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은 고통과 신음을 참느라 식은땀이 마른 뺨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짐은 기만을 싫어하지.”
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유지스 황제만큼 기만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유지스 황제는 5살에 즉위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총명했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 어른이 눈과 귀를 막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랄 수밖에 없었다.
황태후와 고위 귀족들은 어린 황제를 조종해 제국을 쥐락펴락했다.
그들은 유지스가 장성해 더는 섭정하기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하여 선황제의 사생아 중 가장 머저리인 자를 찾아두었다.
여차하면 황제를 바꾸리라.
그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비록 그 일이 윌로우 가문에 발각되는 바람에 피의 숙청으로 이어져 버렸지만.
그 때문에 황제는 기만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감히 자신을 가지고 논 황태후와 귀족들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고든은 곧장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금이 간 게 틀림없는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으나 버텼다.
“소신의 무능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황제는 미친 사람이지만 멍청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증거가 있는 자들만 죽였다.
그랬기에 섭정한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는 스콰이어 가문을 없애지 못했다.
“물론 용서하네. 짐은 자네를 아끼니까.”
거짓이다.
황제는 무엇도 믿지 않고 무엇도 아끼지 않는다.
“……황공하신 말씀이십니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고든의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있던 시종장이 다가와 고든에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왁스로 봉인된 호사스럽고 특별한 편지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태양궁 초대장이었다.
가문의 후계자조차 아닌 일개 공녀를 황제가 직접 만나겠다고?
그것도 미혼의 영애를, 미혼의 황제가?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굳이 초대장을 보내 직접 대면하려는 이유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테레제가 과연 황제가 바라는 대로 개망나니로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성가신 변수가 될지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놀라운 업적을 이뤄낸 마법 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짐이 직접 만나 독려해주어야겠지.”
핑계는 그럴싸했으나 누구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스콰이어 가문이 아닌, 발할라를 통해 초대장을 전달하는 것 자체부터 라울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는 행위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황제가 테레제에게 깊은 유감과 동시에 호기심을 품었다는 점이었다.
고든이 할 역할은 황제의 초대장을 전달하는 중간다리가 되는 것.
그리고 앞으로 테레제를 유심히 살펴보는 거였다.
‘여차하면 제거할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폐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 * *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아침이었다.
단지 하늘에 몸집이 두꺼운 구름이 음산하게 깔려 있었고.
아침 식사가 좀 느끼했으며.
펠릭스 교수의 책을 반납하려고 가방에 넣다가 발등에 떨어뜨리는 정도의 소소한 불행을 제외하면.
“읏, 추워.”
오늘따라 바람도 유난히 차가웠다.
나는 몸을 움츠린 채 빠른 걸음으로 본관에 도착했다.
한데 분위기가 좀 어수선했다.
‘외부인들이 보이는 것 같은데?’
교수로 보이지는 않으나 교복을 입지도 않은 이들이었다.
가만 보니 의복에 마법협회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더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찾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때 이사장이 칙칙한 차림의 남자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어라. 마법협회장 마일로?’
저 미치광이 마법사가 썩 좋아하지도 않는 발할라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눈 뒤집힐 정도로 갖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인데.
‘별로 예감이 좋지 않은걸.’
이사장은 날 발견하더니 매우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 마침 테레제 학생이 저기 오고 있었군.”
나는 조용히 피해 가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그리고 협회장님도요.”
마일로 협회장은 날 본 순간부터 안광을 번들거렸다.
“테레제 공녀! 참으로 반갑군. 어제 그대의 활약에 대해 긴급 보고받은 순간부터 몹시 심장이 뛰어서 한잠도 못 자고 아침부터 이리로 달려왔다네.”
“아, 예…….”
“마법 동물을 부려 오염을 정화하다니! 공녀의 마력에 필시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게 분명해.”
“제가 마법 동물을 부린 건 아니고 걔들이 알아서 행동하던걸요.”
내 말이 협회장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는지 그는 혼자서 흥분한 상태로 떠들어댔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능력이 필요하다네.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협회장은 실컷 강압적으로 말해놓고 갑자기 이성적인 척 이런 말도 했다.
“하지만 공녀가 모든 마수와 오염된 땅을 정화할 수는 없지.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 인간은 지금 전제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그러니 공녀의 마력에 담긴 비밀을 조사한다면 다른 마법사도 비슷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 그러니까 나더러 마법협회의 실험체가 되라는 뜻이네?
리비가 백마법을 개화한 순간 이런 에피소드가 진행되기는 했다.
설마 이 에피소드가 내게도 적용될 줄은 몰랐지만.
여기서 수락하는 건 함정이었다.
‘그 즉시 게임 오버니까.’
협회장이 짐짓 거룩한 의무를 행하는 사람처럼 간교하게 지껄였다.
“공녀가 인류를 위해 협조해줄 수 있겠나?”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고 싶은 주제에.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라는 거야 미친 영감탱이가]
띠링!
[성좌 ‘명탐정’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분석 결과 구구절절 개소리로 판명.]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가라! 테레제! 가서 짓밟아라!]
이사장은 시종일관 한발 물러난 모양새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주변은 이 사태를 구경하는 학생들, 교수들, 협회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답이 없자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로비는 침묵에 잠겼다.
‘신기하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솜털이 쭈뼛 설 만큼 주목받는 이 상황이 싫었을 텐데, 그냥 조금 거북한 것으로 끝이었다.
‘나름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익숙해진 건가?’
뭐, 아무튼.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대답에 앞서, 협회장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제가 정화 마법을 잘하는 건 사실입니다만 마법 동물을 부려서 침식된 땅을 정화하게 만든 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나는 협회장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마력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미 발할라 내부 적성 검사에서 제 마력에는 아무런 속성도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발할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나요? 저는 B+급임에도 위험한 임무에 대한 부담을 무릅쓰고 학생회에 가입했습니다.”
나는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한쪽 입꼬리만 피식 들어 올렸다.
“제가 여기서 더 나아가 마법협회의 소망에 가까운 수준의 추론을 근거 삼아 실험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마법협회원들이었다.
“저, 저런 무도한!”
“과연 스콰이어 공녀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군!”
“제국을 위해 희생할 생각은 못 할망정, 저토록 이기적이어서야!”
어차피 내 앞에서 당당히 비난하지 못할 엑스트라들이 머릿수만 믿고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하나 딱히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선배님 말씀이 맞지 않아?”
“왜 발할라 학생이 마법협회의 실험 대상으로 차출되어야 하지?”
“그런 식이면 특수한 재능을 가진 학생은 전부 실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잖아? 발할라에 재능 없는 마법사가 어디 있다고.”
분위기가 순조롭게 개판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방금 내 딸에게 함부로 지껄인 자들은 순순히 자백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응? 이 목소리는 설마…?’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특히 이사장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라울은 다 때려 부술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보호하듯 감쌌다.
예상치 못한 온기에 당황하고 있을 때, 라울이 말했다.
“죄를 자백하고 무릎 꿇지 않으면 영영 서 있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테레제의 망나니 DNA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