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대체 어떤 부분에서 호감도가 오른 거야?’
일리야 교수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무례에 대한 벌이다.”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벌이라면서 호감도는 왜 올랐지?
일리야 교수에게 이상한 취향이 있다는 설정을 넣은 기억은 없는데…….
게임이 현실이 되면서 생긴 간극 같은 건가?
‘어쨌든 이런 식이라면 호감도가 오르는 것도 경계해야겠어.’
호감도가 오를수록 더 가혹한 벌을 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나름 관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며 일리야 교수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다 읽으면 될까요?”
“최대한 빨리 읽는 게 좋겠지. 그걸 다 이해해야 올해 강의를 들을 수 있을 테니.”
‘강의 전까지 다 읽으라는 뜻인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될 텐데 하루 만에 다 읽으라고?
‘으음. 마법서를 읽는 건 좋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로써 밤샘은 확정이었다.
나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 읽고 검사받겠습니다.”
검사라는 말에 일리야 교수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올렸다.
그 행위에 담긴 의미는 잘 모르겠다.
그냥 표정만 보면 무슨 헛소리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인간으로 둔갑해있는 대악마와 계속 외부의 시선이 차단된 밀폐 공간에 있을 만큼 담력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나가봐도 되겠지?’
책을 품에 끌어안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도 일리야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휴. 나가도 괜찮은가 봐.’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교수님.”
일리야는 고개를 한 번 까딱 움직였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 얼른 연구실을 나왔다.
“후아. 숨 막혀.”
교수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누가 좋아하겠냐만.
악마 같은 교수가 아니라 진짜 악마인 교수와 같이 있는 건 참…… 색달랐다.
‘그게 또 하필 지도교수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터덜터덜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발할라는 대부분 귀족이 다니는 학교라 한국의 대학만큼 일정이 빡빡하지 않았다.
개강일에는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거나 사교 활동을 하는 등 수업을 제외한 일을 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어야겠지.’
문득 리비와 데미안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지만, 신입생 입학식을 찾아가 볼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다, 내 코가 석자야.
‘지금부터 밤새 읽어도 다 못 읽을 것 같은데 책이나 읽자.’
기숙사 관리인을 찾아가 내가 앞으로 1년간 쓸 별채를 안내받던 중이었다.
“테레제 님!”
“어머! 진짜 테레제 님이시잖아?”
여러 사람이 나를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휘황찬란한 귀족 영애 군단이 보였다.
그들은 까르르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와 조잘조잘 떠들었다.
“꺄아, 오랜만이에요! 방학 동안 테레제 님을 못 뵈어서 너무너무 심심했잖아요.”
“참! 제가 보낸 생일선물은 잘 받아보셨어요? 이번에는 파티가 없어서 무척 아쉬웠답니다.”
“제가 클라이드 님의 새로운 초상화 카드를 왕창 제작해 두었어요!”
“그런데 아까 로비에서 무슨 일이셨어요? 미모사 님이 무척 당황하시던걸요. 드디어 데미사가 정신 차리고 클예부에 항복한 건가요?”
어우, 정신없어.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들은 전부 클예부 회원이었다.
클예부 회원을 상징하는 사파이어가 박힌 은나비 장식을 달고 있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참고로 데미사의 엠블럼은 루비로 꽃잎을 표현한 황금 장미였다.
오늘의 나는 은나비 장식을 달고 있지 않았는데도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깟 장식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위치라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다소 울적하게 말했다.
“미모사와는 내 동생을 소개하면서 인사 나눴을 뿐이야.”
이들은 내게 궁금한 게 많은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테레제 님의 동생 분 소식은 들었어요. 지금 한창 입학식을 끝내고 학교를 안내받는 중이겠군요.”
“동생분과 사이가 좋아 보이시던걸요?”
“굉장한 미인이셨어요! 물론 테레제 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리비는 원래 신입생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클예부의 괴롭힘을 받는다.
클예부 회장이 테레제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나와 친근한 모습으로 같이 등교해서인지 클예부는 리비에게 호의적이었다.
“다들 내 동생에게 잘 대해주면 좋겠어.”
