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왜 하필 얘가 들어서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자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야!’
차라리 콱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고 싶어진 나와 달리 클예부는 난리가 났다.
“꺄아, 클라이드 님!”
“역시 테레제 님이랑 같이 있으면 운이 좋다니까요? 아침부터 클라이드 님도 뵙게 되었잖아요!”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 역시 제국 최고의 절세미남…!”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 자칫 예쁘장하기만 할뻔한 얼굴에 야성미를 한 방울 떨어뜨린 선명한 티존의 조화… 역시 내 본진은 클라이드야…]
클라이드는 삐약삐약거리는 영애들을 경멸스럽게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고.”
“회초리질 하는 모습도 섹시해! 더 해주세요! 욕해주세요!”
“저리 안 꺼져?”
“꺄, 화내는 거 귀여워!”
……이쯤 되니 난 클예부가 더 무서웠다.
클라이드는 말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영애들을 상대하는 게 지긋지긋한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와.”
“왜?”
지금 이 거리감이 딱 좋은데.
“학생회장이 부르는 거면 당연히 학생회 일로 이야기하자는 뜻이지 않겠어?”
“어… 그렇겠지…. 내가 몰랐네….”
지구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직장 상사의 지랄을 여기서 겪게 될 줄이야.
나는 우울한 얼굴로 클라이드에게 다가가다가 슬쩍 루미오를 살폈다.
‘아까보다 표정이 멀쩡해진 것 같아.’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 있는 걸 보니 오늘 악마를 소환하진 않을 듯했다.
클라이드는 대뜸 앞장서며 말했다.
“따라와.”
어디로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직도 루미오가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여기에 남으려 하기보단 순순히 클라이드를 따라가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최대한 테레제답게 클라이드에게 바짝 붙어서 걸었다.
그러다 클라이드가 왜 이렇게 가까이 있냐며 발작할까 봐 후다닥 떨어졌다.
혹시나 해서 뒤를 힐끔 보니 루미오가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역시 가까이 있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악마 계약자냐, 검은 하트 3개냐.
그것이 문제로다.
내가 계속 가까이 붙었다가 화들짝 떨어지기를 반복하자 클라이드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곁에서 걸을 거면 옆으로 오고 아니면 애초에 떨어져서 걸어. 신경 거슬리게 굴지 말고.”
꺼지라고 할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내게 선택지를 주었다.
그럼 나야 당연히 나한테 유리한 쪽을 선택하지.
“그러면… 옆으로 가도 돼? 아무 짓도 안 하고 같이 걷기만 할게.”
클라이드가 대답 대신 살벌하게 명령했다.
“빨리 와.”
나는 클라이드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잽싸게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종잡을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한 거지? 내 욕했나?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끔 봤는데 마침 눈이 딱 마주쳤다.
“뭘 봐?”
내가 만약 낙원을 찾기 전에 게임 오버 된다면 그건 이 자식 때문일 게 틀림없었다.
클라이드와 도착한 곳은 학생회실이었다.
달칵.
그런데 비어 있을 줄 알았던 학생회실 안에 선객이 있었다.
일리야였다.
“어, 교수님?”
일리야는 읽던 책을 덮고 우아하게 시선을 들어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좋지 않군.”
그 말에 전날 있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생각해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유지스와 있었던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으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제 체한 게 아직 다 낫지 않았나 봐요.”
그가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
오늘은 드릴 책이 없는데, 뭐지?
고개를 갸웃하자 일리야가 내 손을 가져가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손을 달라는 거였다.”
[일부 성좌들이 ‘일리야’ 루트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일리야는 아공간에 내 손을 잡은 반대쪽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 손바닥에 놓았다. 포션이었다.
“이걸 마시면 괜찮아질 거다.”
포션은 대단히 값비싼 의료품이었다.
이 조그마한 병 하나에 금화를 몇 닢이나 줘야 하니까.
‘붉은 하트가 2개니까 이런 것도 막 퍼주는구나.’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때 클라이드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테레제와 친해 보이시는군요.”
그러자 일리야는 “아.”하고 뭔가 깨달은 듯이 포션을 하나 더 꺼냈다.
“자, 너도 받거라.”
꼭 본인은 포션을 받지 못해 토라진 아이를 대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클라이드도 같은 감상을 느낀 건지 떨떠름하게 포션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풉.”
앗, 참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내 비웃음을 들은 클라이드가 번뜩이는 시선을 보내왔다.
‘음. 죽고 싶냐는 뜻 같은데.’
“다들 앉거라.”
