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엘로이즈가 꿀차와 묽게 끓인 수프를 챙겨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셔서 이것 좀 드세요. 속이 한결 편안해지실 거예요.”
“으응, 고마워.”
나는 꿀차부터 꿀꺽꿀꺽 마신 뒤 수프를 한술 떴다.
엘로이즈가 주변을 정리하며 물었다.
“어제 일은 기억나세요?”
“아니, 전혀. 그러고 보니 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내 기억은 클럽 룸에서 10병째 독주를 땄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엘로이즈는 어쩜 좋냐는 표정으로 난감하게 대답했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데려오셨어요.”
“……응?”
가주님? 설마 내가 아는 가주님을 말하는 거 아니지?
“가주님이 직접 업어서 침대에 눕혀주셨답니다. 한참 걸으신 듯하던데 대체 어디서부터 아가씨를 업고 오신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라울은 학교에 악마가 튀어나와 리비가 위험에 처한 게 아닌 이상 이곳에 올 캐릭터가 아니었다.
“왜 오셨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학교에 대단한 액수를 기부하셨다고 들었어요.”
기부라니, 이건 또 무슨 전개인데?
“스콰이어의 이름으로 새로운 훈련장과 정원, 도서관이 지어질 거래요. 유명한 레스토랑이랑 카페도 다음 달 내로 입점할 거고요.”
‘리비 때문인가?’
소중한 딸이 입학한 곳이니까 가문 간의 은원은 잠시 접어둔 걸지도 모르지.
어찌 됐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잘됐네. 언제까지 윌로우 가문과 척지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진엔딩을 보려면 두 가문의 화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물론 내가 그 일을 하진 않을 거지만.
그러나 놀라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가의 수익금은 스콰이어와 윌로우의 이름으로 장학생에게 지급될 예정이에요. 이 일은 스콰이어 장학재단에서 주관하라 하셨어요.”
이건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스콰이어 장학재단에서 주관하라는 말은 권한을 내게 일임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어제 내가 만취한 꼴을 보고도 그런 결정을 한다고? 라울은 품위 없이 구는 걸 몹시 싫어하는데.’
혹시 이 상황이 버그인가 의심될 정도였다.
엘로이즈는 후후 웃으며 협탁 위를 가리켰다.
“옆을 보세요, 아가씨.”
협탁 위에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데미안 웨스트를 네 호위 마법사로 임명했다. 빼어난 재능의 마법사임은 확실하더구나. 하나 미천한 신분이니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임명식은 생략하거라.
그리고 오늘 보니 살이 너무 빠졌더구나. 식사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술은 적당히 마셔라.
-네 아버지 R.」
뜻밖의 잔소리가 적힌 쪽지였다.
엘로이즈가 울상으로 꾸며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보셨죠? 어제도 가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혼내셨는지 몰라요. 아가씨를 어찌 보필하기에 어린아이처럼 가볍냐고 말이에요.”
나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이런 잔소리와 염려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심장 안쪽이 몽글몽글한 거품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서둘러 몸단장을 마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자꾸 흐뭇한 눈으로 보는 엘로이즈의 시선이 깃털처럼 나를 간지럽혀 재채기가 날 것 같았으니까.
학교에 들어서자 평소보다 더 활기가 느껴지는 대화들이 들려왔다.
“좋은 아침!”
“너도! 어제는 잘 들어갔어?”
“과음했더니 오늘 컨디션이 말이 아니군.”
“하하하!”
홀로 다니던 학생들조차 사교 클럽 오리엔테이션 여파인지 삼삼오오 짝지어 까르르 웃으며 등교하고 있었다.
그건 클예부도 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테레제 님!”
“좋은 아침이에요, 테레제 님!”
내게 상큼한 인사를 건네는 신입생들의 표정에 친근함이 어려있었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셔놓고 얘들은 힘들지도 않나.’
역시 신입생.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의 체력이었다.
“그래, 안녕.”
나는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대충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자 뭐가 좋은지 신입생들이 꺄아, 하고 웃었다.
나를 아는 척하는 사람은 그들로 끝이 아니었다.
역대 최고 회원 수라는 게 허튼소리가 아님을 증명하듯 내게 인사하는 영애가 한둘이 아니었다.
영애 중에는 어제 일을 걱정해주는 이도 있었다.
“어제 공작님께서 엄청 화 나보이셨는데 괜찮으셨어요?”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으니까.