“아무렴요! 테레제 님의 동생이시면 저희 클예부의 식구죠!”
‘막상 클라이드와 리비가 가까워지면 이 얄팍한 호의도 깨져버리겠지만.’
리비가 클라이드 루트를 선택하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악역이 테레제와 클예부였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한 클예부가 리비를 괴롭히진 못하겠지.’
문제는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4명의 남자 주인공 중 공략 난이도가 가장 낮은 캐릭터였다.
‘데미안이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건 귀족이지만, 리비는 유랑극단의 단원으로 평민처럼 살아왔다는 특이점이 있어.’
그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다.
[“넌 내가 아는 귀족들과 달라.”]
데미안의 하트가 3개 채워졌을 때 하는 대사도 이런 식이니까.
리비는 성격, 외모, 불운했던 과거까지 매력적인 요소가 너무도 많은 캐릭터이기에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머지않아 데미안이 리비의 진가를 깨닫는다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생겨날 거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미모사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물론 호감도가 단기간에 쌓이지는 않겠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악역들을 어느 정도 정리해두는 게 좋을 듯했다.
‘팬클럽을 모조리 없앨 방법은 없을까?’
“테레제 님?”
나는 잠깐 딴생각에 잠겨있다가 이름이 불리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영애들은 화들짝 놀랐다.
“미안……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테레제 님은 무정하시고 가차 없고 몽땅 벌레 취급하시는 게 마땅한 분이니까요!”
“맞아요, 맞아요. 고귀한 공녀이신 테레제 님이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 사과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는걸요? 더 업신여겨주세요!”
‘어…… 이거 욕이지? 지금 나 돌려 까는 거지?’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이래서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이를 곁에 두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이건 자존감 지킴이 같은 게 아니라 다 함께 파멸에 이르는 중인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이었다.
‘딱히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었지만…….’
“참, 그래서 테레제 님!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신가요?”
“기숙사.”
“기숙사요?”
영애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귀족들이 사용하도록 만든 타운하우스를 발견하더니 더욱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머, 저는 3학년이 되도록 기숙사는 처음 봐요. 굉장히 조그마한 장난감 집 같네요!”
‘장난감 집이라니? 물론 귀족들이 기거하는 저택에 비하면 초가집 규모로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부촌의 형태를 따왔는데 말이지.
나는 왜 라울이 아침에 그렇게 난리를 쳤는지 조금 이해되었다.
‘얘들도 이 정도로 반응하는데 공녀인 테레제가 이 집을 보고서는 웬 닭장이냐고 욕을 퍼부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은가.
어느 대학 기숙사가 2층짜리 단독 주택을 주겠냐고.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설정의 혜택을 톡톡히 누릴 예정이었다.
나를 기숙사까지 안내해준 관리인이 열쇠를 내밀었다.
“앞으로 이곳을 쓰시면 됩니다.”
내가 열쇠를 받아들자 영애들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테레제 님, 기숙사에서 지내시려고요?!”
“응.”
“괜찮으시겠어요? 가문에서 데려올 수 있는 시녀는 한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잖아요.”
“이 건물은 마당도 없군요! 집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봐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기숙사도 예쁘고. 별장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테레제 님…….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내 대답이 너무 테레제답지 않았던 모양인지 다들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영애가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정말 테레제 님은 못 당하겠어요!”
‘……뭐가?’
나는 이해되지 않아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클라이드 님도 올해 기숙사에서 지내시잖아요! 전 도저히 기숙사 생활은 못 할 거 같아서 과감하게 포기했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그제야 영애들은 내가 기숙사를 선택한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으로 매우 경이로워했다.
“과연……!”
“역시 테레제 님이시군요. 저도 더 분발하겠어요!”
“이번에 파혼도 성공하셨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파비오 영식은 테레제 님께 어울리지 않았어요. 다행이에요.”
으음. 뜻하지 않게 사생팬이 되어버린 기분이라 좀 떨떠름해졌다.
“난 그냥 학업에 열중하려고 기숙사를 선택한 것뿐이야.”
“네에? 까르르!”
영애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