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모사는 완전히 뒤통수 맞은 얼굴로 입술을 떡 벌렸다.
내 뜻밖의 발언을 들은 학생들도, 리비도 전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왜 데미안의 연구실을 가?!”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 연지 나도 있다고.”
“너 지금 입술 분홍빛이거든? 연지색은 짙은 빨강이야!”
나는 뻔뻔스럽게 거짓말했다.
“그야 지워졌으니까. 새로 덧칠을 안 했거든.”
미모사는 씨근덕거리며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모사 네가 커피잔을 발견했을 때 시간이 언제쯤인지 기억해?”
내 질문에 미모사는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9시 30분쯤 됐겠지. 그 전에 마차에서 내렸으니까.”
“나와 데미안은 9시쯤 기숙사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만났고 그대로 연구실을 가서 커피를 마셨지. 참, 나 기숙사에 사는 건 알지?”
미모사의 뚱한 표정을 보니 내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내가 논리적으로 정황을 풀어나가기 시작하자 저마다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경청했다.
나는 리비를 돌아보았다.
“리비. 넌 오늘 몇 시에 도착했니?”
“아마 10시쯤이었을 거예요.”
그렇지. 그게 리비에게 설정된 등교 시간이거든.
‘데미안을 만나려면 일부러 일찍 등교해야 한다고.’
그때는 ‘특별 행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보통 이런 게임에서 특정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 작업을 할 때는 하루에 한 번 누군가를 볼 수 있는 이용권을 쓴다든가 스태미나 게이지가 닳는다든가 하거든.
[성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냅니다.]
내 귓가에는 쉴 새 없는 알림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나 지금은 후원창을 볼 타이밍이 아니었다.
웅성웅성!
“뭐야? 그럼 시간이 안 맞잖아?”
미모사는 궁지에 몰리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건 쟤 주장일 뿐이야!”
“마차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는 기록부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어.”
“이익…….”
나는 친절하게 제안했다.
“어때, 같이 확인하러 갈래?”
미모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게임 끝났네.’
미모사도 본인이 졌다는 걸 깨달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나는 기꺼이 미모사가 먼저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하는 말을 내뱉길 기다려주었다.
‘생떼는 쓰지만, 억지만 부리는 캐릭터는 아니니까.’
지금 잠시 사랑에 미쳐서 그렇지 미모사는 황족의 피가 흐르는 공녀인 만큼 사리 분별을 아주 못하지는 않았다.
미모사는 몹시 분한 얼굴로 시인했다.
“……내 실수를 인정하겠어. 리비 스콰이어, 멋대로 의심해서 미안하게 됐어. 오늘 일은 정식으로 사과문을 써서 게시판에 붙일게.”
띠링!
[퀘스트: 미모사에게 사과받기 완료]
▸보상: 데미안 회원 수 하락, 클예부 회원 수 증가
‘…이딴 게 어떻게 보상이야?’
인제 보니 보상이 형편없어서 표시를 안 해준 게 분명했다.
“그런데 테레제.”
퀘스트는 끝났지만 나와 미모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데미안이랑은 왜 같이 연구실에 있었던 거야?”
미모사는 흥분해 날뛰는 미친 망아지 같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차갑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성적이기는 무슨. 눈이 돌아있네.’
보석처럼 예쁜 연보라색 눈동자에 똑바로 해명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반드시 이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지.
…내심 나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나는 외려 이런 질문을 하는 미모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데미안은 무려 발할라의 부학생회장이 되는 성과를 거뒀어. 스콰이어 장학재단의 이사인 내가 독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물론 원작에서는 단 한 번도 독대하지 않았다.
테레제는 스콰이어의 직계 혈족으로서 유의미한 실권을 가진 게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치 있는 게 바로 스콰이어 장학재단인데 이조차 똑바로 운영하지 않고 남들에게 죄다 맡겨버렸다.
운영에 참견하는 건 데미안에게 불이익을 줄 때뿐이었다.
