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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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유지스는 아주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었다.

    짐을 즐겁게 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콰이어 공녀라니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다소 이른 만찬이 끝나고 테레제는 황성을 떠났다.

    미혼의 영애를 저녁까지 데리고 있는 건 아무리 안하무인처럼 구는 유지스라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만찬까지는 포상이지만그 이상의 시간은 연인에게나 허락되는 때였으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가문의 딸을 사랑하기엔 유지스는 낭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 테레제가 그를 즐겁게 한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황제의 외투를 건네받던 제프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만남이 만족스러우셨던 모양입니다폐하.”

    예법 수준은 달라지지 않았더구나여전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였어자꾸 신경에 거슬려서 하마터면 목을 조를 뻔했거든.”

    그런데도 공녀가 마음에 드신 거군요.”

    그래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예법은 그대로지만 꽤나 많은 게 달라졌어.”

    유지스는 접견실에서 일부러 말없이 스스로 문을 열어 공녀를 맞이했다.

    테레제 같은 영애들은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면 우쭐한 마음에 큰 실수를 저지르곤 하니까.

    그래서 실수를 유도한 거였는데문을 열고 테레제의 말간 얼굴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실수를 유발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테레제는 미인이지만 외모가 전혀 돋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별로여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물기 어린 은회색 눈동자는 투명한 유리알 같아서 보고 있노라면 만성적인 신경증마저 억눌러지는 것 같았다.

    제프리도 테레제를 떠올리며 황제의 말에 깊이 동의했다.

    소신이 태양궁으로 안내할 때도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테레제가 태양궁에 도착했을 때 바로 장소를 알아차렸던 일화를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래?”

    유지스는 피식 웃으며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랐다.

    기분이 좋으니 평소에 마시는 독주가 아니라향과 맛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술을 골랐다.

    무엇으로든 이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제프리가 그의 환복을 도우며 넌지시 물었다.

    악마 계약자는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테레제의 갑작스러운 비정상적 능력이 혹시 악마와 계약하여 생긴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유지스가 고개 저었다.

    전혀.”

    직계 황족은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인외 존재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황족의 피를 약하게 타고난 이들은 마기를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로 그치지만황제는 그보다 더 뚜렷한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일리야 번스타인과 클라이드 윌로우를 볼 때의 안개가 낀 듯한 감각과는 달랐어외려 모든 게 보이는데 단지 내 식견이 부족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이었지.”

    유지스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미간을 찡그렸다.

    말랑말랑하게 바보처럼 굴던 테레제가 별빛 같은 황홀한 안광을 쏟아내며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압도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테레제가 내뿜는 기운에 한순간 잠식되었었다.

    불쾌할 정도로 호의적인 느낌이었다.”

    궁인을 끌고 가라고 했을 때 테레제는 분명 분노했었다.

    자신을 경멸하고 두려워했으며 원망하고 실망했다.

    한데도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기운을 풍겼다.

    그 기운은 대체 뭐였을까?

    공녀가 앞으로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겠어고든에게 공녀를 잘 지켜보라고 전달하거라.”

    폐하.”

    그리고.”

    유지스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심술궂은 미소를 걸쳤다.

    오늘 짐을 흡족하게 한 공녀에게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하사품을 보내라.”

    * * *

    다음 날.

    아가씨밖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공작저에서 학교에 가려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해야 했다.

    전날의 여파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주치의가 준 약을 먹고 있던 나는 시녀의 호들갑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이게 다 뭐야?”

    아침 댓바람부터 황실 제복 차림의 기사들과 수려한 용모의 남자 궁인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공작저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만큼이나 많은지붕이 없는 마차들에는 온갖 진귀한 것들이 가득 실려있어 공작저 밖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공작저 사용인을 총동원하여 짐을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라울 또한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전부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다.”

    하사품은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이었다.

    세상에어쩜 이렇게 훌륭한 자수가 놓인 실크를 보내셨을까요?”

    이 황금 천사상은 또 어떻고요!”

    어지간한 걸로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공작가의 가신들조차 전부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반나절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낸 영애에게 다음 날 아침부터 하사품을 보내다니의미심장하군요.]

    라울을 포함한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제 태양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설마 청혼이라도 받은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절대로.”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람들은 더더욱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이해는 했다황제가 내게 반해 선물 공세를 벌이는 거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라울은 황제의 하사품에 대한 처분을 온전히 내게 일임했다.

    돌려보내도 좋고 전부 네가 사용해도 좋다감당은 내가 하마.”

    일단이것들 전부 아버지께서 관리해주시겠어요어떻게 처리할지는 좀 더 생각해볼게요.”

    그래.”

    내가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라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진실이 어떻든 네가 황후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피하기 어렵겠구나.”

    등교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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