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이 BJ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대답했다.
“도서관이요. 거기만큼 학생들을 피해 도망치기 좋은 장소가 없거든요.”
<신의 유희>의 마법사들은 철저하게 이론보다 실전을 중요시했다.
그래야 도서관에 사람이 없을 테니까.
클라이드의 도피처이자 플레이어와의 간질간질한 서사를 쌓을 장소로 만들어야 하기에 넣은 극단적인 설정이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발할라의 모든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이용자가 많은 곳은 1층 도서관이었다.
크기도 가장 큰 메인 도서관이었고 외부인의 방문도 받았다.
어쨌든 과제 때문에라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
‘클라이드는 절대 가지 않는 도서관이지.’
게다가 1층 도서관은 개인 열람실도 존재해서 신청만 하면 곧바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내가 노리는 게 바로 개인 열람실이었다.
클예부 회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기서 일리야 교수가 빌려준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나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로비는 항상 많은 사람이 다녔고 지금도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라리 이런 데가 안전해.’
루미오가 날 뒤쫓아온다고 해도 여기서는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금방 따돌릴 수 있을 테니까.
시장통 같은 로비의 장점은 또 있었다.
바로, 중얼거림이 주변 소음에 묻힌다는 것.
“다들 제 말 들리죠?”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암기하느라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아까 루미오라고 불렀던 영애는 ‘악마 계약자’예요. 아. 아직은 예비 계약자라고 불러야겠네요.”
[성좌들이 악마 계약자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합니다.]
“인간이 악마와 계약하는 이유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잖아요? <신의 유희>에서도 마찬가지죠.”
띠링!
[성좌 ‘명탐정’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루미오는 기이할 정도로 테레제를 선망하고 있으며 클라이드와 이어지길 바라는 걸로 보임. 그와 관련된 소원을 빌 것으로 추정.]
“정확해요.”
루미오는 테레제와 성격이 정반대다.
그녀는 매사에 당당하다 못해 무례한 테레제를 몹시 동경했다.
그것을 공녀라는 신분에 걸맞은 기품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건강하고 아름답고 당찬 테레제와 차갑고 무심한 클라이드.
루미오는 테레제라는 캐릭터를 멋대로 재해석하여 자신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인 클라이드의 짝으로 이어지는 망상을 즐겨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두고 둘이 사귀는 망상을 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면 된다.
[성좌들이 악마 계약자가 악마를 소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합니다.]
“그건…….”
‘말로 설명하려면 길고 지루할 거 같은데.’
어차피 시나리오상 반드시 겪게 될 일이었으니 그때 가서 직접 보는 쪽이 훨씬 생생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즈월드도 너무 많은 걸 설명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그건 직접 보시는 쪽이 이해가 빠를 거예요.”
[성좌들이 BJ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되려나.’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더니 피곤했다.
잠이 부족해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도 1층 도서관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긴 해.’
어떤 종류의 마법서가 있을지도 궁금해져 도서관으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때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지? 네가 오늘 아침에 데미안의 연구실에 기어들어 간 애지?!”
‘…아는 목소리인데?’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불같이 화내고 있는 사람은 미모사였다.
“아니라고 벌써 네 번째 말씀드렸어요, 선배님.”
맞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하고 있는 건 리비였다.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뭐야. 쟤들이 왜 같이 있어?’
미모사는 분홍빛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덕분에 이 시끄러운 로비에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커피잔에 있던 연지 색깔은 얼마 전 출시된 잔느레 공방 한정판이라고. 지금 네 입술 색 말이야!”
“한정판이 하나를 뜻하지는 않잖아요.”
“10개 한정판이거든?!”
…그런 거였다니. 기숙사로 돌아가면 화장품을 버려야겠다.
아무튼.
‘리비가 하필이면 오늘 나랑 같은 연지를 써서 미모사에게 의심받은 모양이네.’
저걸 두고 나 몰라라 하며 도서관으로 튀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내가 수습해야지.’
나는 짤막한 한숨을 내쉰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한정판은 나도 있어, 미모사.”
“언니…!”
리비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날 보았고 미모사는 짜증스러워했다.
“지금 네 동생 편들러 왔니? 네가 언제부터 그런 애였다고!”
테레제가 그런 캐릭터는 아니긴 하지.
내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미모사는 나와 리비를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알겠네. 너 일부러 동생 시켜서 데미안에게 접근하게 했니?”
급기야 미모사는 리비를 클예부의 프락치 취급하고 있었다.
‘접근시켜서 얻을 게 뭐가 있…기는 있지. 리비와 데미안이 이어진다면 테레제가 경계하고 싫어하는 대상을 감시하기 편할 테니.’
