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기숙사를 나가야 하나?’
돈도 많은데 학교 근처에 타운하우스를 하나 매입해서 독립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애석하게도 <신의 유희>는 시대적 특성을 고려해 고루고루 인권 감수성이 낮았다.
이곳에서 미혼의 자녀는 독립할 수 없다는 설정이었다.
‘이거 어떻게 못 바꾸나?’
촛불집회로 대통령도 바꾸는 나라 출신인 나로서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었다.
비록 그 법이 우리 팀에서 만든 법이지만…….
‘그런 설정이 없다면 남주 녀석들은 하나같이 본가를 떠나버릴 캐릭터란 말이야.’
남주뿐만이 아니라 테레제도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법을 무시하고 가출 전적을 쌓아놓은 테레제를 보라.
그야말로 무법자였다.
자꾸만 잡생각이 들어 책에 집중되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어버리고 클라이드를 피해 얼른 목적지로 가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았다.
뚜벅뚜벅. 뚜벅뚜벅뚜벅.
뚜벅뚜벅뚜벅. 뚜벅뚜벅뚜벅뚜벅.
내가 두 걸음을 걸으면 그는 세 걸음을 더.
내가 세 걸음을 걸으면 그는 네 걸음을 더 걸었다.
심지어 보폭은 두 배 차이가 났다.
분명 뒤에서 걷던 클라이드가 어느새 날 추월해 있었다.
‘저 자식이?’
띠링!
[성좌 ‘도파민중독’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개유치 ㅋㅋ]
결과적으로 나는 참패했다.
뺨에 열이 오르도록 빠르게 걸었음에도 클라이드의 여유 부리는 걸음에 한참을 못 미친 것이다.
몹시 분하고 억울했다.
띠링!
[성좌 ‘대인배’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소인배 특) 혼자 갑자기 급발진해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대결함]
누, 누가 대결했다고 그래?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하며 퍽 우아하게 걸어 목적지로 향했다.
오늘은 모든 강의가 오전 중으로 끝났다.
오후에 사교 클럽들의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클예부는 1층에서도 가장 좋은 클럽 룸을 썼다.
이번에 최대 회원 수를 기록하며 이사장이 직접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라고 지시했다고 들었다.
명분이 그럴싸했으나 결국 본인 손자 팬클럽을 우대해주는 거였다.
어쨌든 나는 클예부 클럽 룸으로 들어갔다.
안은 벌써 영애들이 내부를 둘러보며 까르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재빠른 눈짓으로 루미오가 이곳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모습이 안 보이네.’
그사이 영애들은 날 발견하더니 양 떼처럼 몰려들었다.
“테레제 님! 드디어 오셨군요!”
“클럽 룸이 정말 멋져요! 클예부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으응, 그러게….”
“이게 다 저희의 수장이신 테레제 님 덕분이에요. 존경스러워요!”
“자, 다들 테레제 님께 박수~!”
“와아아아~”
짝짝짝!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테레제의 오른팔인 소라 머리가 인상적인 영애, 패트리샤가 곳곳에 흩어져있는 회원들을 불러 모았다.
“여러분, 이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할 테니 다들 모이세요~!”
“네에~!”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마련된 커다란 테이블에 모두가 착석하자 패트리샤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처럼 역사적인 날, 우리 회장님 말씀을 안 들어볼 수 없겠죠~?”
“네에~!”
아니. 제발 그러지 마.
나 그런 거 딱 질색이야!
“테레제 님, 앞으로 나와주세요!”
짝짝짝짝!
나는 쏟아지는 박수에 간신히 미소 짓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단상에 올랐다.
조별 과제 때도 발표만은 하지 않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서다니.
‘그래도 생각보다 덜 긴장되네.’
루미오는 끝끝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몸이 좋지 않아 불참한 듯했다.
게임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다.
나는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어차피 원래 테레제는 달변가도 아니었고, 딱히 이들의 사기를 북돋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클럽 활동에 대해 공지해야겠다.’
“다들 데미사가 아닌 클예부에 들어온 걸 환영해. 덕분에 멋진 클럽 룸을 쓰게 됐네.”
꺄르륵!
내 서두에 영애들은 웃음꽃을 피웠다.
그래. 여기까지는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였다.
“우리는 클라이드의 예비 신…부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어. 특히 데미사보다도 말이야.”
라이벌의 존재는 서로를 성장시키는 법.
