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277)

  

* * *

라울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벌써 마기 오염 지역이 이렇게나 늘다니작년보다 속도가 빠르군.”

악이 무분별하게 인간계를 침식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0.

동식물이 마기에 침식되어 인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황실은 물론 귀족들도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세상은 야멸치게도 멸망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려는 모양인지매해 상황이 나빠져 가고 있었다.

경비를 더 배치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는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에 불과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인간이 쓸 땅이 줄어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질 터였다.

라울은 다음 서류를 넘겼다.

.”

그것은 가문의 자금을 멋대로 융통하거나 영지민을 착취하는 등의 일을 일삼는 가신들을 고발한 보고서였다.

전부 테레제가 미란다에게 준 내쳐야 할 가신 목록에 든 자들이었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제 딸이지만 정말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가주님.”

라울은 도노반의 부름에 서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지?”

도노반이 중요한 편지만 담은 은쟁반을 내밀었다.

스콰이어 공작에게는 하루에도 수백 통의 편지가 쏟아졌고 방문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하여 중요한 것을 잘 분별해내 가주의 피로를 낮추는 것이 집사로서 능히 해내야 할 업무 중 하나였다.

다만 오늘은 도노반의 훌륭한 분별력으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편지가 한 통 섞여 들어왔다.

테레제의 편지였다.

보통은 도노반의 선에서 내용을 확인하고 특이 사항이 있을 때만 가주에게 보고를 올리곤 했었지만이번에는 그래선 안 될 거 같다는 묘한 직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라울에게 내가 이런 것까지 확인해야 하나?”라며 꾸중을 들을지언정 편지를 들고 오기로 결심했다.

테레제 아가씨께서 편지하셨습니다.”

그 순간무심함만 깔려있던 라울의 표정에 마법을 부린 것처럼 색채가 스며들었다.

그게 비록 유쾌함은 아니었지만최근 들어 라울이 지은 표정 중 가장 생동감 있어 보였다.

이리 줘보게.”

역시나.’

도노반은 즉시 흰색의 정갈한 봉투를 내밀었다.

애초에 가장 위에 놓아두기도 했었다.

라울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편지를 꺼냈다.

그는 내용을 훑더니 테이블 위에 톡 내려놓았다.

데미안 웨스트를 호위 마법사로 발탁하겠다는군.”

그는 스콰이어 재단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마법사입니다차기 협회장 감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요.”

라울도 익히 들어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테레제와의 사이가 대단히 나쁜 줄 알았는데어쩐 일로 마음을 바꾼 거지?”

확인해보겠습니다.”

테레제에 관한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울은 학교에 간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장녀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사고 치진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테레제는 요즘 어떻게 지내지?”

도노반은 이런 물음이 있으리라 일찍이 짐작하여 바로 어제 테레제의 시녀인 엘로이즈를 통해 몇 가지 보고 사항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드릴 사안이 있었습니다테레제 아가씨께서 학생회에 가입하셨다고 합니다.”

학생회를?”

라울은 순간 혈압이 확 치솟는 걸 느꼈다.

기어이 클라이드 그놈 때문에 학생회까지 들어갔다 이 말이냐?!”

정황상 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도노반은 라울이 분기탱천할 것을 예상했기에 쥐 죽은 듯이 기다렸다.

하아그 망할 클럽보다야 차라리 명분은 있다만윌로우 가문에 인질을 잡힌 꼴이구나.”

학생회는 윌로우의 통제를 따라 직접 마물과 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집단이었다.

한데 스콰이어의 딸이 학생회에 가입하다니.

이는 과장해서 스콰이어보다 윌로우가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걸로 보일 수 있었다.

이를 허락한 윌로우 가문의 시커먼 속내를 생각하면 배알이 뒤틀렸다.

선대 가주들께 면목이 없군.”

라울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실 언제고 터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일이 이제야 일어난 것뿐이었다더 놀랄 것도 없었다.

그게 전부인가?”

도노반이 송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테레제 아가씨의 측근 시녀가 가문의 재봉사를 보내주길 바란다고 합니다아가씨의 교복을 전체적으로 수선해야 한다더군요.”