미모사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늘 우리 데미안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네가 독대할 이유가 뭔데?”
나는 잠깐 심호흡했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이벤트’가 시작될 테니까.
“내 호위 마법사로 데미안 웨스트를 선발할 거야.”
“…!”
이건 원래 <신의 유희>에서 플레이어가 데미안의 붉은 하트를 2개 채웠을 때 테레제가 일으키는 이벤트였다.
데미안은 원래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낸 장학생이었고 테레제의 방해만 없었다면 진작 가문의 호위가 되어 가신이 되었을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는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을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지만…….’
호위가 암살자라니. 나를 지킬 사람인지 죽일 사람인지 모를 일이잖아.
미모사는 몹시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황족이고 공녀라도 남의 가문 장학생을 호위로 삼겠다는 일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이해했냐는 듯이 빙긋 미소 짓고는 리비를 향해 고개 돌렸다.
“가자, 리비.”
“네!”
리비의 대답이 유난히 활기찼다.
* * *
미모사와의 대치 이후는 평화롭게 흘러갔다.
일리야 교수가 준 책도 무사히 다 읽었고 잔느레 공방 연지는 버리려다가 그냥 두었다.
어차피 데미안의 연구실에 간 게 나라고 밝혔는데 버릴 거까지야 있을까?
뜻밖이었던 건 그날 저녁에 데미안이 기숙사까지 날 찾아온 일이었다.
“안녕, 테레제.”
나는 안녕하지 못한 표정으로 당혹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너 이 시간에 여자 기숙사 찾아오는 거 교칙 위반인 건 알지?”
“알아. 그래서 안 들키게 왔는데.”
‘나 잘했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혈압이 치솟았다.
‘그야 당연히 안 들켰겠지. 너 암살자잖아.’
“……그래? 다행이네.”
데미안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 들었어. 네 호위로 날 발탁할 거라고 말했다던데, 사실이야?”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늦은 감이 있지만 너만 괜찮다면 정식으로 계약하려고.”
이는 데미안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대귀족 가문의 가신이 된다는 건 평민인 데미안에게 준귀족 대우를 약속하는 것과 같으니.
데미안은 귀족가에 자연스럽게 침투할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내 제안을 기꺼워할 것이다.
역시나 데미안은 쾌히 승낙했다.
“할게. 네 호위.”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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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결혼도 해봐]
나는 후원창은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가문에 말해놓을게.”
이제 용건도 끝났으니 이만 가보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데미안이 돌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을 쥐었다.
자신이 지키게 된 레이디에게 예를 표하는 의식을 치르려는 듯했다.
다만 이건 정식으로 호위에 임명되지 않은 지금은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발탁된 게 아니니까 이런 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미안이 손등에 입 맞췄다.
입술 표면만 살갗에 간신히 닿는, 아주 가볍고 간지러운 감촉이 짧은 순간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끄응. 암살자가 왜 이렇게 맑게 웃는 거냐고…….
데미안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램프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만 가볼게. 잘 자, 테레제.”
미소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단지 램프의 불빛으로 인한 게 아닌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응. 너도.”
내 인사에 데미안이 화답하듯 눈웃음 짓고는 뒤돌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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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캐릭터 호감도 확인해보자; 떡상 냄새나는데?]
나도 묘한 느낌을 받았기에 곧장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어라? 언제 붉은 하트로 바뀐 거지?’
오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검은 하트였는데 그 생각을 뒤집을 만큼 내가 뭔가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원작에서도 결정적인 사건만 있다면 검은 하트가 단숨에 붉은 하트로, 혹은 그 반대로 바뀌는 게 가능하기는 했다.
진행 중 선택지 대답이 떴을 때 잘 고르거나, 주요 이벤트를 잘 해결하는 등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변화가 너무 즉각적이고 빨라.’
게임이 아니니까 당연한 건가.
호감도를 볼 수 있지만, 저 애는 AI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
조금 무섭고 막막해졌다.
캐릭터들에게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미련 없이 낙원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