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날.
나는 샌드위치를 두 개 포장해서 버려진 별관에 갔다.
레이니는 내가 또 올 줄 몰랐는지 몹시 놀라더니 샌드위치 봉투를 발견하고는 애써 기쁨을 감추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받아. 네 몫이야.”
레이니는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이었으나 어제보다는 신속한 동작으로 샌드위치를 받아 갔다.
나는 엷게 미소 짓다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 했을 때였다.
“여기 계셔도 되는데요….”
레이니는 막 내뱉어놓고 몹시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샌드위치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다 싶어서 한 말인 듯했다.
나는 그냥 피해주는 게 맞을지 여기에 있어도 될지 고민했다.
‘제안을 거절하면 평민이랑 한자리에 있기 싫어서 거절한 것처럼 보일 텐데.’
“고마워. 잠깐만 있다가 갈게.”
나는 계단에 앉아 책을 펼쳤다.
레이니는 내가 계단에 앉는 모습을 보더니 안전거리를 확보하듯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
레이니는 가장 마지막 계단에서 한 칸씩 내려오더니 마침내 나와 딱 두 칸의 계단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뭔가 경계심 많은 고양이를 먹이로 살살 꼬드긴 기분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레이니는 먼저 말도 걸어주었다.
“……선배님은 마법 생명체에 관심 있으세요?”
“응, 조금. 마법 생명체들이 마기에 침식되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잖아. 이럴수록 대비되어있지 않은 민가의 피해가 커지니까.”
“……아.”
레이니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어색하게 반응하더니 내 책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마법 식물에 대한 건 그 책보다 <마법 식물도감>이라는 책에 삽화가 있어서 보기 편하실 거예요.”
“그래? 오늘 도서관에 가서 빌려볼게. 고마워.”
내가 환하게 미소 짓자 레이니는 따끔한 정전기에 놀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더니 뚱하게 꾸며낸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고, 고마워하실 필요까진 없어요.”
레이니는 말은 퉁명스럽지만 속은 따뜻한 캐릭터 유형이었다.
본래의 성향이 드러나는 걸 보니 나를 꽤 친근하게 여기는 듯해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레이니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또 말을 꺼냈다.
“어제부터 팬지 마을에 기사단을 파견하셨다고 들었어요.”
팬지 마을은 데미안이 사는 마을이었다.
“맞아. 앞으로 한 달간 계속될 예정이야.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저도 그 마을에 살아서요. 어머니께서 스콰이어 공작가에서 보호하는 마을이 됐다고 좋아하시면서 말씀해주셔서 알게 됐어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왜 웃으세요?”
레이니가 내게 간접적으로 마을을 보호해줘서 고맙다고 돌려 말하는 게 귀여웠다.
“너 귀여워서.”
그래서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는데 레이니는 잘 익은 자두처럼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다음 강의 준비하러 가볼게요!”
“점심시간 아직 한참 남았는데?”
레이니는 대답도 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 우리 애가 또…]
‘모르겠다. 책이나 마저 봐야지.’
“…흐아아암.”
요즘 잠을 잘 못 들어서 그런가, 레이니가 사라지니 순식간에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난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잠깐 눈을 붙였다.
* * *
테레제가 잠든 버려진 별관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여전히 새빨간 양복과 화려한 염색모를 고수 중인 오즈월드와 뺨이 푹 꺼져 병약해 보이는 푸른 도포 차림의 남자였다.
정말이지 국가와 시대상 모든 게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푸른 도포를 입은 남자가 잠든 테레제를 쳐다보며 오즈월드에게 물었다.
“네 BJ가 저 인간인가?”
“그렇습니다, 쟝.”
쟝이라 불린 남자는 손에 든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테레제에게 다가가 진찰을 시작했다.
“응. 역시나 빙의증후군이야.”
“많이 망가진 상태입니까?”
“에러가 생겼던 것치고는 괜찮아. 아마 스스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관리한듯해. 본인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는 지능쯤은 있나 보군.”
오즈월드는 최근 테레제가 만사 제쳐두고 이토록 시시하기 짝이 없는 버려진 별관만 들락거리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원래라면 시스템을 강제해 퀘스트를 줘서 방송을 자극적으로 만들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나약하다.
고작 빙의증후군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 나간 BJ가 숱했다.
채널 관리자들은 그것을 두고 ‘꽝’이라 불렀다.
오즈월드는 신기록을 연달아 달성 중인 테레제가 꽝이 되게 둘 생각 따위 없었다.
그랬기에 에러가 생기자마자 이렇게 의사를 불러온 것이었다.
쟝은 청진기를 거두고 손가락에 별빛 같은 마력을 모아 테레제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보통 이 시기에 빙의체의 인상이 달라지지. 이 BJ는 초기 영상으로 확인했던 얼굴과 상당히 달라졌군.”