나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일리야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의도를 알아챈 클라이드는 대놓고 날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일리야가 말을 이었다.
“번스타인 공작가에서 학생회에 은밀하게 의뢰할 것이 있어 개인적으로 너희를 불렀다.”
‘이 시점에 번스타인 공작가 의뢰라니.’
이는 틀림없이 번스타인 공작 생일파티 때 벌어지는 ‘마수 습격’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건 당일에 일어나는 사건인데?’
아무래도 나라는 변수로 인해 사건이 앞당겨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번스타인 공작가에 볼일이 있기는 했다.
낙원으로 통하는 나머지 차원의 문은 남자 주인공들의 집에 하나씩 존재하거든.
‘제일 빠르게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은 학교지만, 번스타인 공작가에 갈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차원의 문이 열리는 달에 맞춰서 방문하려면 생일파티라는 이벤트가 있지 않은 이상 조건이 까다로웠다.
개인적인 초대는 붉은 하트 3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번스타인 공작저에서 관리하는 마법 식물 화원에 마수 한 마리가 지속적으로 침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일리야의 말이 의아했다.
그는 고작 마수 한 마리에 애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처단하고자 했다면 진작 찾아내 죽여버렸을 텐데 학생회에 의뢰했다는 건 자신의 선에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클라이드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고스트’였습니까?”
“그래.”
고스트.
그것은 천계에서 흘러들어온 마법 동물의 영체(靈體)를 뜻했다.
마법 동물 중에서 강력하고 정순한 마력을 품은 존재는 육신을 벗고 영체로 다시 태어났다.
반투명한 몸과 강한 힘을 지닌 고스트는 계약도 가능했다.
천족에 한해서지만.
“내게는 정화 마법 능력이 없다. 하면 마수를 죽이는 것만이 답인데 고스트는 이미 죽은 것이라 죽일 수가 없지.”
정화 마법 능력자라 한들 인간이 고스트를 정화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고스트는 마법 동물보다 더 철저히 천계에만 있어야 하는 존재다.
하나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고스트들이 한 번씩 인간계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넘어오는 것까진 뭐, 좋다.
문제는 고스트 역시 마기에 침식된다는 사실이었다.
마수가 된 고스트라니.
이는 악마가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로 취급되었다.
게다가 고스트는 아주 확실하게 마법 식물에 반응해 움직인다.
그것도 대단히 기르기 어렵고 귀한 식물에만.
‘번스타인 공작가에서 기르는 마법 식물은 공작부인의 병에 사용하는 약재지.’
클라이드는 임무의 난이도를 가늠하기 위해 고스트의 종류를 물었다.
“어떤 동물의 고스트였습니까?”
이 대목에서는 무표정을 고수하던 일리야가 미간을 찡그렸다.
“고래였다.”
영체가 된 고스트는 법칙을 무시한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었고 날개가 없어도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허공을 날아다니는 반투명한 고래쯤이야 있을 수도 있잖아……는 순전히 고래 덕후인 팀원의 주장이었다.
그것도 그냥 고래도 아니고 거대한 혹등고래가.
뭐랬더라?
“혹등고래는 바다의 수호천사야.”
그 수호천사가 인간계를 작살내게 생겼다.
일리야가 말했다.
“고스트 마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퍼져봤자 괜한 불안감만 조성할 뿐이지. 아버지는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마법사가 조용히 처리하길 바라셨다.”
띠링!
[퀘스트: 번스타인 공작의 의뢰]
▸보상: +1,000,000코인
▸실패: 클라이드 호감도 하락
※의뢰를 거절하면 자동 실패 처리됩니다.
오. 이번 보상은 제법 코인이 두둑했다.
근데 보상에 비해 실패 페널티가 너무 센 거 아냐?
‘게다가 이 퀘스트는 백마법이 아니면 진행이 안 된다고.’
그래서 리비가 아니면 시나리오 진행이 불가능한 거였다.
‘그렇다고 의뢰를 수락하지 않을 수도 없어. 여기서 클라이드의 호감도가 떨어지면 검은 하트가 4개로 늘어나니까.’
나는 바로 어제 검은 하트가 4개인 남자 주인공을 경험해보았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상태를 겪고 싶지 않아.’
그에 비하면 검은 하트 3개인 클라이드는 얼마나 신사적인지.
클라이드가 내게 경고했다.
“아무리 생각이 없다지만 임무를 발설하면 학생회 퇴출은 물론 퇴학까지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다. 내가 기필코 그렇게 만들 테니.”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