클예부는 당연히 데미사를 이겨야 한다는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 있었고, 이를 자극 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데 희한하게도 신입조차 투지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게 바로 집단광기인 걸까?
나는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클예부는 훌륭한 학업성취와 빼어난 인품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거듭날 예정이야. 우리만이 가장 훌륭한 숙녀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게!”
“우리만이 가장 훌륭한 숙녀…!”
내 비장한 말이 느슨했던 사교 클럽의 기강을 굳세게 잡은 모양인지 다들 갈수록 몹시 빠져드는 표정을 지었다.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애는 무대 체질이구나]
나는 사뭇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차분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려면 먼저 교내에서 우리의 평판을 가장 해치는 일부터 금지하는 게 마땅하겠지. 다들 동의하나?”
“물론이에요.”
“옳으신 말씀이세요. 테레제 님!”
다들 단단히 홀린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 밑밥은 깔아두었으니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앞으로 클예부는 교양있는 숙녀답게 특별한 용건 없이 클라이드를 쫓아다니지 않는다.”
그러자 영애들이 “아아…!”하고 아쉬움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는 꼭 필요한 규칙이라고 생각해요.”
클예부라고 해서 모두가 클라이드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행위를 내심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영애들이 지금을 기회 삼아 한마디씩 했다.
“클라이드 님이 불편해하는 것도 그렇고 다른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데 방해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규칙에 강력히 찬성합니다.”
“저도 찬성이에요!”
“저도요!”
상황이 이러하니 모두 새 규칙이 꼭 필요하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마무리했다.
“내가 할 이야기는 끝이야. 이제 준비된 다과를 먹으며 좋은 시간 보내.”
“네에~!”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흐름이었다.
“오늘을 위해 제가 뭘 가져온 줄 아세요? 짜잔!”
뜬금없이 한 영애가 커다란 술병을 꺼내 들기 전까지는.
“어머나. 그게 뭔가요?”
“후후. 피카치 30년산이에요. 아버지의 수집품이죠. 아버지께서 만수무강하시도록 이런 독한 술은 젊은 저희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죠.”
“그러다 들키면 어떡해요?”
“최대한 색이 비슷하게 탄 홍차를 병에 채워 넣으려고요! 꺄르륵!”
곁에 있던 영애도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꺼냈다.
“저도 조부님께서 제 동생이 장가드는 날에 여신다고 한 샴페인을 가져왔답니다. 어차피 제 동생은 장가 못 갈 거예요!”
“클예부는 다정한 사람들만 모였군요! 저도 실은 조모님께서 50년 전에 어렵게 구하신 술을…”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여기가 클예부가 아니고 효녀 모임인 줄 알겠어.’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게… 로판이라고…?]
그때 영애들이 우르르 날 둘러싸며 잔에 술을 따랐다.
“자자, 이런 귀한 독주는 역시 제국 최고의 애주가이신 테레제 님부터 따라드려야죠!”
“뭐? 아니, 됐어. 나 술 못 마셔.”
“네에? 테레제 님이요? 농담도 참 재밌으셔!”
‘농담이 아니라 진짠데.’
테레제의 육신이기는 하지만, 원래의 내가 심각한 알코올 쓰레기라 선뜻 독주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난 고작 소주 두 잔에 전신이 빨개진다고.
나는 다소 난감하게 잔을 받아들다가 멈칫했다.
잔에서부터 굉장히 다채롭고 유려한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어라? 왜 이렇게 향기롭지?’
쓴맛이라고는 전혀 나지 않을 거 같은 황홀한 향에 고개가 절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한 모금만 마셔볼까…?’
홀짝.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술이 달아.”
한 번도 술에서 맛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굉장히 풍부한 맛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리비가 돌아왔던 날에도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술을 마셨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심장이 두근거리기는커녕 멀쩡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마신 뒤 입맛을 다셨다.
술이 입에 착착 붙었다.
“이거 맛있다.”
“그렇죠? 독주를 좋아하시는 테레제 님이라면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어요!”
“저도 마셔볼래요!”
한 영애가 같은 술을 한 모금 꿀꺽 삼키더니 기침을 터뜨렸다.
“켁켁! 이게 뭐예요?! 엄청 써요!”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영애가 피식 웃었다.
“아직 인생의 쓴맛을 본 적이 없나 보군요. 저는 술이 달아요. 제 인생이 더 쓰니까…….”
“적셔! 적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