쟝의 말대로 테레제의 인상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육신은 영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잠들어 있음에도 얼굴에 옅게 깔린 우울이 원래 자신만만하고 포악하던 인상을 확 달라 보이게 만들었다.
얼핏 신지우의 원래 외양이 떠오를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이 닮아있어서 일지도 몰랐다.
원래의 테레제가 신경질적으로 화려하고 도도한 외모였다면 지금은 안개에 뒤덮인 듯한 신비로움이 있었다.
“이만큼이나 극적으로 인상이 변하는 경우는 드문데.”
쟝이 감탄하듯 말하자 오즈월드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서 거는 기대가 큽니다. 인상이 크게 변할수록 저를 즐겁게 해준 BJ가 많았으니까요.”
“고약한 말이군.”
BJ를 극한으로 내몰기로 유명한 오즈월드가 본인을 즐겁게 해준다고 평할 정도라면 심히 가학적일 게 분명했다.
쟝은 테레제의 영혼을 치유하며 그녀의 말간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저 고요히 잠든 얼굴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감긴 눈가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일까?
쟝은 홀린 듯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탁!
그의 손이 닿기도 전, 오즈월드가 미소 지은 얼굴로 잡아채기 전까지는.
오즈월드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로군요.”
“…실수했군.”
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성좌들을 즐겁게 해줄 인간 장난감일 뿐인데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저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사과하지.”
오즈월드는 그제야 부러뜨릴 듯이 쥐고 있던 쟝의 손을 놓아주었다.
‘위험한 새끼.’
쟝은 얼얼한 손을 털며 조용히 치유에만 전념했다.
자칫 오즈월드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소멸당할 수도 있었다.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오즈월드는 수틀리면 같은 관리자든 뭐든 죽여버린 다음 코인으로 죄악의 대가를 치렀다.
그는 그런 짓을 몇 번이고 저질러도 코인이 썩어 넘쳐날 정도로 부자였다.
‘듣기론 신성을 살 수 있을 만큼 코인이 많다던데.’
쟝의 손가락에 맺혀있던 마력이 사라졌다. 치유가 끝난 것이다.
“영혼의 뒤틀림은 없앴다. 육신에 완벽히 안착했으니 더는 빙의 에러가 생기지 않겠지.”
빙의 에러.
그건 전조도 없이 갑자기 트라우마가 터지는 현상이었다.
테레제가 갑자기 데미안의 말을 떠올리며 폐소공포증 같은 증상을 보인 것처럼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쟝. 방금 코인을 입금했으니 확인해보시죠.”
“늘 그랬듯 후한 보수로군. 사양하지 않고 받지.”
오즈월드의 개 같은 성질이 두려우면서도 일감이 들어오면 꼬박꼬박 받는 이유는 거절하기에 너무나 큰 보수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쟝은 갓의 챙을 쥐고 살짝 고개 숙인 뒤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오즈월드는 금방 떠나지 않고 새근새근 잠든 테레제를 바라보았다.
“벌써 향기를 맡은 벌레가 꼬이니 걱정입니다, 테레제 양.”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테레제의 영혼은 무수한 별빛이 깃들어 있었다.
성좌들의 팬심이 순수할수록 별빛은 더없이 투명했고, 테레제는 햇살을 받은 다이아몬드 같았다.
엉망으로 망가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러니 한낱 장난감 따위에게 쟝이 흔들리지.”
오즈월드는 혀를 쯧, 차다가 스르륵 옆으로 고개를 떨구는 테레제의 얼굴을 한 손으로 받아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에 희고 자그마한 얼굴이 담기자 문득 전에 개인 열람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의지할 데가 저밖에 없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굴던 모습은 그의 나쁜 기질을 자극할 정도로 순진무구했다.
그때 테레제가 추위를 느낀 듯 몸을 움츠렸다.
“흐음.”
오즈월드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예 계단에 앉아 테레제를 품에 기대게 했다.
아직 여유 시간이 있었으니 그동안 테레제를 좀 더 재울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를 동안 오즈월드는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며 회중시계를 지켜보았다.
이내 분침은 정각을 가리켰다.
다른 채널을 방문할 시간이었다.
그가 테레제를 다시 난간에 기대게 하려 몸을 움직였을 때.
“으음.”
테레제는 따스하게 고인 온기가 떠나려 하자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오즈월드는 다시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광고를 더 틀어놓으면 성좌들이 몹시 언짢아할 텐데.
그걸 알면서도 오즈월드는 광고를 끄지도 않았고 다른 채널로 떠나지도 않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저답지 않게 쓸데없이 빈둥거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딱 1분을 더 할애하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당신이 깨어있을 때 보도록 하죠.”
마침내 1분이 지나자 오즈월드는 잠든 테레제의 뺨에 키스한 뒤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