빡했어효과는 1시간 정도로 끝이지만.”

그런 걸 깜빡하는 게 말이 돼?”

너도 포션 깜빡했었잖아.”

내가 맞받아치자 클라이드는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없겠지.

부우우우―――

그때 새끼 고래가 우리에게 다가와 브리칭했다.

기분 좋은지 한껏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들어 좀 더 멀찍한 곳에서 부유 중인 어미 고래를 보았다.

어미 고래의 상처가 다 나았나 봐.”

네 정화 마법 영향이야.”

또 눈시울이 시큰했다.

하지만 클라이드의 앞에서 우는 모습 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죽은 사람은 없지?”

내 물음에 클라이드가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무사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저택의 사용인들이 이곳을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띠링!

[퀘스트번스타인 공작의 의뢰 완료]

보상: 1,000,000코인 획득

아무튼다 끝났다.

나는 새끼 고래에게 손을 뻗었다.

영체라 내 손을 통과했지만 부드러운 마력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무사해서 다행이다앞으로 엄마 말 잘 들어.”

새끼 고래는 내 주변을 유영하다가 정면에서 멈추었다.

그리고전신을 별처럼 빛냈다.

나는 새끼 고래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계약하자고?”

부우우――

손등을 내밀라고이렇게?”

부우우――!

새끼 고래가 하라는 대로 손등을 위로 한 채 내밀었다.

그러자 내 손등 위에 은빛 표식이 새겨지더니 흡수되듯 사라졌다.

.”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아서 계약하긴 했는데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새로운 힘이 용솟음친다같은 것도 전혀 안 느껴지는데.’

게임에서 고스트는 천족과 계약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외에 설정이랄 게 없었다.

애초에 이건 고스트 마수를 정화하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백마법으로 새끼 고래를 봉인하는 게 원래 임무니까.’

그때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어미 고래가 큰 움직임으로 번스타인 공작저 위를 돌았다.

새끼 고래 역시 어미를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파아앗!

그러자 늑대들이 하울링 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죽은 식물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어!”

분명 마수가 휩쓸며 새까맣게 말라 죽은 식물들이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일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의 거룩한 손길이 닿은 듯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부우우우――――

낮고 웅혼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이는 어미의 울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높게 쳐들어 어미 혹등고래를 쳐다보았다.

고스트는 뛰어난 개체답게 마법 동물들보다 훨씬 명료한 심상이 내게 전달되어왔다.

또 보자꾸나라고.

또 보자잘 가.”

나는 번스타인 공작저를 떠나는 고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출 때까지.

그 때문에 어느새 번스타인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음을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

사용인들은 혼란스러웠던 상황에도 금세 정중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회복하여 내게 예를 갖추었다.

공녀님께서 저희를 살려주셨습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공녀님.”

태도는 품위 있으나 다들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짙은 선망과 경외혹은 두려움.

인간의 힘을 벗어난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한 이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반응들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화답했다.

일리야 교수님의 부탁이었으니까.”

!”

내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사용인들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도련님께서 멋진 제자를 두셨군요.”

그들은 가문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나며 누구보다 귀족적인 일리야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출신이 대천사니까 당연한가?’

그런 일리야를 추켜세운 내 대답이 아무래도 번스타인 공작가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일부 성좌들이 일리야’ 루트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클라이드는 어느새 도착한 마차 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가자.”

그렇지 않아도 슬슬 사용인들 뜨거운 시선을 어떻게 피할까 고민이었는데 잘 됐다.

나는 클라이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교수님은?”

공작부인께서 마수 때문에 놀라 발작을 일으키셨다는군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따로 자리를 마련하겠다 하셨다.”

과연 일리야는 지금 아픈 공작부인의 곁을 지키고 있을까?

내 시선은 공작저의 위쪽 어딘가를 더듬었다.

저 어디쯤이 공작의 집무실일 텐데.

아마 거기에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자.”

클라이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먼저 마차에 휙 올라탔다.

그래.”

희미한 대답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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