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스는 상석에 앉으며 얼어붙은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작년 여름 무도회에서 봤을 때와 인상이 많이 달라졌군.”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짐과 춤추고 싶어 안달하던 공녀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거든.”
빌어먹을 쾌락주의자 테레제.
아무리 황제가 돈, 권력, 외모 다 가졌어도 그렇지, 왜 클라이드에게 지조를 지키지 않았니?
난 신중하게 대답을 고민했다.
‘황후 자리를 노리는 걸로 보이면 바로 호감도가 깎여.’
다시 말해서 그건 검은 하트가 늘어난다는 뜻.
유지스의 배드엔딩은 스콰이어 가문의 몰살이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자.’
“모든 영애가 폐하와 춤추고 싶어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으시니까요.”
“왕자?”
유지스의 반문에 당혹스러워졌다.
‘황제한테 왕자라고 하는 건 좀 아닌가? 설마 이걸 당신 신분이 황제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꼬아서 생각하진 않겠지?’
나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어…, 아무래도 황제 폐하라고 하면 수염을 길게 기른 아저씨… 아니, 그러니까 지금 폐하처럼 너무 젊고 잘생긴 외모는 아닌… 죄송합니다.”
“짐이 젊고 잘생겨서 끌렸다?”
말이 그렇게 되기는 한데, 너무 적나라하잖아.
“절대로 성애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경이었습니다.”
황제는 독화였다.
매혹적인 모습과 향기로 유혹하지만 취하려 드는 자를 즉사시키는 냉혹하고 잔인한 독화.
어찌 보면 클라이드와 꽤 닮은 구석이 있었다.
클라이드가 자기혐오에 미쳐있다면 이쪽은 저를 뺀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달랐지만.
내 필사적인 변명과 설득에 유지스의 눈썹이 휙 들려 올라갔다.
“그런 것치고는 짐을 바라보는 공녀의 눈빛이 매우 뜨거웠는데?”
“제가 원래 타고난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
“짐에게 말대꾸도 꼬박꼬박하고.”
X발. 믿는 종교가 유교이신가. 개발자인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참자. 원래 있는 놈이 맞고 없는 놈은 처맞는 게 인생이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이러지 말고 준비한 다과나 들지. 요즘 유행한다는 건 다 준비하라 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렇지 않아도 황제를 상대하느라 당이 떨어진 참이었다.
나는 바로 앞에 놓인 케이크부터 먹었다.
유지스는 마카롱을 푹 찍어 한 입 먹더니 그대로 포크를 집어 던졌다.
마침 입을 벌려 케이크를 집어넣고 있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형편없군. 공로를 세운 귀빈을 접대하는 자리에 이따위로 밖에 못 하겠나?”
그러자 공기처럼 존재하던 궁인들이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마카롱을 치웠다.
“죄송합니다. 새로 내오겠습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케이크를 입에 집어넣고 얼른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체할 것 같아.’
유지스가 또 지랄을 떨까 싶어서 포크를 멈추고 있으니 그가 물었다.
“입맛에 안 맞나? 통 먹질 못하는 것 같은데.”
“아, 아뇨. 맛있습니다.”
혹시 그가 테이블을 엎기라도 할까 봐 열심히 포크질을 하니 유지스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짐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던데. 비위가 좋은 모양이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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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ㅡㅡ 개열받게 하네]
내 말이 그 말이었다.
유지스는 내가 열심히 먹는 척하고 있으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녀를 위해 짐이 직접 태양궁을 구경시켜주지. 좀 걷고 오면 만찬이 준비되어 있을 거다.”
전혀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여기서 잘 넘어가지도 않는 케이크를 씹고 있을 바에 산책이 나을 듯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내가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지스가 에스코트하려는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끝만 살짝 대었다.
잡는 시늉만 하니 유지스가 사냥감의 숨통을 끊으려는 짐승처럼 꽉 붙들었다.
절대 도망칠 수 없게 결박당하는 기분이었다.
“공녀가 짐을 어려워하니 속상하군.”
“…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접견실을 나와 고요한 회랑을 따라 걸었다.
하필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해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것대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오직 나와 유지스의 발걸음 소리만 울리던 중, 그가 침묵을 깼다.
“얼마 전 발할라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스콰이어 공작이 화가 많이 난 듯하던데.”
