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클라이드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도서관에 남아 있는 게 재미있다고. 여기만큼은 죽어도 안 따라왔잖아?”
클라이드가 출몰하는 장소에 테레제가 몽땅 따라다니면 플레이어가 호감도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몇 군데는 빼고 무작위로 등장하도록 설정했는데, 그 몇 군데 중 하나가 도서관이었다.
“아… 응. 4학년이니까. 올해는 학업에 열중해볼까 하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참 말도 안 되는 변명처럼 들렸다.
클라이드도 똑같이 느낀 모양인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했다.
“네가?”
믿기지 않는 건 이해하는데 그렇게 대놓고 업신여길 것까지는 없지 않나…….
클라이드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테이블을 빙 둘러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단정하고 우아한 외모에 맞지 않게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내 앞에 서서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서 허리 숙였다.
크리스털을 깎아 만든 듯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흉포한 육체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긴장하고 싶지 않은데,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그도 그럴 게 클라이드라는 캐릭터는 조신한 외모에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졌거든.
‘개망나니 재벌 3세 캐릭터로 테레제와 용호상박이지.’
학원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싸가지 남자 주인공의 전형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나 할 거면 그냥 입 다무는 게 어때? 난 헛소리를 들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체질이라.”
‘아니, 근데 이 자식이 말을 심하게 하네?’
하지만 테레제가 쌓은 업보를 대신 감내할 의무가 생겨버린 가엾은 빙의자답게 얌전히 사과했다.
“그러니…? 미안….”
클라이드는 나를 상종 못 할 구제 불능 쓰레기처럼 쳐다보았다.
눈빛이 칼날이었다면 나는 이미 수백 번도 더 찔려 죽었을 거다.
그는 선심 쓰듯 제안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자퇴해. 그때는 사과를 받아줄 테니.”
<신의 유희>에 퇴학 기능이 존재하기는 했다.
말이 퇴학이지 그냥 게임 오버라는 뜻이었다.
자퇴 루트가 뜨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학교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서 스스로 나가는 것일 뿐, 똑같이 게임 오버였다.
‘여기서 게임 오버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죽나?’
내 의문은 금방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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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물인데 자퇴하거나 퇴학당하면 게임 오버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안 됨. 실제 사망으로 이어져서 페널티 받음.]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그건 좀 어렵겠는데……? 대신 앞으로는 네 앞에 덜 얼쩡거릴게.”
아예 얼쩡거리지 않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적당히 절충한 제안이었다.
클라이드는 사나운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이 얼마나 흉흉한지 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앞으로 내 앞에 덜 얼쩡거린다는 사람이 기숙사를 신청해?”
살벌한 추궁에 나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드는 경멸하는 어조로 신랄하게 비꼬았다.
“난 너만큼 무절제하고 멍청하고 이기적으로 평생을 욕심만 부리며 사는 인간을 본 적 없어.”
테레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구나.
개발자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머쓱하게 침묵하고 있으니 클라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넌 대체 내가 왜 좋은 거지?”
매우 당혹스러운 질문에 잠깐 굳어버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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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이제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게 로판의 정석이랍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하고 시시한 대답일 테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짝사랑을 공식적으로 관두지 않으면 테레제는 반드시 죽는다고.’
테레제의 사망 원인 1위가 바로 클라이드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런고로 클라이드에게 이젠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에게 애정을 느꼈다.
주인공이라는 건 다른 인물을 조형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작업량이 투여된 존재라는 뜻이었다.
캐릭터 디자인, 설정, 서사, 능력 등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기를 반복하여 창조해낸 ‘클라이드 윌로우’를 사랑하지 않기란 내겐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모든 캐릭터가 그랬다.
나는 이 세계를, 이곳의 사람을, 건축물을, 사물을 전부 유의 깊게 살펴보았다.
어찌할 수 없는 본능적인 애정과 친밀함을 느꼈다.
껄끄럽기 그지없는 스콰이어 공작가의 사람들에게조차 마음 한구석으로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과연 내가 이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차라리 대놓고 말하자.’
괜히 수상쩍게 굴었다가 이해할 수 없는 루트를 탈 바에야 매번 나다운 선택으로 일관된 플레이를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오즈월드에게도 그랬듯이.
“널 좋아하는 건 나한텐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달리 설명하기가 어려워.”
이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가장 적당할까?
나는 조금 고민한 뒤 이 감정을 제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단어를 골랐다.
“나는 숙명처럼 널 사랑해.”
그러자 귓가에 알림음이 쉼 없이 들려왔다.
하나 쳐다보지 않았다.
