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네…….”
[성좌들이 BJ의 생각을 궁금해합니다.]
“일리야 교수의 집무실은 데미안의 개인 연구실처럼 호감도를 채워야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어제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지만, 오늘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대체 어디서 날 좋게 본 거지?’
과제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에 점수를 준 건가?
하긴. 그는 어쨌든 교수 신분이니까 이런 점을 좋게 볼 수도 있을 듯했다.
뛰어난 학업 성취는 일리야 교수를 공략하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대악마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다니 든든…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쁘진 않아.’
나는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어 치우며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건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배가 부르면 졸린 법이었고 소파는 지나치게 안락하고 푹신했으며 책의 내용은 너무 어려웠거든.
눈꺼풀은 저절로 무거워져 느리게 감겼다 떠지길 반복했고 이미 정신은 온통 혼몽해서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가 고꾸라지기 전에 화들짝 자세를 바로 하기 일쑤였다.
“흐아암-”
오전에 마신 커피가 나를 비웃듯 하품이 늘어지게 흘러나왔다.
나는 고인 눈물을 닦을 기력도 없어 잠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무겁게 지끈거렸던 머리가 어쩐지 맑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제대로 쉬면 기력이 회복되겠지. 졸음도 어느 정도 가실 거고.’
…라고 합리화하며 잠깐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게 대부분이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린 채.
이내 의식이 수마에 잠겨 들었다.
* * *
달칵.
새근새근, 고요한 숨소리만 나직하게 깔리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곧고 길쭉한 실루엣의 학생이 들어왔다.
날카로운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듯 불필요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외모의 남자.
클라이드였다.
그는 주변 따위는 훑지 않는 무심한 시선으로 정면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투명한 물빛을 닮은 시린 벽안이 대각선 아래를 꿰뚫듯 매끄럽게 내리깔렸다.
소파에 기대어 곤히 잠든 테레제가 보였다.
“…….”
하필이면.
클라이드는 그대로 돌아나가려다 멈칫했다.
‘내가 왜 자리를 피해야 하지?’
그것도 클예부라는 웃기지도 않은 사교 클럽이나 만든 한심한 여자를, 자신이 왜?
그는 오기가 섞인 발걸음으로 일리야 교수의 테이블까지 다가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았다.
학생회 가입 신청서였다.
아까 전, 일리야 교수가 난데없이 자신을 찾더니 학생회 가입 신청서를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그는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요청이었다.
클라이드는 미심쩍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여전히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테레제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테레제 때문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클라이드는 자신의 추측을 비웃었다.
테레제는 몹시 이기적이고 비겁한 인간이었다.
본인이 위험해질 수 있는 마수 토벌이나 악마 사냥을 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희생? 그것은 가장 테레제답지 않은 짓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
클라이드는 치미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으며 테레제를 싸늘하게 노려보다 걸음을 돌렸다.
할 일을 끝냈으니 나가볼 생각이었다.
툭.
그때 테레제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려있던 책이 기어코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떨어진 책에 시선이 끌린 것은 본능이었다.
“고대의 주술?”
이건 3학년 때 공부했어야 할 마법서였다.
클라이드는 그제야 테이블에 놓인 책 두 권도 발견했다.
그것들 역시 진작 공부를 마쳤어야 할 것들이었다.
졸업에 대한 걱정이 생겨서 뒤늦게라도 공부에 매진하려는 건가?
‘불가능할 텐데.’
테레제의 학업 성취도가 낮은 이유는 멍청하기 때문이었다.
불성실보다도 타고난 재능의 문제였기에 애쓴다고 해봤자 졸업은 못 할 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테레제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 응. 4학년이니까. 올해는 학업에 열중해볼까 하고….”
마냥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던 건가.
클라이드는 느릿한 동작으로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테이블에 툭 던져놓고는 잠든 테레제를 응시했다.
“어이가 없군.”
교수의 집무실에서 쿨쿨 자다니.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조리 상식 밖이었다.
가장 상식 밖이었던 건 다름 아닌 어제의 발언이었다.
“날 숙명처럼 사랑한다고?”
이 빌어먹을 껍데기에 취해 본질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추종하는 어리석은 인간 주제에.
차라리 그건 이해했다.
클라이드의 외형은 어떤 인간이라도 한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수려했으니.
이는 인간을 유혹해 타락시키기 위한 몽마의 피가 흐르는 영향이었다.
