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77)

검은 하트가 하나뿐이라 그나마 다행인 건가…….’

검은 하트 두 개까지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캐릭터들이 비협조적인 정도에서 그치니까.

하지만 검은 하트 세 개째부터는 위험했다.

이때부터는 위협적인 행동을 실행하는 단계거든.

나는 테레제답게 이게 무슨 짓이야?! 평민 따위가!”라고 인사하는 대신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데미안오랜만이다방학은 잘 보냈니?”

그러자 데미안이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다소 얼떨떨하게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나야 잘 보냈지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테레제.”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여기는 내 동생 리비.”

데미안의 시선이 내가 가리킨 방향대로 움직였다.

잃어버렸던 동생이야올해 신입생으로 입학했어리비이쪽은 내 동기이자 부학생회장인 데미안 웨스트.”

내 천연덕스러운 소개가 괴이하다는 듯 데미안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그 표정은 꼭 이해할 수 없는 오류를 발견한 개발자와 비슷했다.

리비는 어색한 표정으로 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다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리비입니다.”

안녕.”

데미안은 리비의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여전히 날 관찰하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의 태도 변화로 데미안에게 내게 적의가 없음을 증명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꾸준히 관계가 개선되도록 노력한다면 사망 루트에 접어드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겠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미안신입생 입학식을 도우러 강당에 가는 길이지내 동생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그건 어렵지 않지만… 입학식을 도우러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들 알던걸.”

내가 게임 개발자인데 어떻게 모르겠어?’

다만다들 알아도 테레제만큼은 무관심해야 정상이었다.

그 사실을 데미안도 잘 알았다.

그랬기에 데미안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구는 날 가늠하려는 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서로를 탐색하듯 쳐다보고 있는 그때몹시 적대적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당장 데미안에게서 떨어지지 못해테레제 스콰이어?!”

고개를 돌리자 분홍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애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미모사 브루니.

브루니 공작가의 공녀이자 테레제와 같은 악역 영애였다.

평등을 지향하는 발할라지만 신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테레제에게 함부로 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미모사는 가능했다.

이 애는 단순한 공녀가 아니라모친 쪽이 황제의 이복 남매였거든.

미모사는 황족의 피가 흘렀다.

연보라색 눈동자가 그 증거지.’

피를 짙게 타고난 황족은 보라색 눈동자를 지녔다.

황족의 특수한 마력 때문이었다.

그러니 미모사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나를 밀치려 들었다.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데미안한테 꼬리를 쳐?”

잠깐미모사!”

데미안이 놀란 표정으로 막기 전나는 미모사가 뻗은 손을 악수하듯 붙들었다.

어머미모사개강부터 보니까 반갑네잘 지냈어?”

?!”

미모사는 이게 무슨 짓거리냐는 표정으로 화들짝 놀랐다.

나는 태연하게 리비를 소개했다.

여기는 내 동생리비만약 이 애를 괴롭힌다면 앞으로 너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을 거야.”

뭐라고너 미쳤니?! 지금 감히 날 협박하는 거야?”

진짠데널 위해 하는 말이니까 명심해두는 게 좋을 거야.”

리비는 여자주인공이라서 진짜로 잘못 건드리면 죽어.’

내 진실한 충고에 미모사는 거의 졸도할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감히… 황족인 내게 감히!”

황족이라고는 해도 전하라는 칭호를 쓸 수 없는 이상 사실 서열은 다소 애매했다.

어느 정도 예우는 해주지만 눈치껏 하는 정도였다.

샤티 부인과 같은 경우지.’

이래 봬도 난 [중급 예법]을 익히고 있다고.

가뜩이나 북적이는 로비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학생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구경했다.

테레제가 또 데미안한테 시비 걸었나 봐미모사가 많이 화난 것 같은데?”

테레제는 데미안을 싫어한다.

그 사실을 전교생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다른 학생이 설명했다.

이번에는 아니야테레제가 데미안한테 친절하게 인사하던데?”

그럴 리가테레제는 클라이드의 예비 신부들’ 사교 클럽의 회장이잖아.”

…….’

