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는 이 드레스들이 제일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떠니?”
내가 더 열받기 전에 로잔이 나서서 후보군을 셋으로 추려주었다.
“일단 셋 다 사고, 이 중에서 내일 입을 걸 고르면 되겠구나.”
아무래도 좋다.
셋 다 훌륭한 디자인이었기에 아무거나 입어도 테레제의 완벽한 미모라면 멋지게 소화해낼 것이다.
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끝났죠?”
로잔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니? 아직 머리 장식, 보석 세트, 장갑, 구두, 가방, 양산, 부채, 손수건도 보지 않았는데.”
“…….”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착용할 물건을 모두 사고 나서야 길고 긴 쇼핑이 끝났다.
다시는 황제의 초대 따위 받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쇼핑은 나만 빼고 반응이 좋았다.
“테레제가 사교계에 데뷔했던 날이 떠오르네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당연히 기억하고 있소. 테레제가 위컴 영식의 머리를 쥐어뜯은 날이었지.”
로잔은 재빨리 주제를 바꾸었다.
“어머나, 이거 좀 봐요, 여보. 참 예쁘네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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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지금껏 이토록 흡족했던 적이 없었어요.]
나는 뭔가 더 사야 한다고 붙들리기 전에 방으로 피신했다.
‘정작 사야 하는 [상급 예법]은 상점에 입고되질 않네.’
지금까지 필요한 스킬은 사용하기 직전에 입고됐으니까 내일이면 들어오겠지, 뭐.
그리하여, 대망의 일요일이 다가왔다.
* * *
황성은 대규모 건축물이다.
생트리오 호텔도 마법 학교 발할라도 이 거대하고 웅장한 황성 앞에서는 다소 초라해질 정도였으니.
나는 마차가 들어설 수 있는 곳까지 진입한 다음, 똑같은 의복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갖춰 입은 궁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자리에서 내렸다.
그들은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동시에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레제 스콰이어 공녀님. 황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당히 기계적인 환영이었다.
그때 말끔한 제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공녀. 저는 황제 폐하의 수석 보좌관, 제프리입니다. 오는 길이 멀지는 않았습니까?”
“안녕하세요, 제프리 님. 고대하던 황성을 방문하는 날이라 모든 게 즐거워 조금도 멀다 느끼지 못했습니다. 같은 수도 내이기도 하고요.”
“하하. 공녀는 말씀을 참 예쁘게 하는 분이시군요. 제가 태양궁까지 안내할 테니 에스코트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제프리의 팔뚝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제프리는 내가 긴장하거나 어색해하지 않게 이것저것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예전에 봤을 때와 많이 달라지셨군요. 훨씬 차분해지신 듯합니다.”
“그런가요?”
내 속은 난리가 나 있는데, 겉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시스템은 상점템을 뿌려라!’
벌써 200번째 외치는 말이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설마 [중급 예법]으로 황제를 만나야 하는 건 아니겠지?
“폐하께서도 공녀처럼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셨습니다.”
“…그렇군요.”
전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환상적으로 구현된 황성의 아름다운 모습에 전혀 관심이 안 갈 정도로 나는 입고 알림만 기다렸다.
‘시스템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상급 예법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
나는 다른 생각에 골몰하다가 눈에 익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무심코 툭 내뱉었다.
“벌써 태양궁이로군요.”
그러자 제프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말씀드리기 전에 알아채셨군요. 전에 와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국의 영애 중 내가 최초로 방문하는 건데 와본 적 있을 리가.
이건 그냥 개발자라서 아는 정보였다.
“황성은 부처마다 각각 다른 의복을 입는 거로 압니다. 지금 저를 따르는 궁인과 이곳 궁인들의 복식이 같으니 태양궁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내 대답에 제프리가 눈에 이채를 띠며 감탄했다.
“호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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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자리에 한 발짝 다가선 듯하군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곧 귀빈 접견실입니다. 아, 저기 시종장이 보이는군요. 저는 이만 여기서 물러나겠습니다.”
제프리가 뒤돌기 무섭게 말끔한 외모의 시종장이 다가와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녀님. 시종장 베인입니다.”
“스콰이어 가문의 테레제입니다.”
내 시선은 잠시 굳게 닫힌 접견실 문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고대하던 순간을 완벽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처럼 시종장에게 부탁했다.
“시종장님, 잠시 몸단장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쪽이 파우더 룸이니 이용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망했다.”
[성좌들이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궁인들 발 보셨어요? 천으로 감싸고 있었죠. 황제의 기분이 최악일 때 태양궁의 사용인들은 전부 신발 소리가 나지 않게 천을 덧대요.”
그러니 지금 황제는 몹시 기분이 더러운 상태라는 뜻이었다.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이지 않을까?
‘본인이 불러놓고 기분 더러울 건 뭐야? 그럼 부르지를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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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평소랑 뭐가 달라짐?]
“이 행동 패턴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어요.”
아마도 크게 다치거나 죽을 사람은 내가 될 확률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 아직도 상점에서는 입고 소식이 없었다.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내 사망 예고에 성좌들은 더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다들 한마음으로 재촉하는 걸 보니.
[성좌들이 ‘유지스’를 궁금해합니다.]
[성좌들이 BJ가 어서 접견실로 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아. 그래, 죽는 건 내 일이지.’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황제를 상대하는 수밖에.
나는 비장한 각오를 마치고 파우더 룸을 나왔다.
시종장은 내가 접견실 앞에 다가서자 입을 열었다.
“폐하. 스콰이어 가문의 테레제 스콰이어 공녀가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긴장한 채 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달칵.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어…?’
새파랗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내리꽂듯 직시했다.
천하를 가진 자의 권태로운 오만이 전신에서 흐르는 남자였다.
유지스 로드리고 황제.
그가 직접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다, 공녀.”
나는 서둘러 예를 갖췄다.
“천하의 주인이신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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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황제다운 늠름한 외모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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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은 아닌데 묘하게 끌리네]
유지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들어와라.”
아마도 인사는 그럭저럭 통과.
이제 다음 난관을 확인할 차례였다.
‘인물 정보.’
▼
[유지스 로드리고]
나이: 31세
키: 190㎝
생일: 1월 31일
좋아하는 것: 내기, 술, 담배, 이야기
싫어하는 것: 기만, 스콰이어, 지루함, 시시함
호감도: ♥♥♥♥♡
▲
“……?!”
시작부터 검은 하트가 4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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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거 X된 거 같은데?]
아무리 하드 모드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유지스는 다과가 화려하게 차려진 자리로 가서 손수 의자를 빼주었다.
“앉지.”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뻣뻣하게 굳은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유지스는 의자를 안쪽으로 밀어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했나?”
느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전신이 오싹해졌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그의 보랏빛 눈을 마주친 순간 무력할 정도로 솔직한 심정이 나오고 말았다.
“…네. 좀, 많이 긴장했습니다.”
예법을 떠나서 멍청하게 보일 대답이었다.
‘멍청하다고 죽이지는 않겠지?’
일리야는 그럴 수 있지만 유지스는 멍청함에 특별한 유감은 없었다.
외려 그는 너무 똑똑하고 지루한 타입을 제일 싫어했다.
‘실제로 지능을 너무 높게 키우면 유지스 루트를 깨기가 어려워져.’
따라서 이건 전략적인 멍청함이었다. …아무튼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