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은 게 오랜만인 것 같군.”
그의 중얼거림에 도노반이 대답했다.
“리비 아가씨와 주세페 도련님은 언제나 사이가 좋으시니까요.”
“그런 사이 좋은 두 사람이 자리에도 없는 테레제 때문에 싸우다니. 참.”
라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테레제의 편지를 발견하고는 다시금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상사에게 보고하듯 용건을 명확하게 정리해 깍듯한 문장으로 나열해놓은 편지였다.
“발할라에 가봐야겠어.”
도노반은 거의 펄쩍 뛸 뻔했다.
온갖 인재는 죄다 발할라에 모여들기에 어쩔 수 없이 스콰이어의 자녀들도 그곳으로 보내기는 한다만, 학부모 참관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심지어 공작부인도 아닌 스콰이어 공작 본인이 직접 방문한다고?
이는 윌로우 측에서도, 스콰이어의 장로들도 전부 반기지 않을 사안이었다.
“가주님. 그것은…….”
라울은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기부금을 준비해.”
“그리하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상대는 윌로우잖습니까.”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툭하면 가문 간의 분쟁을 걱정하는 척 스콰이어를 압박하시는 걸 자네도 알잖나.”
황제는 명백히 윌로우 가문의 편이었다.
정확하게는, 스콰이어 가문을 몹시 싫어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대귀족 가문 중 앙숙으로 유명한 두 가문을 만류하는 척, 늘 스콰이어 가문이 제국의 결속력을 떨어뜨린다는 핍박을 일삼았다.
라울은 황제의 번지르르한 외양을 떠올리며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이 기회에 사이좋은 척이라도 해놓으면 이번 사교 시즌에 우리 애들을 덜 괴롭히실지도 모르지.”
도노반은 차마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테레제가 발할라에 입학한 데다 클예부라는 파격적인 클럽 활동 덕에 황제의 공연한 심술을 잘 피해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참에 데미안 학생도 내 직접 보고 발탁 여부를 정해야겠군.”
도노반은 즉시 예를 갖추었다.
“분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똑똑.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나는 아침을 깨우는 엘로이즈의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들어와….”
달칵.
엘로이즈는 방을 들어오더니 책상과 바닥에 흩어진 책과 필기한 종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또 늦게까지 공부하신 거예요? 그러다 시력 나빠지시겠어요.”
“강의 내용을 따라가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찌뿌둥한 몸을 쭉 기지개 켜며 연신 하품했다.
잠을 충분히 자는 건 아니지만 이건 한국에서도 똑같았다.
별다를 게 없는 생활 습관이었다.
‘이 정도면 딱히 무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하리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심하진 않지만, 두통도 잦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가?’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개강 이후 쭉 무리할 정도로 마법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법이 흥미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자였다.
‘낙원의 문을 찾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낙원으로 통할 가능성이 있는 차원의 문은 총 5개.
짝수달에 동시에 열린다.
발할라에 입학하기 전 문 하나를 열어 전대 스콰이어 공작이 숨겨놓은 거액의 비자금을 얻었으니, 이제 4개가 남았다.
만일 운이 나빠서 제일 마지막에 낙원으로 통하는 문을 찾게 된다면 10월에나 진엔딩을 볼 수 있단 뜻이었다.
‘차원의 문은 그달에 하나만 열 수 있으니까.’
결국 실제 게임대로 캐릭터를 육성해 스토리를 진행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테이블에 앉아 아침부터 먹었다.
엘로이즈에게 달콤한 빵과 잼 말고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을 부탁했더니 닭고기 수프나 샐러드 같은 요리를 가져와 주었다.
‘이 수프는 백숙 같네. 속이 편안하다.’
내가 힘없이 느릿느릿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있으니 엘로이즈가 안타까워했다.
“이것도 입맛에 안 맞으세요?”
“최곤데?”
“어쩐지 새로 바뀐 조리장이 영 미덥지 못했어요. 제가 가서 다시 만들어달라고 할게요.”
“아니. 진짜 맛있다니까.”
엘로이즈는 대단히 시무룩해졌다.
“내일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내가 일부러 눈치 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더 해명하려다가 관뒀다.
요즘 엘로이즈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 예민하고 까다롭게 신경 쓰고 있었다.
‘더 맛있게 해온다는데 나쁠 건 없겠지…….’
“그래. 알아서 해줘.”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몸단장하고 있을 때 엘로이즈가 물었다.