나는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의 유희>는 학원 로맨스물의 기존 공식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학원물의 꽃은 역시 사대천왕의 존재였지만그렇게 되면 남자 주인공의 수가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적절히 타협한 게 학생회장 클라이드와 부학생회장 데미안 투 톱 체재였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매력을 뽐내는 잘생기고 매혹적인 남학생이었기에 그들을 추종하는 집단 역시 파가 나뉘었다.

집단 구성원은 99%의 확률로 귀족 영애였고그들은 자연스럽게 사교 클럽을 결성했다.

말이 사교 클럽이지그냥 팬클럽이라고.’

이쯤 되면 누구든 눈치채겠지만테레제는 클라이드의 예비 신부들’, 줄여서 클예부의 회장이었다.

미모사는 데미안의 팬클럽인 데미안에 미친 사람들’, 데미사의 회장이었고.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테레제와 미모사는 앙숙이었다.

외부 세력과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아이돌 팬덤의 숙명이지 않은가?

여동생이 공방팬싸는 물론 사생까지 뛰는 미친 애여서 그쪽 세계를 조금은 알지.’

덕분에 <신의 유희>에 팬클럽 시스템을 도입하는 영감을 얻었다.

솔직히 난 등교할 때까지는 별생각 없었다.

팬클럽이니 회장이니 그런 건 다 설정에 불과했으니까.

아니내가 그 집단에 해당한다는 자각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런데 데미안이 있는 자리에서 상대 팬클럽 회장인 미모사와 투덕거리고 있으며그 모습을 리비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견딜 수 없이 창피해졌다.

절대 들켜선 안 될 망상으로 가득한 팬픽을 써놓은 일기장이만천하에 공개되어버린 것 같은 아뜩한 기분이었다.

왜 신체 반응은 마법으로 조절되지 않는 걸까?’

붉게 달아올랐을 뺨을 식힐 방법이 간절했다.

나는 마땅한 이유를 대고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내 눈에 구세주가 보였다.

?”

남들보다 훨씬 큰 키에 빛에 따라 검붉게 보이는 긴 흑발을 느슨하게 묶어 내린 남자였다.

나는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교수님일리야 교수님!”

남자는 서늘한 낯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차라리 전사가 어울릴 덩치였지만묘하게 마법사라는 사실이 잘 어울리는 독립적이고 사회성 없는 분위기였다.

발할라의 최연소 교수이자 번스타인 공작가의 천재 마법사일리야 번스타인.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남자 주인공 중 하나였다.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제 취향은 아니라며 고개를 젓습니다.]

어째서지엄청난 알파메일인데.’

일리야 번스타인은 전신에서 테스토스테론이 줄줄 흐르는 완벽한 육식계 남자였다.

그가 야구를 한다면 사이 영 상을 수상할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일 것이며미식축구를 한다면 필드의 야전사령관인 쿼터백일 게 틀림없었다.

나는 무시하지 않고 가만히 걸음을 멈춰 서준 일리야 교수에게 호감이 생겨 모든 게 좋게 보였다.

내 정신 좀 봐교수님께 가볼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데미안내 동생 좀 부탁할게.”

언니?”

당연히 미모사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네 동생을 왜 데미안한테……!”

그래미모사너도 같이 교수님한테 가자.”

이러면 자연스럽게 데미안과 리비가 같이 있을 수 있고 미모사라는 위험 요소도 제거되니 딱 좋았다.

내가 왜!”

교수님은 무려 번스타인 공작가에서도 제일가는 천재 마법사이시잖아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안 그래?”

안 그래안 그렇다고!”

미모사는 일리야 교수를 몹시 무서워했기에 질겁했다.

안녕나중에 보자데미안.”

나는 리비에게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준 뒤 가기 싫다고 발악하는 미모사에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척척 걸어갔다.

이거 놔너 정말 미쳤니?! 이 무식하게 힘만 센 게!”

아이참교양 없어라미모사공녀답게 행동해.”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테레제식 교양(물리)]

나는 일리야 교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교수님.”

일리야 교수는 암녹색 눈동자로 나와 미모사를 무심하게 훑었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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