교복은 갑자기 왜?”

최근 들어 살이 많이 내리셨다고 합니다.”

라울의 눈썹이 대번에 꿈틀거렸다.

시녀가 대체 어떻게 공녀를 보필하길래 옷을 다 수선해야 할 정도란 말이냐?”

테레제는 탐욕의 화신 같은 아이였다.

물건이든 음식이든 최고의 것을 양껏 누려야 간신히 만족하는 성미에 활동량도 왕성하여 건강만큼은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하지만 개강 전에도 이상할 정도로 적게 먹기는 했었지.’

도노반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마법서를 읽기 시작하시면 허기도 잊을 정도로 집중하신다고 합니다간식도 손대지 않으시고요.”

테레제가?”

매일 읽는 책도 바뀌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라울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다물어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노반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기숙사에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으셨으며 술을 드신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또한 놀라운 말이었다.

테레제는 술과 파티라면 말 그대로 환장했다.

일주일에 나흘 이상 술을 진탕으로 마시며 포악한 주사를 부려대는 통에 몇 번이고 금주령을 내릴 정도였다.

금주령에도 몰래 술을 마시다가 걸려서 제 속을 썩이던 애가 파티도술도 하지 않고 있다니?

라울은 잠깐 마른세수를 하더니 도노반에게 어이없는 투로 물었다.

테레제가 시녀에게 거짓을 고하라고 시킨 건 아니고?”

그건 아닙니다.”

그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리비가 살며시 등장했다.

아버지저 왔어요.”

라울은 리비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일찍 왔구나학교에서 별일은 없었고?”

그럼요강의도 재밌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리비는 벌써 이번 주에만 두 번이나 다양한 가문의 영애들을 초대해 같이 차를 마시곤 했다.

초대받은 영애들은 품위 있는 가문에서 잘 교육받은 태가 났다.

테레제가 우르르 데리고 다니는 나사 빠진 영애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리였다.

클라이드의 예비… 뭐라는 그 사교 클럽으로 아비를 망신시키기만 할 줄 알지정신 차리라고 약혼시켜놨더니 파혼당하질 않나.’

라울은 도노반과 한창 테레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던 탓인지 리비에게 전혀 묻지 않던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 언니는 별일 없어 보이더냐브루니 공녀와 또 싸우진 않았고?”

리비는 입술을 오므렸다.

이미 싸우긴 했는데…….’

그녀는 아직 미모사에게 오해받아 크게 언쟁이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글쎄요? 1학년이랑 4학년은 잘 마주칠 일이 없어서요.”

그 클예부인지 뭔지는 아직도 안 없어졌고?”

리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려는지.”

아버지저는 아직 언니에 대해 잘 모르지만제가 전해 듣는 언니와 직접 경험한 언니는 너무 다른 사람 같아요.”

라울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대신 리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리비의 진심 어린 표정과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저에 대한 반항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한데그게 묘하게 기꺼웠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아버지.”

세간의 평가와 정반대되는 이야기였다.

아비인 저조차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는데 리비는 단호하리만큼 테레제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라울은 쓰게 웃으며 리비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래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벌컥!

라울의 말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주세페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도노반은 낭패한 표정으로 서둘러 주세페에게 다가가며 만류하듯 그를 불렀다.

라울도 주세페의 무례한 행동에 엄한 표정을 지었다.

주세페허락도 없이 집무실을 들어올 나이는 지나지 않았느냐.”

허락을 구하려고 했어요리비 누나가 이상한 말을 하기 전까지는요.”

리비는 주세페가 제게 반목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차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해?”

완전히요걔는 못돼 처먹은 인간이에요엄마한테 한 짓을 들었다면 절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요!”

물론 리비도 그에 대해 전해 들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본 테레제는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무섭게 다그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그만해라특히 주세페거기서 더 경거망동한다면 봐주지 않을 것이다.”

주세페는 씩씩거릴 뿐더는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라울은 문득 한숨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두 아이를 모두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그는 문득 오랜만에 시가가 생각나 케이스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시가를 피운 게 꽤나 오래전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테레제가 집에 없으니 시가를 피울 일도 없었다.

어쩐지 헛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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