나를 잔뜩 굳은 얼굴로 쳐다보는 클라이드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릴 수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꼭 믿었던 사람에게 칼을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숙명처럼 사랑한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이드의 반듯한 턱선에 꽉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뭔가를 간신히 인내하는 표정에서 살기까지 느껴지자 당혹스러워졌다.
‘테레제가 늘 하는 말이 사랑한다는 건데,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는 거지?’
물론 테레제의 말과 행동은 하나 같이 클라이드가 가장 끔찍해 마지않는 것들이었다.
클라이드는 사랑을 혐오한다.
이 세계에서 나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너…….”
그의 눈빛에서 섬뜩한 광기가 느껴졌을 때,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젠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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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뭐 발표하세요?;]
성좌의 지적에 뒤늦은 수치심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클라이드의 눈동자에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클라이드는 반인반마라고.’
어쨌든 클라이드의 두 눈빛이 아까보다는 멀쩡해 보여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널 싫어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번쩍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내려 악수를 청했다.
클라이드의 물빛을 닮은 눈동자가 내 손짓의 궤적을 따라왔다.
“서로 적당히 무시하면서 잘 지내보자. 클라이드.”
대답은 없었다.
그는 신랄한 비난과 조롱 대신 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상종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사람 민망하게…….”
나는 무안하게 빈손을 거두었다.
“그래도 무사히 지나간 건가?”
겨우 개강 첫날인데 이렇게 피곤해도 괜찮은 걸까?
꼬르륵.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프네.”
이만 식당에 가서 샌드위치나 포장해가야겠다.
나는 터덜터덜 도서관을 나갔다.
* * *
클라이드는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없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을 장소만이 절실했다.
다행히도 늦은 시간의 학교에는 사람이 없었다.
있더라도 동아리 방이나 카페, 식당에 있지, 도서관 근처에서는 찾기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크윽…!”
클라이드는 도망치던 중 손바닥으로 황급히 두 눈을 덮었다.
그와 동시에 손을 대면 찐득하게 묻어날 듯한 음험한 열기가 눈에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벌컥!
그가 시야를 거의 가린 채 도망쳐 들어간 곳은 텅 빈 파우더 룸이었다.
클라이드는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내려 화장대 위를 짚은 채 거울을 바라봤다.
붉은 눈이 보였다.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강렬한 향을 품은 사특한 붉은빛이 꽃이 만개하듯 시린 벽안을 적셔 완전히 물들였다.
인간은 붉은 눈동자를 지닐 수 없다.
그것은 타락의 낙인이었고 마기를 품은 자의 숙명이었으니까.
클라이드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악마였다.
세상은 그런 존재를 두고 쓰레기라 불렀다.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될, 가장 타락한 저주받을 존재.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끔찍한 희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순수한 감정은 처음이었지.
육신의 절반을 차지한 악마의 탐욕스러운 검은 혀가 장기를 훑었다.
-껍데기만 그럴싸한 테레제가 날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구역질 날 것 같았어. 도저히 먹고 싶지 않은 기운만 내뿜었었는데.
잠깐 맛본 숭고한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 달콤하고 황홀했다.
클라이드는 모든 믿음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테레제 스콰이어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을 지껄여도 무시하고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악취 같은 거였으니까.
-오늘은 영혼이 바뀌어버린 것처럼 다르더군. 왜일까? 그 영혼이라면 꿈을 찾아가 죽을 때까지…
“닥쳐. 그만해.”
-어째서? 너는 서큐버스가 낳은 악마잖아. 아… 설마, 아직도 네가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닥치라고!”
-인간들은 네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를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텐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챙그랑―!
주먹으로 거울을 산산이 으깨버릴 듯 내리치자 날카로운 파편이 튀며 살가죽이 찢겼다.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으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열이 몰렸다.
“하아… 하아….”
그는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두 눈동자를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팔을 옆으로 쭉 뻗자 허공에 물결처럼 파문이 일어나며 손이 사라졌다.
이내 뭔가를 끄집어내는 듯 팔을 뒤로 당기자, 손에 유리 방울이 달린 흰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공간에서 빼낸 것이었다.
클라이드는 유리 방울을 부숴버릴 듯이 꽉 쥐었다.
-이런. 이렇게 또 진짜 너 자신에게서 도망칠 셈인가?
키득키득.
유리 방울은 성스러운 기운으로 클라이드를 잠식한 마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클라이드가 태어날 때 손에 쥐고 있던 성유물이었다.
시린 벽안을 빼곡하게 채웠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그를 괴롭히던 환청이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언제까지고 계속 도망칠 수는 없을 거다.
클라이드는 증오스럽게 악마를 노려보았다.
“꺼져.”
산산이 부서진 거울 속의 자신이 스스로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