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77)

물론 진실은 아니지만 대놓고 농담 취급당하니까 기분이 묘한걸.’

영애들은 기숙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는 별수 없이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기숙사 규모는 확실히 크진 않았다.

그래도 1층은 조그마한 거실과 다이닝 룸시녀가 쓸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2층은 침실과 드레스 룸이었다.

이게 이렇게 구현됐구나…….”

그래픽이 아닌 현실을 입혀놓은 기숙사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나와 반대로 영애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기숙사를 둘러볼수록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이런 누추한 곳에 어찌 테레제 님이 생활하실지 걱정이에요…….”

나는 데미안이 왜 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지 이해하고야 말았다.

다 내보내고 책이나 읽어야지.’

저기나 내일까지 이 책을 다 읽을 예정인데.”

그러니 다들 이만 돌아가 주지 않을래?

그러나 내 말은 또 클예부의 입맛에 맞춰 제멋대로 해석되었다.

클라이드 님이 도서관에 계신다는 소식을 전달해드리려고 했는데역시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니전혀 몰랐는데.

클라이드는 도서관에 자주 상주하고 있다는 설정이었지.’

미리 책까지 준비하시는 치밀함이라니존경스러워요테레제 님.”

나는 떨떠름하게 미소 지었다.

으응아무래도 그렇지…….”

도서관에 가 있으면 다들 정숙 하느라 떠들지 못할 테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어봤자 독서는커녕 이 좁아터진 기숙사에서 대체 어떻게 사느냐는 속 터지는 소리나 듣겠지.

어차피 클라이드와도 마주치기는 해야 했고.’

내 시선은 알림창으로 향했다.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이번 남자 주인공은 반드시 취향이길 기대 중입니다.]

[성좌 스겜하자’ 님이 첫날부터 남자 주인공을 모두 확인하는 것에 만족스러워합니다.]

그래가자.’

나는 영애들과 함께 본관의 도서관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1층의 다소 규모가 작은 도서관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했다.

공작저보다 책이 더 많아!’

다들 그런 로망이 있지 않은가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책을 꺼내는 도서관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로망이 있었다.

‘2층 높이의 책장에 마법서가 한가득 꽂힌 도서관이라니실물로 보니까 훨씬 멋있잖아.’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바로 곁에 있던 영애가 나와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표정을 한 채 속삭였다.

저기 있어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가 보였다.

천족의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싶을 정도로 순결함의 결정체 같은 깨끗한 은발과 시리도록 청아한 벽안의 소유자.

보기만 해도 기세가 꺾이게 만드는 아우라를 풍기는 저 남자가 바로 학생회장 클라이드 윌로우였다.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얼굴 천재]

이 성좌는 아무래도 조각처럼 빈틈없는 차가운 느낌의 미인을 좋아하는 듯했다.

데미안도 서글서글한 표정과 안경이 아니었다면 딱히 온화해 보일 얼굴은 아니었거든.

언뜻 보기에는 무척 다정다감할 것 같지만 그건 다 꾸며낸 인상이었다.

다만 겉으로만 보면 확실히 클라이드와 데미안은 인상태도출신 등 모든 면이 정반대였다.

우리는 클라이드의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나는 책을 내려놓으며 우리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클라이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클라이드 인물 정보

[클라이드 윌로우]

나이: 22

: 188

생일: 1월 31

좋아하는 것: -

싫어하는 것사랑

호감도♥♥♡♡♡

…….”

얘는 벌써 검은 하트가 두 개씩이나 되네.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저 정도면 테레제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다는 뜻이었다.

띠링!

[성좌 명탐정’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단서 발견지금까지 나온 남자 주인공들 생일이 1월 31일로 동일.]

클라이드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펜과 종이를 바리바리 들고 온 영애에게 문구를 빌려 조금 떨어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는 종이에 성좌들을 위한 설명을 써 내려갔다.

이 게임은 내년 1월 31일 전까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남자 주인공의 호감도를 꽉 채워야 해요호감도가 끝까지 찬 남자 주인공은 생일 초대장을 보내죠그날 누구의 초대에 응하는지에 따라 엔딩이 달라져요.

[성좌들이 설명을 이해했습니다.]

종이를 태우기에는 장소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마력을 살짝 일으켜 손가락으로 글자를 문질렀다.

그러자 마력이 잉크만 태워내 글자가 사라졌다.

빙의 직후의 나였다면 이런 섬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심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클라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지?’

종이에 쓴 글씨가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뒤가 켕겼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은 뒤 시선을 피하며 책을 폈다.

곁눈질로 클라이드를 확인하니 그도 다시 본인이 들고 있던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클라이드의 앞자리에 앉길 원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나는 지금이 딱 좋았다.

앞선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클라이드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아도 되는 이 분위기얼마나 편안한가.

이래서 클라이드가 추종자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하려고 도서관을 찾는 거였다.

이유는 또 있었다.

지긋지긋한 가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

마법 학교 발할라는 윌로우 공작저이기도 했으니까.

클라이드는 윌로우 가문의 후계자다.

그의 할아버지가 발할라의 이사장이자 가주였고 가문을 이어받았어야 할 부친이 죽었기에 자연스레 그리 결정된 것이다.

물론 후계자가 된 이유에는 압도적으로 출중한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어리다는 건 손쉽게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인 법이다.

윌로우 가문의 원로들방계의 귀족들비슷한 나이대의 사촌 중 클라이드를 시샘하여 그가 망하길 바라는 이의 수가 적지 않았다.

적당한 빌미도 있었다.

레녹스가 광인이 된 걸 보십시오가주님그 아비의 손에서 큰 클라이드 또한 아비처럼 굴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윌로우 공작의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기도 하여되레 클라이드를 후계자로 공표하게 만들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원로들과 방계 귀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클라이드를 끌어내릴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았다.

발할라를 졸업하면 더는 클라이드의 자질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클라이드를 의심하는 것은 발할라그러니까 윌로우 공작가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반역이었으니까.

올해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클라이드로서도 올해만 잘 넘기면 되었으니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사람들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학교 곳곳에서 난데없이 출몰하는 편이지.’

그를 공략하고 싶다면 인적 드물거나 뜬금없는 장소를 가야 했다.

따라서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으로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는 데미안이 자주 출몰했으니이게 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어딜 가도 남자 주인공이 있구나누가 만든 게임인지 참 치밀하다치밀해.’

책을 읽다가 잠깐 멍한 얼굴로 딴생각에 잠겨있던 찰나영애들은 책 읽기가 지쳤는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속닥거렸다.

저는 이만 가문으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발할라에는 도서관이 세 곳이나 있었다.

한데 하필 이 도서관은 수준 높은 마법서만 보관해두는 곳이라 일반 교양서나 역사서조차 없어서 다들 염증을 느낀 듯했다.

그래서 미리 책을 준비한 내 철저한 준비성에 감탄한 거였지.’

영애들은 내가 가져온 책이 연애소설인 줄 알았다가 마법서인 걸 보고왜 이런 책을 가져왔느냐는 듯 기이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근데 이 책 재밌네.’

한창 책에 빠져들어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똑똑.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클라이드가 보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클라이드가 먼저 테레제에게 말을 걸 리가 없는데?’

“5시야.”

1층의 가장 큰 도서관을 제외한 도서관들은 전부 5시에 일괄적으로 닫았다.

벌써?”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집중해서 마법서를 읽은 탓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서둘러 책을 챙겨 일어나니 텅 빈 도서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나와 클라이드 둘만 이곳에 남은 것이다.

일부러 끝까지 남은 거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인데?’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그에게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알려줘서 고마워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그렇게 뒤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재미있네테레제 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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