다만 감이 좋은 인간들은 클라이드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성유물로 마기를 완벽히 잠재우고는 있으나 천적에 대한 오싹한 위기 본능을 느낀 탓이었다.
이를테면 미모사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황족의 피가 흘러서인지 이런 쪽으로 유독 민감하니까.’
그에 비하면 테레제는 제게서 어떤 위험도 느끼지 못했다.
스콰이어 혈족 특성 때문이리라.
명문가 중에서도 특별한 가문 몇몇은 특이한 특징을 타고났다.
로드리고 황가의 악을 감지하는 능력이 그러했고 스콰이어 공작가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마기 면역력이 그러했다.
그러니 그딴 태평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였다.
‘네가 로드리고 황가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더라도 날 숙명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네가 정녕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웃기지도 않았다.
“역겨워.”
[호감도: ♥♥♥♡♡]
클라이드는 몹시 불쾌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만일 테레제가 학생회에 가입하려 든다면 떨어뜨려 버릴 것이다.
* * *
사락.
이건 틀림없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다.
잠결이라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지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소리기도 했으니까.
지끈거리던 머리가 어쩐지 조금 맑아졌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여전히 잠이 들러붙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열었다.
시야는 지저분하게 차오른 후원창으로 일부가 가려져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후원창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을 향했고, 눈에 익은 검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일리야 교수가 내 맞은편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설마 나 여기서 잠든 거야?’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지금 내 머리는 소파 팔걸이에 편안히 안착해 있었으니까.
그때 일리야 교수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깼으면 일어나지.”
“…넵!”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리야 교수는 그런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몸을 바로 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앉아.”
“…네.”
‘그럼 그렇게 말해줄 것이지.’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일리야 교수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 한 장을 내게 쭉 내밀었다.
“네 거다.”
‘내 거?’
서류는 학생회 가입 신청서였다.
심지어 일리야 교수의 친필 사인이 미리 기입 되어있었다.
교수 추천으로 학생회에 가입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은 가정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일리야 교수는 태연자약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가입할 생각이라면 작성해서 내게 제출해라. 전달할 테니.”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이만 강의실로 가지.”
나는 황급히 서류와 책을 가방에 챙겨 넣고 이미 집무실을 나서는 중인 일리야 교수를 뒤따랐다.
그는 코트 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걸음이 빨랐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은 나는 몹시 바쁘게 걸음을 놀려야 했다.
성큼성큼. 졸졸졸졸.
성큼성큼. 졸졸졸졸.
…마이웨이가 심한 주인과 산책하는 소형견이 된 기분인데?
2층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조금 찰 정도였다.
일리야 교수가 먼저 강의실로 들어가고 나도 곧장 뒤따라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어? 테레제 님!”
강의실 앞에 사람이 꽤 많다 싶더라니, 은나비 브로치를 단 영애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보나 마나 클라이드를 보러 온 거겠지.
“조금 늦으셨네요? 평소에는 훨씬 일찍 도착하셔서 클라이드 님을 일찍 뵙더니, 오늘은 교수님이랑 거의 동시에 오셨잖아요!”
“아, 으응. 강의 전에 깜빡 잠들어버려서.”
“어머? 어제 잠을 설치셨어요? 어쩐지 눈 밑이 조금 꺼져있더라니!”
그러자 다른 영애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클라이드 님이 근처에 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셨군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혹시 우연히라도 마주치지는 않으셨어요?”
순간적으로 어제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으나 겉으로는 담담하게 고개 저었다.
그런데도 영애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저들끼리 까르르 웃었다.
“아아, 저도 기숙사 신청할 걸 그랬나 봐요.”
“그 전에 전공부터 같았다면 이 강의실을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라.”
원래 뭐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지나간 선택이 아쉬운 법이었다.
‘지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안 할 거면서.’
나는 더 늦기 전에 얼른 강의실로 들어가야겠다 싶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시작할 시간이라 이만 들어 가볼게.”
그러자 영애들이 조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네에! 오늘도 힘내세요!”
삐약삐약 병아리 떼 같아서 어쩐지 귀여운 것도 같고…….
‘이렇게 귀엽다가도 클라이드와 관련되면 광인처럼 돌변한다는 게 더 무섭네.’
이래서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말이 있는 건가?
나는 어색하게 웃은 뒤 강의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