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다시 보아도 매우 음산하고 황폐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수도의 정경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번화가를 비롯해 귀족이 이용하는 장소는 전부 꿈에 그린 듯 평화롭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평민이 사는 마을은 이토록 분위기가 달랐다.
이곳을 보니 <신의 유희> 세계관이 디스토피아임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검게 오염된 흙을 보며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침식이 많이 진행됐구나.”
그래서 이 부근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였다.
아니, 살지 못하는 거겠지.
스콰이어 혈족은 마기 특유의 악취를 잘 느끼지 못한다.
또한 음울하고 오싹한 기분도 거의 들지 않는다.
지금 나 역시 멀쩡했고.
다시 말해서 보통의 인간은 침식된 땅에서 그런 것들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크르르.”
흠칫!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새까맣게 침식된 마수의 형태가 노을빛에 비치고 있었다.
‘뭐야? 마수가 나타나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리는데?’
“히이이잉―!”
마수의 살기에 놀란 말이 발작했다.
게임에서는 말이 멀쩡했지만, 현실로 치환되며 이런 개연성 부분이 보완된 모양이었다.
빌어먹게도!
“읏! 진정해!”
“히이이이잉!!”
이대로라면 낙마로 더 크게 다칠 듯해 마법을 써서 안전하게 내려왔다.
말은 내 통제에서 벗어나자마자 도망쳐버렸다.
마수들은 새까만 마기를 풀풀 풍기며 움직임에 따라 잔상이 남는 듯한 착각이 드는 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나는 재빠르게 마법 전서구부터 보낸 뒤 슬슬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임시 기지까지는 고작 5분 거리였다.
‘5분만 버티면 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첫 전투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진짜 전투.
‘내가 익힌 마법이 실전에서 통할까?’
나는 긴장한 눈으로 마수 무리를 응시했다.
혹시 몰라서 마법 생명체를 정화하는 방식은 마르고 닳도록 공부했다.
몇 가지 전투 마법도 틈틈이 익혀두었다.
하지만 마수를 앞에 두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더 공부했어야 했어!’
그때 마수들이 위협적인 포효를 내질렀다.
“커어엉!”
“크와아앙!”
마수들이 다가오진 않았지만 지레 놀라버린 나는 정화 마법을 광역으로 퍼부었다.
“침식된 생명이여,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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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다 정화됐어;]
“으응?”
이렇게 쉽게 다 정화됐다고?
‘광역으로 정화 마법을 펼쳤기 때문에 위력이 턱없이 약했을 텐데?’
나는 당황한 눈으로 늑대들을 보았다.
분명 새까만 마기에 침식되어있던 늑대들은 기분 좋다는 듯 헥헥거리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되네?
“나 생각보다 강한가?”
때마침 새로운 마수들이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더는 긴장되지 않았다.
뚜둑. 뚜둑.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꺾으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디 정화의 시간을 가져볼까?”
* * *
나는 토하기 직전까지 뛰고 있었다.
도망치느라?
아니.
“야! 거기 서! 안 서?!”
도망치는 마수를 잡느라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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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로맨스 방송 보러와서 추노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억울함에 버럭 소리쳤다.
“허억! 헉! 이게 뭐야! 마수가 도망치는 설정 같은 건 없었다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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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도 님한테 일방적으로 정화 당하는 설정은 아닐 거잖아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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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맞지]
정화된 늑대들이 나를 도와 마수들을 몰이해주는데도 정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때 말을 탄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경비대였다.
“저기 보입니다! 마수들이 공녀님을 공격하는…!”
“정화되어라! 정화되어라!”
“공격하는…?”
“제발 좀 서라고! 정화되어라!”
“도, 도와드려라! 마수들이 도망친다! 막아!”
그때 데미안이 경비대 사이를 뚫고 나타나 순식간에 마수들의 퇴로를 막았다.
“정화되어라!”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마수까지 정화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퍼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일리야 교수의 말이 옳았다.
마법사는 체력이다.
마력이 아니라 체력이 더 중요하다고.
정화된 늑대들은 꼬리를 붕붕 흔들며 다가와 누워있는 내 얼굴을 핥았다.
할짝할짝!
무려 스무 마리가 내게 바글바글 모여드는 바람에 압사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나를 구해준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나를 일으켜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어어… 안 괜찮아…. 죽겠어….”
“다행이다. 멀쩡하구나.”
그나저나 책에서 봤을 때는 분명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늑대들은 막 침식에서 벗어났는데도 시름시름 앓지 않고 매우 활기차게 장난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침식되었다가 되돌아온 쪽이 나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내 교복을 털옷으로 만드는 중인 늑대들을 지친 표정으로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데미안의 시선이 느릿하게 나를 훑었다.
“요즘 네게서 낯선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
나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었다.
“원래도 마법 동물들이 잘 따르는 편이었어?”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데미안이 더 잘 알았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됐어.”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떠보는 질문에 괜히 거짓말하기보다는 정보를 적게 주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원래의 테레제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계속 의구심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때 경비대원 중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이건 그냥 잘 따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대미문의 현상이에요!”
경비대원의 옷에는 마법협회 소속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렇다는 건 꽤 실력 있는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테레제는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현대에서도 상류층의 유명한 개망나니라면 연일 이슈가 될 텐데 즐길 거리가 턱없이 부족한 이 시대에서는 얼마나 자극적이고 흥미롭겠는가?
한데 이 경비대원은 테레제의 악명이 두렵지도 않은지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의 영웅을 바라보는 열광적인 눈빛이었다.
“마기에 침식된 마법 동물을 정화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워낙 실패 확률이 높아서요. 하지만 공녀님께서는 보란 듯이 손쉽게 성공하셨습니다!”
그의 말대로 난 100%의 확률로 정화에 성공했다.
“그것도 말이 안 될 정도로 정화 강도가 약했는데 말입니다! 혹시 스콰이어 가문의 선대 중에 천족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글쎄. 다 인간이었을걸.”
다소 황당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라이드가 경비대원들과 나타났다.
마법 동물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무시했다.
자신들보다 인간이 하등 종족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클라이드를 피해 내게 더 바짝 몰려드는 마법 동물들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외려 이상한 쪽은 나였다.
“호오, 마법 동물이 사람을 따르기도 하는군.”
“심지어 모두 건강해 보입니다. 저희가 정화한 늑대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데 말입니다.”
클라이드는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한 마법 동물들을 보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는 자신이 반마이기에 배척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이 땅에 머물러선 안 될 저주받은 존재임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에휴.’
나는 일부러 열패감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클라이드에게 말 걸었다.
“나한테 볼일 있어?”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해야 하는데 지금만큼은 예외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쟤, 끝도 없이 땅굴 팔 얼굴이라고.
클라이드는 틀어진 주먹에 힘을 풀며 평정심을 가장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현장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니 따라와.”
“알겠어. 아, 잠깐만.”
나는 그를 따라가기 전에 늑대들을 쓰다듬어주며 신신당부했다.
“얘들아, 이제 살던 곳으로 돌아가. 침식된 땅이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헥헥헥!”
“한 번 정화된 마법 동물은 마기에 내성이 생겨서 더는 침식되지 않는대. 그렇더라도 조심하고.”
내 걱정이 기분 좋은지 늑대들은 꼬리를 흔들다가 갑자기 한 마리씩 하울링을 시작했다.
“아우우우―!”
마법 동물들이 지닌 성스러운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마을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침식된 땅이 정화되고 있어!”
분명 오염되어 검어진 흙이 건강한 갈색빛을 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