원작 테레제였다면 그런 고단수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테지만, 흥분한 미모사는 테레제를 높게 평가해준 모양이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나는 마음껏 뇌내망상을 펼치는 중인 미모사는 그대로 두고 리비를 쳐다보며 손을 뻗었다.
“리비, 이리로 와.”
“…네!”
말도 안 되는 생떼에 반응해주면 더 피곤해지기 마련.
내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온 리비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띠링!
[퀘스트: 미모사에게 사과받기]
▸보상: ???
▸실패: 데미사의 보복으로 인한 퇴교 조치
…이 퀘스트 창이 뜨기 전까지는.
‘진짜 별걸 다 퀘스트로 띄우네.’
게다가 보상 부분은 왜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래도 없는 의욕이 수직 낙하했다.
‘자존심으로 테레제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미모사한테 사과받으라니.’
미모사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명분 싸움에 밀려서 억지로 사과하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말싸움 같은 소모적인 일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지만…….
“미모사 넌 생사람을 참 잘 잡는구나.”
미모사는 잠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잘한다니까 칭찬 같은데 왜 기분이 더럽지?’라고 의아해하는 표정이 점차 악귀처럼 변했다.
마침내 내 말뜻을 이해한 미모사가 매우 분개했다.
“감히 날 놀려?!”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미모사 보면 볼수록 비리로 명문대 입학한 고위 관직 자녀 같다;]
띠링!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히려 좋아]
놀랍게도 저런 미모사보다 성적이 더 낮은 게 테레제였다.
<신의 유희>가 출시됐으면 분명 악역들이 왜 이렇게 멍청하냐는 소리가 나왔겠는걸…….
웅성웅성!
“또 클예부랑 데미사 싸움이야?”
“엇! 저기 쟤 이번 신입생 대표잖아? 설마 괴롭힘당하는 중인 건가?”
소란이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구경꾼이 늘어났다.
많은 시선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몹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다 클예부가 몰려들겠는데.’
그들을 피해 도망쳐 온 건데 클예부와 데미사까지 여기로 모여들면 말짱 도루묵인 셈이었다.
속전속결로 이 언쟁을 끝내버릴 방법이 있긴 했다.
데미안의 연구실에 들어간 사람이 나라고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데미사의 공격을 받는 게 내가 되겠지. 클예부도 내 변심을 의심하게 될 거고.’
가장 문제는 루미오였다.
루미오는 내가 클라이드에서 데미안으로 갈아탔다고 생각하고 악마를 소환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모든 문제를 피해 갈 변명거리가 있긴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을 쓰면 데미안이랑 사적으로 엮이게 되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나는 턱을 들어 올리며 미모사를 한껏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비가 데미안의 연구실에 들어간 거 확신해?”
“당연하지! 이 학교에서 잔느레 공방의 연지를 바른 애가 쟤밖에 없는데!”
“정말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도 리비라는 거지? 네 명예를 걸고?”
내가 세게 나가자 미모사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주춤했다.
그러나 자존심상 이대로 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는지 더 오기에 찬 표정으로 강짜를 부렸다.
“그래! 모든 걸 다 걸 수 있어!”
미모사의 선언을 들은 학생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졌다.
이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번복할 수 없는 완벽한 정황이 만들어졌으니 나는 여기다 쐐기를 박았다.
“그럼 내기하자.”
“…내기?”
내기라는 말까지 나오자 미모사는 일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인지 기세가 꺾였다.
하나, 이대로 물러나면 곤란하지.
“오늘 데미안의 연구실에 들어간 사람이 리비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사죄문을 작성해서 게시판에 붙여.”
나는 오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틀렸다면 나 역시 사죄문을 게시판에 붙일 테니.”
미모사는 선뜻 수락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신 없으면 당장 내 동생한테 사죄하든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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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부사는 이긴 게임에 판 돈을 거는 법이지]
나는 압박감을 주려고 미모사에게 바짝 다가섰다.
“저, 저리 안 비켜?!”
우리는 제법 체격 차이가 있었다.
미모사는 평균 신장보다 훨씬 작았고 테레제는 평균보다 조금 더 컸기 때문이다.
“빨리 선택해.”
내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주관식의 대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양자택일이었다.
‘또한 그 두 선택지 다 내게 유리해야 하고.’
이 방법은 상대가 경솔할수록, 그리고 여유가 없는 상황일수록 잘 먹혔다.
깊게 생각하지 못하니 내가 내민 선택지 중에서 고르게 되거든.
‘동생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맞춰주며 어르고 달래느라 터득한 요령이지. 비록 녀석들의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통하지 않았지만.’
“어서!”
한 번 더 몰아붙이니 미모사는 어떻게든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빽 소리쳤다.
“그, 그러든가!”
걸려들었군.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월척]
나는 미모사에게 안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데미안의 연구실에 간 사람은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