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강의는 <연금술>이었다.
“재료와 마력의 비율은 반드시 1:1이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비율을 틀리면 몽땅 버려야 하니 집중하도록!”
연금술을 가르치는 교수는 친절하게도 칠판에 설명을 꼼꼼히 적어주었다.
이걸 보고도 해내지 못하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나는 테이블에 놓인 재료에 마력을 입혀 순서대로 다지고 끓였다.
퐁당퐁당!
와르르!
냄비에 재료를 쏟아 넣고 있을 때 갑자기 교수님이 내게 득달같이 달려와 성을 냈다.
“어허! 그렇게 한꺼번에 재료를 넣는 건 좀 더 실력이 숙달된 뒤……, 어?”
“네?”
그는 내 냄비에 든 시약이 황금빛을 뿜어내는 걸 보며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다들 여기로 와서 테레제의 시약을 확인해라.”
‘왜지? 뭔가 문제가 있나?’
내가 멍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있으니 교수님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아주 잘 만든 시약이다.”
<변환 마법> 강의의 여파일까?
내 입에서 차분한 아첨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교수님께서 칠판에 써주신 대로 하니 결과물이 잘 나왔습니다.”
“……커흠! 그렇지. 필기도 했니?”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기하라고 칠판에 써주신 거 아닌가요?”
“크흐흠. 다른 녀석들은 암만 설명해줘도 쥐색 독극물이나 만들어내던데.”
내가 만든 시약을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교수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칭찬받아봤자 시샘하는 사람만 늘 텐데.’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독립적이고 고집 세고 저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다.
특히 발할라 학생들은 자신들이 매우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다.
‘테레제가 바로 그 선민사상에 절어있는 대표주자니까.’
나는 겸양한 태도로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원래 만들기라면 뭐든 젬병이었는데 이상하게 잘 되네.’
뭐. 설명이 정확했으니 정확한 결과가 나왔겠거니 여겼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오늘은 왈츠를 연습할 겁니다. 두 사람씩 짝을 이루세요.”
발할라에서는 마법뿐만이 아니라 교양도 가르쳤다.
귀족들에게는 마법도 중요하지만, 무도회에서 선보일 최신 사교댄스, 최신 예법, 외국어 구사 능력도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캐릭터를 육성할 때 마법만 선택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바람에 나 역시도 교양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만 했다.
‘큰일 났다. 나 춤출 줄 모르는데.’
애석하게도 춤 실력은 초급 예법처럼 자동 보정 기능이 없었다.
그때 오랜만에 상점이 활성화되었다.
띠링!
[상점에 입고된 상품이 있습니다.]
이건 춤 실력을 보정 하는 스킬이 입고됐다는 뜻이 분명했다.
▼
[상점]
▹소원권 [1,000,000,000코인]
: 어떤 소원이든 1회 들어준다.
▹중급 댄싱 [39,800코인]
: 어딜 가도 흠 잡히지 않을 수준의 무난한 춤 실력을 선보일 수 있다.
▹댄싱 머신 [150,000코인]
: 전설의 무희가 될 수 있다.
▲
띠링!
[성좌 ‘나만 아니면 돼’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댄싱 머신? 이건 못 참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중급 댄싱]을 골랐다.
댄싱 머신이라니, 누굴 호구로 아나.
띠링!
[성좌 ‘나만 아니면 돼’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안 속네…]
2000년대 예능 오프닝 무대도 아니고 대체 댄싱 머신이 왜 필요하겠는가.
‘겸사겸사 후원금이 얼마나 쌓였는지 볼까?’
[후원금: 527,600코인]
후원금은 예상보다 훨씬 많이 쌓여 있었다.
‘뭐야. 언제 이만큼이나 쌓였지?’
그렇다고 해서 댄싱 머신 따위를 살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적절한 때마다 상점에 필요한 아이템이 입고되어주어서 무사히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사교댄스를 가르친 교수님이 미심쩍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동작을 하나도 틀리지 않았군요.”