“서로 오해가 있었고 원만하게 잘 해결되었습니다.”
내 무난한 대답에 유지스는 코웃음 쳤다.
당시 정황을 자세히 보고받았는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영지전까지 치르겠다고 엄포했으니 원만하게 해결된 건 아니지만.’
“뭐, 그렇다 치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공녀가 세운 공로에 대한 상이겠지. 당장 황실 마법사가 되는 건 어떠한가? 개인 마탑과 조수도 얼마든지 지원해주마.”
황실 마법사가 되려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둘 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신중하게 말을 골라 거절했다.
“제 능력을 높게 평가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발할라를 졸업하지도 못한 자가 어찌 황실의 일원이 되겠습니까?”
“거절이군. 공녀의 신분에 비하면 딱히 매력적이지 않을 제안이긴 하지. 그렇다면 공녀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이건 명백한 시험이었다.
너무 시시한 걸 바라서도, 과분한 걸 바라서도 안 된다.
절묘한 균형을 갖춘 대답을 꺼내지 못하면 유지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그때였다.
까드득!
돌이 대리석 바닥에 짓눌리며 생긴 듣기 싫은 마찰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
“…….”
소름 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돌을 밟은 궁인은 사색이 되어 당장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유지스는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이마에 핏대가 서 있었다.
큰일이다. 유지스의 얄팍한 인내심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저 궁인은 틀림없이 죽는다.
오늘은 전부 신발에 천을 덧댄 날이었으니까!
“폐하,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딱히 의협심이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 정신력도 없었다.
“얼음 가시 투구꽃을 보고 싶습니다. 황실의 화원이라면 분명 그 귀한 꽃이 있을 테지요.”
“얼음 가시 투구꽃?”
유지스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그런 게 있느냐?”
“작게나마 화원이 있습니다, 폐하.”
따로 화원까지 있다는 말에 유지스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장이 말을 이었다.
“폐하의 침실에 늘 두는 꽃입니다.”
“아. 그 꽃.”
얼음 가시 투구꽃은 강력한 마비 독을 품은 마법 식물이다.
마법사가 아닌 이가 맨손으로 쥐면 전신이 마비되어 5분 내로 죽어버리는 위험한 식물이지만 황제에게는 효과적인 약초였다.
그의 신경증은 혈통 때문에 생긴 병이었고, 오감이 대단히 예민한 탓에 얼음 가시 투구꽃의 마비 효과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유지스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짐에게 꽃을 보고 성질머리를 가라앉히라는 뜻인가?”
정말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면 황제에게 비아냥거린 꼴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소리에 두통을 느끼신 듯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진통제를 드시는 게 효과가 즉각적이겠지만, 잦은 복용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화원에 가시면 비슷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짐의 건강을 생각하여 화원에 가는 일이 공녀에게 상이 될 수 있다고?”
내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예. 만일 효과가 있다면 폐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실 테니까요. 그보다 더한 상은 없습니다.”
유지스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그는 내 목을 조르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안내해라.”
시종장은 눈짓으로 내게 고맙다고 표시하고는 서둘러 화원으로 안내했다.
“황실에 마법 식물이 남아 있는 줄 몰랐군. 침실의 꽃은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마수가 마법 식물에 이끌려 나타난다는 사실이 보고된 순간 황실은 일반 식물로 정원을 갈아엎었다.
시종장이 말했다.
“위험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니 염려치 마십시오.”
“그래. 고작 이 정도 규모에 마수가 쳐들어올 것 같지는 않구나.”
마법 식물은 신비로운 형태와 색을 갖추고 있어 관상용으로도 훌륭했다.
얼음 가시 투구꽃은 천상의 화원에나 있을 법한 황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비 오는 흐린 날씨라 그 빛이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유지스는 생각한 것보다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꽤 마음이 평온해지는군.”
그의 느긋한 반응에 궁인들은 내심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어쩐 일로 황제가 너그럽게 넘어가려나 보다,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만큼은 여전히 경직된 표정이었다.
정말로 기분이 괜찮아졌다면 궁인들의 신발을 감싼 천을 풀도록 명했을 테니까.
유지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돌을 밟았던 궁인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왔다.
“아악!”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얼어붙었다.
“짐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공녀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기회를 주도록 하지.”
유지스가 궁인에게 자비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짐에게 효능이 있다는 저 꽃을 꺾어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