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식품을 기호에 맞게 먹겠다는데 아무렴 어때.
사실 뜨거운 커피를 우아하게 홀짝이고 있을 시간이 없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지?’
기숙사를 나섰을 때가 9시였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9시 20분이 되어 있었다.
‘곧 미모사가 등교할 시간인데.’
데미안의 개인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이었다.
다만 미모사에게 들키면 안 된다.
미모사가 데미안의 개인 연구실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확률로 일어난다.
그러나 자칫 방심했다가 미모사에게 들키는 순간 데미사의 괴롭힘으로 인해 게임 플레이 난도가 대폭 상승하게 된다.
‘내가 데미안의 연구실에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을 미모사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설마 데미안을 좋아하게 된 거냐고 오해하고 전쟁을 불사하거나, 데미안을 괴롭히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며 암살자를 고용하려 들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아무튼 어느 쪽으로든 사생결단이 일어날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건 곤란하지.’
나는 사망 루트를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어.”
“어, 벌써 가려고?”
데미안은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호감도를 몰랐다면 설마 얘가 날 좋아해서 붙드는 건가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전공 강의 전까지 다 읽어야 해서.”
미모사에게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나라고.
그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뭐지, 이 바람피우는 사람이나 할 것 같은 생각은?’
얼추 비슷한 상황은 맞지만, 영 떨떠름했다.
나는 가방과 책을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때, 계단 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뚜렷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걸려들었다.
미모사였다.
내 두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쟤가 왜 벌써 등장해?!’
[성좌들이 뜻밖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새 데미안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럼 같이 나가자. 나도 곧 강의가 있으니까.”
환장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그대로 다시 뒤돌아 데미안의 가슴팍을 밀며 도로 연구실에 들어갔다.
“테레제? …왜 그래?”
데미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뒤로 밀려나 주었다.
“숨어!”
“으응?”
“이럴 시간 없어. 지금 미모사가 오고 있다고!”
나는 최대한 작게 억누른 목소리로 소리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미모사.”
데미안은 그제야 내 반응을 이해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들린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여기 숨을 데 없어? 미모사가 절대 안 건드릴 만한 곳으로.”
고귀한 귀족이라면 손도 대기 싫을, 그러니까 창고 같은 곳이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똑똑똑똑똑.
“데미아안. 혹시 안에 있어어?”
간드러진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체감은 거의 학교 괴담이었다.
띠링!
[성좌 ‘물음표살인마’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거 호러물인가요?]
띠링!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ㄴㄴ 사랑과 전쟁임 ㅋㅋ 캬 간만에 피가 끓는다ㅏㅏㅏ]
‘숨을 데가 어디 없을… 저기다!’
연구실 구석에 위치한 비품 창고.
어떻게든 몸을 욱여넣으면 두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을 듯했다.
게임에서는 이런 식으로 숨는다는 선택지가 없었기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데미안을 끌고 비품 창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나 들어가도 될까아아? 오늘 내가 도시락 준다고 했는데 잊은 건 아니겠지이이?”
‘들어가! 빨리!’
나는 쓸데없이 커다란 데미안부터 창고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남은 틈으로 나도 들어갔다.
성인 남녀가 들어가 숨기에는 너무 비좁은 공간이었으나 지금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데미안과 바짝 엉겨 붙어 발까지 창고 안으로 쏙 집어넣은 뒤 곧장 문을 닫았다.
“나 들어갈게에에~”
벌컥!
미모사가 연구실을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고동이 전신을 울렸다.
나는 그제야 데미안과 밀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가운 빛이 우리 사이를 가르듯 세로로 문틈을 파고들었다.
상체는 내가 들고 들어온 책과 가방으로 간신히 가로막혀 있다지만, 다리는 교차하는 모양새로 지나치게 달라붙어 있었다.
데미안의 얼굴이 바로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아주아주 곤란해질 거리감이었다.
꼴깍.
어쩐지 마른침이 삼켜졌다.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은 야릇한 긴장감이 와장창 깨졌다.
덕분에 잔뜩 당황했던 마음도 찬물을 맞은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데미안은 굳이 숨을 필요가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미모사를 보고 당황해 무작정 데미안을 데리고 창고에 숨어버렸다.
‘아냐. 이게 낫지. 혹시라도 데미안이 내가 숨은 위치를 말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데미안에 대한 신뢰는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며 갑자기 창고를 나가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
나는 소리 나지 않게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책을 끌어안고 있지 않은 손으로 데미안의 재킷을 붙들었다.
고개를 들어 그에게 여기서 나가는 짓을 저질렀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적인 눈빛도 보내주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어둠에 잠겨 있는 데미안은 빛에 드러나 있을 때와 인상이 전혀 달라 보였다.
촛불처럼 예뻤던 황금빛 눈동자가 지금은 파충류처럼 섬뜩했다.
“룰루루~ …으응? 왜 커피잔이 두 개가 있지?”
움찔!
미모사의 말에 어깨를 떨자 데미안이 속삭였다.
“움직이면 들켜.”
끄덕끄덕.
그러자 데미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이 상황을 금세 받아들인 듯 아예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데미안의 두꺼운 육신과 등 뒤의 차가운 벽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있는 나를 고쳐 안았는데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과연 배드엔딩이 암살 길드 마스터인 주인공다운 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잔에 연지 자국이 있네? 같이 커피를 마신 게 여자였구나.”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발칙한 가문의 영애가 우리 순진한 데미안을 꼬드겼을까? 데미사가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
‘여기서 나가면 입술부터 지워야겠다.’
아니, 아예 입술에 칠할 화장품은 모조리 내다 버려야겠다.
“잡히기만 해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퇴학시켜 버릴 거야!”
미모사는 거세게 발을 구르며 연구실을 나가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나는 문틈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혹시 미모사가 나가는 척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게임 특유의 페이크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공포 게임에서 악령을 피해 옷장에 숨은 주인공의 심정인가?’
밖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슬슬 나가볼까.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나갈까?”
조금 멋쩍은 목소리로 묻자 데미안이 먼저 문을 열었다.
“먼저 나가, 테레제. 다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좁은 틈으로 몸을 억지로 끼워 넣었더니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품에 가방을 끌어안은 불안한 자세로 틈에 낀 몸을 빼내다가 넘어질 뻔했다.
그런 나를 데미안이 손쉽게 받쳐 안고는 아예 완력으로 몸을 밖으로 빼내 주었다.
“아, 고마워.”
“아냐. 나 때문에 이렇게 숨어야 했잖아.”
‘그건 그렇지. 아, 입술 닦아야겠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데미안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묘한 미소를 걸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테레제. 앞으로 숨을 거라면 이런 곳은 고르지 않는 게 좋겠어.”
“…….?”
입술을 문지르며 시선을 들어 올리니 데미안이 가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방 들킬 테니까.”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 새끼 쎄한데?]
성좌가 그렇게 느낀 것도 당연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말을 한 상대가 다름 아닌 전문 암살자였으니까.
물론 테레제라면 알아듣지 못하고 네가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냐고 바들바들 분개했겠지만.
나는 데미안의 조언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프로의 조언이잖은가.
“그래? 그럼 나중에 네가 어디에 숨는 게 좋은지 알려줘. 다음에는 거기에 숨지 뭐.”
그래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을 뿐인데, 데미안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그 말, 또 오겠다는 뜻이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데미안은 내가 아니라고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테레제. 나 궁금한 게 있어.”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뭔데. 뭘 물으려고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건데.’
나도 덩달아 진지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데미안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내가 싫지 않은 거야?”
이건 예상 밖의 전개인데.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 안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데미안의 황금빛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예리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면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