“오늘은 사교 클럽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시죠?”
“……으응.”
마침내 모든 클럽 가입 기간이 끝났다.
나는 무사히 학생회 일원이 되어 곧 소집될 예정이었다.
마수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정작 두렵고 걱정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클예부 OT였다.
발할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각각의 클럽 룸에서 신입을 맞이하는 파티를 열었고 그건 클예부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가기 싫다.’
얼핏 전해 듣기로는 올해 회원 수가 역대 최고라는데, 자괴감만 깊이 드는 말이었다.
클라이드의 예비 신부 수가 역대 최고치라는 뜻이니까…….
중동의 어떤 왕자도 이 정도로 많은 수의 신부가 있진 않을 터였다.
나는 다소 우울해진 표정으로 엘로이즈에게 물었다.
“데미안 웨스트를 호위로 발탁하는 건에 대해서 아직 답신이 없었어?”
“네, 아직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상하네. 이렇게 늦을 일이 아닌데.’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긴 했지만, 어차피 데미안이 호위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늘 공작저로 가서 여쭤보고 올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젯밤에 준비해둔 작은 궤짝과 서류 봉투를 꺼내 엘로이즈에게 내밀었다.
“해줄 일이 하나 더 있어.”
“말씀하세요.”
“앞으로 스콰이어 장학재단을 본격적으로 운영해볼 생각이야. 그러려면 재단에 어떤 인재가 있는지 홍보하면 좋을 것 같아서.”
거창하게 말했지만, 재단에 소속된 인재는 데미안이 전부였다.
나는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재단에 등록되어있는 데미안 웨스트의 주거지에 기사단을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시찰을 돌아줘. 데미안이 사는 곳은 곧 스콰이어가 보호할 곳이지.”
엘로이즈가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마수 습격에 취약한 평민이라면 이런 홍보에 굉장한 가치를 느끼겠군요. 멋진 생각이세요.”
기사단은 스콰이어 가문을 상징하는 화려한 나비 문장이 수 놓인 깃발을 들고 거리를 힘차게 행군하며 재단의 존재를 홍보할 것이다.
평민들은 저들도 스콰이어 재단에 속하기만 한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도 안전해지리라 생각하고 선망하게 되겠지.
……는 전부 눈속임이었다.
내게 장학재단을 제대로 운영할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벌써 3월 중순이니 슬슬 마기에 침식된 맹수들이 데미안이 사는 마을을 덮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날 시기였다.
그 사태를 막지 못하면 데미안의 검은 하트가 늘어난다.
같은 시각에 바로 옆에서 똑같이 습격당한 스콰이어 가문 관할지역은 안전하게 보호받기 때문이었다.
나는 궤짝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행군과 시찰에 드는 비용은 가문에다 청구할 필요 없어. 도움을 주실 분이 있으니까.”
도움을 주실 분은 돌아가신 선대 스콰이어 공작이었다.
라울에게 비용처리를 요구하려면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직접 처리하는 쪽이 나았다.
어차피 돈은 썩어 넘치니까.
이어 조그마한 상자도 내밀었다. 안에는 상급의 루비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건 수고해주는 대가.”
엘로이즈는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손사래 쳤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가씨. 시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대가를 주시다뇨.”
“혼자서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래. 받아둬.”
나는 억지로 엘로이즈에게 상자를 떠넘겨버렸다.
“좋은 보석이니까 그걸로 새 장신구를 맞추는 것도 좋겠지.”
엘로이즈는 크게 감동했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감사해요, 아가씨. 이렇게나 저를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어요.”
보석이 하도 많아서 적당한 걸로 줬을 뿐인데 지나치게 좋아하는 모습에 괜히 머쓱해졌다.
나는 얼른 채비를 끝내고 현관을 나섰다.
“다녀올게.”
등굣길은 여전히 한적했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기숙사를 이용하는 귀족이 거의 없으니까.
‘부딪칠만한 사람도 없어 보이니 마음 편하게 책을 읽어도 되겠어.’
어느새 습관이 된 등굣길 독서를 하며 본관으로 향하다가도 한 번씩 고개 들어 주변을 휙휙 살펴보았다.
더는 데미안과 부딪치는 우연 따위는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다 눈을 마주쳐선 안 될 녀석을 발견하고 말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클라이드였다.
“…….”
“…….”
우리는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인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