영애의 말대로라면 라울은 역시 내가 술 취한 모습을 보고 화를 낸 모양이었다.
한데 어째서 끝까지 화를 내지 않았는지, 왜 내게 여러 이권을 주었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때 다른 영애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은근하게 웃었다.
“어머, 어제 스콰이어 공작님께서 테레제 님을 업고 기숙사까지 가신 걸 못 보셨어요? 발할라 본관에서부터 업고 가셔서 목격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고요!”
…업고 왔다는 건 들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자 말을 꺼낸 영애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기억나지 않으세요? 어제 공작님이 저기서부터 테레제 님을 업고 가셨어요!”
영애의 손가락 끝을 따라 창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본관으로 들어오는 드넓은 직선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정문으로 이어져 있어 가장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진짜야?”
내 반응을 본 영애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걱정하시는 거죠? 하지만 어제 그 광경을 본 사람 중 자식을 업고 간 공작님을 흉볼 이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솔직히 저도 부러웠는걸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영애도 말을 거들었다.
“무척 다정해 보이셨어요. 사실 아무리 사이좋은 가족이라고 해도 귀족들은 체면을 생각하느라 그런 친밀한 행동은 하지 않잖아요.”
“예법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때때로 너무 차갑게 느껴지죠.”
엘로이즈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라울이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행동을 했다니.
서로 어제의 광경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이야기하던 영애들이 돌연 나를 쳐다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테레제 님, 얼굴이 빨개지셨어요.”
“어?”
“지금은 더 빨개지셨어요!”
“어어?”
나는 몹시 당혹스러워져 허둥지둥 얼굴을 감싸 쥐었다.
봄볕을 오래 쬔 것처럼 뺨이 따끈따끈했다.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귀!!!!!!!!여!!!!!!!!워!!!!!!!!!]
“혹시 부끄러워서 그러세요?”
“에이. 테레제 님은 부끄러움 따위 모르셔! 어제 술을 그렇게 드셨는데 몸이 좋지 않으신 거겠지.”
“아냐. 이건 부끄러워하시는 게 분명해! 제 말이 맞죠? 공작님이랑 다정해 보이신 게 부끄러우셨던 거죠?”
‘그만…! 제발 그만해…!’
얘들은 심각하게 눈치가 없었다.
심지어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하지 않아서 지나가던 학생들이 이 경악할 대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어났다.
‘안 되겠다. 도망쳐야겠어.’
나는 본관 로비 중앙쯤에 있었다.
도망치려면 이대로 계단을 올라 다른 층으로 가버리거나 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그렇다면 2층으로 간다.’
“얘들아. 만나서 반가웠고 잘 가.”
“네에? 어디 가세요, 테레제 님!”
“역시 부끄러워서 도망치시는 거죠?!”
이쯤 되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니고 일부러 날 놀리는 것 같은데….
아무튼.
뒤에서 삐약삐약거리는 영애들을 내버려 둔 채 우다다다 계단을 올랐다.
스스로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2층에 도착하여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테레제에에에―!!”
미모사가 맞은편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쟤는 또 왜 저래…?”
그녀는 울분을 터뜨리듯 소리쳤다.
“감히 내 뒤통수를 치고 학생회에 가입해?! 당장 탈퇴해!”
…그 문제였구나.
악마와 마수가 두려워 데미안이 있는 학생회라지만 절대 가입하지 않았던 미모사라면 반드시 화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누구에게도 학생회 가입 소식을 알리지 않은 거였는데, 기어이 들킨 것이다.
‘젠장. 도서관으로 도망칠걸.’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일리야 교수를 발견했다.
“교수님!”
“윽?!”
지척까지 다가왔던 미모사는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일리야 교수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교수님은 오늘도 미모사가 접근 못 할 정도로 대악마의 품격이 철철 넘쳐흐르시는구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마침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뵙네요.”
일리야 교수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내 뒤에 서 있는 미모사를 힐끗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나는 또 위기를 모면하려 일리야 교수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켕겨 발뒤꿈치를 들었다.
효과는 미미하겠지만 그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교수님? 저번에 주신 책을 다 읽어서 그러는데, 다른 책을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진짜 용건도 있다고!
일리야 교수는 밑에서 알짱거리는 날 쳐다보더니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따라와라.”
“네!”
나는 미모사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보자, 미모사.”
“이익!”
미모사는 몹시 분한 표정으로 쿵쿵 발을 구르면서도 차마 우리를 따라오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