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277)

  

헥헥!”

끼루루.”

나는 어색한 손길로 동물들을 쓰다듬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해알았지?”

동물들은 내 말에 저마다의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순간라울의 쪽지가 떠올랐다.

밥 잘 먹고 술은 적당히 마시라던 잔소리가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건지 좀 더 잘 이해되었다.

그때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일리야 교수가 입을 열었다.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다가지.”

아차오전부터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있었다.

잠깐만이건 가져가야지.”

펠릭스 교수는 내가 빌리려고 했던 책을 얼른 꺼내주며 쾌활하게 웃었다.

언제든 돌려줘빠르면 좋고.”

내가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러겠다는 상투적인 대답을 남기고 연구실을 나왔다.

첫 강의는 어차피 일리야 교수의 강의였기에 우리는 같이 강의실로 이동했다.

내가 책을 훑어보고 있으니 일리야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공을 바꿀 생각이 있나?”

아뇨절대 없어요.”

마법 동물은 예민하지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 마력 파장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마법 동물은 강력하지만 컨트롤하기가 어려워 연구하는 학파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니 마법 동물 쪽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면 굉장한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었다.

하나 너는 이상할 정도로 상성이 좋다훌륭한 재능이 될 텐데.”

다만 나는 대단한 마법사가 되는 게 목표도꿈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고개 저으며 단호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저는 교수님께 인정받는 쪽이 더 좋아요이제야 속성 마법을 간신히 이해하고 있기도 하고요.”

어쨌든 제대로 익혔을 때 훨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학문도 <속성 마법>이었다.

우리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라그러고 보니 교수님을 따라가는 게 별로 힘들지 않네?’

의아하게 시선을 위로 들자 여전히 무심해 보이는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리야 교수가 내 속도를 맞춰주고 있었다.

설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성좌들이 호감도 변화에 주목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일리야’ 루트를 지지합니다.]

개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호감도가 벌써 이만큼이나 채워진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내가 리비로 플레이해도 하드 모드에서 붉은 하트 2개를 채우려면 족히 20회 이상 개인적으로 만나야 했는데.’

그렇다는 건 일리야의 호감도를 채울만한 결정적인 무언가를 내가 했다는 뜻이었다.

그게 뭔데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어쩌면 혹시……?’

마법 동물들 때문인가?

마법 생명체는 본디 천계에 서식했다.

하나 100년 전대악마가 일으킨 차원 균열로 인해 천계의 동식물이 인간계까지 넘어오게 된 것이다.

천족은 마법 생명체와 마력 파장이 잘 맞았고 그들에게 가장 맛있는 먹이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특히 대천사 시절의 일리야는 모든 마법 동물을 손쉽게 다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관계성은 그의 타락으로 끝나버렸다.

누구보다도 친숙했던 마법 생명체들은 그를 적으로 인식했으니.

그 사실을 마음에 담아 나를 질투할 캐릭터가 아냐그러기에 일리야는 너무도 숭고하니까.’

천계를 박살 낼 생각밖에 없는 대악마에게 숭고하다는 표현이 적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내가 마법 동물들과 친근해 보인 게 그를 자극한 건 맞는 것 같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일리야 교수를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 걸까?

시선이 성가시다는 듯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행위는 모욕하기 위함이거나 유혹하기 위함이지어느 쪽도 학생이 교수에게 보낼만한 것은 아닌 듯한데.”

그의 추궁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만한 적당한 변명을 떠올렸다.

그게… 오늘따라 교수님이 멋져 보여서요?”

지금껏 교수들에게 내 적당한 아부가 썩 잘 먹혀드는 것 같았으니까 이번에도 반응이 나쁘지 않을

유혹 쪽이었나.”

?!”

일리야 교수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가까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당돌하군.”

그러고는 내 반응 따위는 흥미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일부 성좌들이 일리야’ 루트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아니무슨.”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다가 첫 강의가 일리야 교수의 강의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허둥지둥 뒤따라갔다.

* * *

발할라에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꽤 여러 개가.

이를테면 이런 것.

스콰이어 공작님이 어마어마한 거액을 기부하셨다더군이건 윌로우 가문과의 관계 개선을 뜻하는 건가?”

