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다!’
클라이드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다급하게 조부를 불렀다.
“이사장님!”
그러나 그건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퀘스트는 완료되었다고.
나는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학생회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군.”
우리가 사이좋은 조손 지간 마냥 하하 호호 웃고 있으니 클라이드는 세상 가장 멍청한 걸 쳐다보듯 날 보았다.
‘지금 이사장님이 칭찬하고 웃어준다고 진짜로 널 탐탁하게 여기는 줄 알아?’라고 묻는 눈이었다.
당연히 아님을 안다.
사실 클라이드보다 테레제를 더 멍청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이사장이었으니까.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쟤 뭔데 우리 애 띠껍게 보냐?]
지난 일주일간, 방송에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나를 지칭하는 닉네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거라.”
이사장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에게나 할법한 조언을 남기더니 학생회실을 나갔다.
클라이드는 제 조부가 사라지자마자 날 비웃었다.
“네 멍청함은 매번 날 놀라게 해. 사람은 맞는가 싶어서.”
누가 얘 모델링을 했지? 누가 이렇게 싸가지 없게 만들었어?
나는 적당히 사람 좋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으응. 그러게. 내가 더 멍청했다면 네 마법도 파훼하지 못했을 텐데.”
“……뭐?”
“……응?”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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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안쪽으로 쏙 말아 넣었다.
‘미쳤나 봐. 아무리 열받는다고 해도 말대꾸할 상대가 따로 있지!’
클라이드는 미간을 와락 찡그린 채 내 발언을 곱씹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빈정거림이 맞는데 테레제가 저에게 그럴 리 없으니 혼동이 오는 듯했다.
“방금 무슨 뜻이지? 설마 내 마법을 겨우 한 번 뚫었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나는 힘에 굴복할 줄 알았다.
목숨은 귀하고 아까운 것이고 난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이 많았다.
생에 미련이 철철 넘친다고.
‘내 안의 청개구리 기질이 또 날뛰기 전에 후퇴하자.’
“나 강의가 있어서 가봐야겠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안녕!”
그렇게 재빠른 속도로 학생회실을 나와 강의실로 향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은 경쾌했다가 점점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해졌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자세로 성큼성큼 내 뒤를 따라오는 클라이드 때문이었다.
주변을 스치는 학생들은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원래라면 내가 졸졸 따라붙어야 하는데 포지션이 반대로 되어있어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멀리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클예부 회원까지 보였다.
‘이러다 따라잡히겠어.’
맹수에게 쫓기는 사냥감처럼 뒤를 힐끗거리며 달리는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쿵!
이래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은 앞을 잘 보고 다녀야 한다.
나는 무언가와 정통으로 몸을 부딪쳤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으악!”
탁!
다행히도 바닥에 엎어지기 전에 앞에서는 데미안이 허리를, 뒤에서는 클라이드가 등을 받쳐주었다.
얼결에 샌드위치처럼 두 남자 주인공 사이에 끼어버렸다.
굉장히 좋지 않은 형국이었다.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누군가에게는 도파민이 폭발할 장면이었던 듯하지만.
[성좌들이 다수의 남자 주인공이 동시에 등장하자 귀추를 주목합니다.]
비단 ‘로맨스패스’ 성좌만이 아니라 다른 성좌들에게도 지금의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한 듯했다.
내가 사과의 말을 꺼내기도 전, 데미안이 웃었다.
“벌써 세 번째로 부딪치네, 우리.”
“번번이 미안…. 내가 좀 부주의한가 봐.”
실제로 내 별명 중 하나가 경주마였다. 시야가 좁아서 생긴 별명이다.
데미안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아냐. 네가 다치지 않으면 됐어.”
나는 습관처럼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붉은색이 마치 상승주처럼 상태창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역시 붉은 하트를 품은 애는 인품이 달라. 천사 같잖아.’
내가 감격하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똑바로 좀 서지?”
나는 뒤로 나동그라질 뻔한 탓에 클라이드의 품에 거의 안겨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의 지적에 그제야 상체를 똑바로 일으키며 머쓱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붙잡아줘서 고마워.”
클라이드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붙잡아준 게 아니라 막은 거야. 네가 바닥을 뒹굴며 내 앞길을 막지 않도록. 따라서 네가 할 말은 감사가 아니라 사과지.”
그러고는 불결한 게 묻은 사람처럼 손을 툭툭 털기까지 했다.
“…어, 미안.”
그리고 클라이드는 돌연 내 손에 들린 신청서를 휙 낚아채 갔다.
“이사장님의 명으로 학생회에 가입됐어도 신청서는 내야 하지 않겠어?”
나는 클라이드에게 보이지 않게 치맛자락 뒤로 숨긴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너 잘났다, 그래.’
그때 잠자코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테레제, 학생회에 가입했어?”
“응. 학생회에 가입하면 가산점을 많이 주잖아. 4학년은 중요한 시기니까.”
데미안은 순간적으로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잘됐다. 더 자주 볼 수 있겠네.”
글쎄.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부 활동을 같이하는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데.
“으응. 그러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라이드는 인사도 없이 휙 지나갔다.
하나, 그가 들어간 강의실은 나도 들어가야 하는 강의실이었다.
‘아아. 왜 따라오나 했더니, 우리 전공이 같았지…….’
우울한 자각이었다.
“어엇, 테레제 니임~!”
그사이 클예부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너무 꾸물거린 모양이다. 얼른 강의실로 도망쳐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데미안에게 2배속으로 재생한 듯한 속도로 손을 흔들며 다급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렇게 강의실 문을 벌컥 열어 쏙 들어갔을 때였다.
“학생회라…….”
강의실 문이 닫히기 전, 데미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닫히는 중인 문틈 새로 그의 서늘한 옆모습이 가느다랗게 보였다.
“――――”
끼이이― 탁.
문이 닫혔다.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재밌겠네.”
무슨 뜻일까,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