테레제에게 멍청하다는 설정 외의 디테일은 크게 잡아놓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춤 동작도 잘 외우지 못하는 수준이었나보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캐릭터 붕괴를 수습했다.
“교수님의 훌륭한 가르침 덕에 마침내 동작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교수님은 공손해진 테레제의 태도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내심 좋은 모양인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무도회의 꽃이 된 귀족 중 교수님께 댄스 수업을 듣지 않은 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의 가르침이니 제 부족한 실력도 발전한 모양입니다.”
내 과장되지 않은 담백한 말투의 아첨이 꽤 진정성 있게 들렸는지 교수님의 표정에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무리 개망나니라지만 그냥 귀족 영애도 아니고 무려 공녀의 말이었다.
신분이 주는 말의 무게는 황금보다 무거웠다.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혹시 전생에 간신이었음? 왜 이렇게 아부를 잘함?]
…내가 그랬나?
‘딱히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는데.’
강의 내용은 다 흥미롭고 좋았다.
이해하기도 쉬워서 내가 과연 4학년 커리큘럼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부는 내가 가장 못 하는 거였다.
‘정말로 잘했다면 지우로 살 때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버리고는 짐을 챙겨 1층 도서관으로 향했다.
일리야 교수가 준 책도 읽어야 했고, 거기가 마음도 편했다.
공간이 워낙 넓어서 가뜩이나 이용자 수도 많지 않은데, 더더욱 인지되지 않을 정도였거든.
여차하면 개인 열람실에 들어가 세상과 단절되어있을 수도 있고.
‘오늘은 개인 열람실로 들어가야겠다.’
개인 열람실은 창이 없어 바깥의 조경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마음만큼은 가장 편안했다.
나는 개인 열람실에 들어와 책상에 짐을 놓았다.
“흐음…….”
이상하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갑갑한 기분이지?
그 순간, 뇌리로 데미안의 목소리가 스쳤다.
“앞으로 숨을 거라면 이런 곳은 고르지 않는 게 좋겠어.”
“금방 들킬 테니까.”
“아…… 진짜.”
나는 마른 손으로 피로해진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매만진 자리에서 열이 오르는 걸 보니 창백한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여긴 괜찮아. 데미안은 1층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으니까.’
…정말로 그랬던가?
내가 아니라 다른 개발자가 그런 설정을 추가했다면, 그래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개인 열람실 안에 있는 게 불편하고 거북해졌다.
여기는 안전하지 않았다.
‘아니. 어딜 가더라도 난 안전하지 못해.’
늘어 붙은 검은 기름처럼 끈적한 생각들이 나를 헤집었다.
‘붉은 하트가 하나일 때 남주들의 행동 패턴이 어땠었지?’
‘어떻게 하면 호감도가 올랐더라?’
‘멍청하긴. 내가 여기서 남들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어?’
‘당장 뭐라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신지우처럼.’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여기서 당장 나가고 싶어!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 과호흡이 온 모양이었다.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인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받쳐 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천천히 숨을 쉬세요. 시간을 멈췄으니까.”
검붉은색에 가까운 원목 탁자를 짚고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억지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뺨을 쓸었다.
“벌써 망가져선 안 됩니다, 테레제 양. 아시겠습니까?”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뺨을 쓸어주는 손을 간절하게 붙들었다.
손은 따뜻하고 커다래서 내 얼굴을 모두 묻어버릴 수 있었다.
“…….”
그러자 내게 속살거리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전해진 것이다.
“흐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기색이 어린 침음이 들려왔다.
“이런 건 재미 없군요.”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린 후.
.
.
.
“……나 왜 엎드려 있었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테이블에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개인 열람실에 들어온 직후부터 기억이 깨끗하게 증발해 있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는데, 깜빡 졸았나?’
조금 이상한 건, 여느 때처럼 내가 잠든 사이 저들끼리 떠드는 후원 알림창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에 미간을 찡그리다 짐을 챙겨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개인 열람실을 이용할 기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