또는 이런 것.

데미안 선배님이 테레제 선배님의 호위 마법사로 임명되었대무려 스콰이어 공작님이 직접 찾아와서 임명하셨다니이는 임명식을 치른 이들보다 더 호화로운 대우 아닌가아무리 인재라지만 평민인데 말이야.”

그것도 아니면 이런 것.

요즘 테레제가 도서관 지박령이 됐다는 소식 들었어?”

그래절대 가지 말아야겠네.”

넌 원래 도서관을 가지 않잖아멍청아.”

다시 말해서전부 스콰이어와 관련한 소문이라는 말이었다.

소문의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테레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가장 경악하게 만든 소문은 테레제가 학생회에 들어갔다는 거였으니까.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악마 같은 스타성]

스타성은 얼어 죽을.’

하필이면 주목도가 높은 소문이 동시다발적으로 확 퍼져버린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호기심이나 이득을 노리고 접근하는 인간이 서서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은 어디에서 먹지?”

나는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한적한 산책로를 걸으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교정은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착실하게 흘러 완연한 봄이 되었음이 느껴졌다.

나는 멍한 눈으로 흩날리는 꽃잎을 보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언제부터인가 미약한 두통이 자주 느껴진 탓이었다.

왜 자꾸 머리가 아프지?”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쩌면 빙의증후군인 듯빙의하고 나서 이때쯤 그런 증상 나타나는 BJ 꽤 많음]

빙의증후군이라니참 이상한 말이었다.

있을 법한 증후군이긴 하네.”

스스로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건 느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방이 막힌 장소가 유독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각성한 듯 눈이 떠지기도 했으니.

이럴 때의 나는 종종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되어있곤 했다.

지금도 그런 장소를 찾고 있는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생각해보면 빙의 직후 스콰이어 공작저에 있는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세상과의 단절이었던 것 같다.

악역 빙의라니심란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잖아.’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본관에서 멀리 떨어진 별관의 입구 계단에 앉아 손에 든 책과 샌드위치 봉투를 내려놓았다.

적당히 쌀쌀한 바람과 꽃나무 사이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이 그럴싸한 운치를 만들어내는 장소였다.

여기라면 아무도 안 오겠지.”

남자 주인공들은 물론클예부와 데미사도 말이다.

부스럭.

나는 봉투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응시하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입맛이 없었다.

엘로이즈와 라울의 잔소리를 생각하면 뭐라도 꾸역꾸역 씹어 삼켜야 했으나 내키지 않았다.

입맛이 없는 것도 빙의증후군인가?”

아니다지구에서도 넌 뭐든 더럽게 맛없게 먹는구나라는 말을 자주 들어본 기억이 떠올랐다.

난간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테레제 선배님?”

현실을 부정하는 기색이 스민 조그마한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계단의 가장 위쪽에 서 있는 여자애가 보였다.

비쩍 마르고 수수한 외모.

흑갈색 머리카락을 얌전히 땋아 내린 머리와 남의 걸 물려받은 듯 펑퍼짐한 교복.

저 애는 우리 팀에서 만든 캐릭터였다.

레이니 로즈.”

“-!”

레이니는 설마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햄스터처럼 몸을 움츠렸다.

나는 새삼스럽게 별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져서 여길 골랐는데레이니가 자주 나타나는 버려진 별관이었구나.’

레이니는 한눈에 보아도 나를 심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나?’

레이니는 평민이었다.

테레제는 감히 평민이 자신에게 말 거는 것을 참지 못하는 미친 망나니였고.

자리를 비켜줘야겠네.’

미안선객이 있는 줄 몰랐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레이니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주린 배를 감추듯 쥐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잔뜩 당황한 레이니에게 샌드위치 봉투를 내밀었다.

받아.”

……이건 뭐죠?”

샌드위치입도 안 댄 건데내가 지금 입맛이 없어서대신 먹어줄래?”

레이니는 내 행동이 믿기지 않는지 몹시 경계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허기가 경계심을 이긴 모양인지 쭈뼛거리며 봉투를 받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별말씀을.”이라고 대답한 뒤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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