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77)
  • 외출 준비가 끝날 무렵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이것도 중노동이네.’

    평소보다 머리 손질만 공들여도 힘든데 이렇게 작정하고 꾸미니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결과물은 피로감을 제법 가시게 할 정도로 괜찮았다.

    다들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며 최선을 다하는 것 같더니 중간부터는 치장 자체에 몹시 열중하며 나를 꾸며주었었다.

    괜찮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치장을 전담한 세 사람에게 금일봉을 주었다.

    페니는 눈 돌아갈 금액에 입을 떡 벌리더니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너무도 보람되는 일이었습니다아가씨언제든 저를 불러주세요.”

    얘 사회생활도 잘하네.

    그래.”

    시녀들은 꿈을 꾸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생트리오 호텔이 한바탕 뒤집히겠네요.”

    난동 부릴 생각은 없는데?”

    아니그게 아니라오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틀림없이 아가씨일 거라는 말이었어요.”

    개망나니 테레제를 무서워하는 것 같던 시녀들조차 이 말만큼은 진심을 담았다.

    진짜 테레제였다면 코웃음 치면서도 굉장히 좋아했겠지만나는 당이 떨어져 뭐라도 입에 넣고 싶었다.

    마실 거 있니달콤한 걸로.”

    여기 있습니다.”

    시녀는 배부른 맹수처럼 얌전하던 테레제가 당이 떨어져 포악해질까 봐 마취총을 쏘듯 주스를 내밀었다.

    …….’

    시한폭탄처럼 다뤄지는 게 떨떠름하면서도 나쁘지 않다.

    아무튼달콤한 주스를 쭉 비우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마차는?”

    “30분 전에 아래에서 대기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한데 아가씨를 에스코트할 신사분이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만.”

    이런 행사에서 에스코트 없이 홀로 방문하는 숙녀는 거의 없다.

    특히 테레제처럼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라면 더더욱.

    에스코트는 호위 기사가 해주면 되잖아경매장은 너희랑 호위 기사만 데려갈 생각이야괜히 요란하게 참석해서 시선 끌고 싶지도 않고.”

    나는 테레제와 달리 화려한 파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살 거만 빨리 사고 얼른 돌아와서 마법서나 봐야지.’

    개강 전까지 봐둘 마법서가 많아볼일만 보고 빨리 돌아올 거야.”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시녀들의 표정이 시름에 잠겨 들었다.

    특히 마법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거의 병상에 쓰러져 누운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테레제가 파티에 관심이 사라진 게 그 정도나 이상한 일인가?’

    나는 개발자 마인드로 개연성을 점검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네.’

    죽을병에 걸렸거나 악독한 술수를 부리려는 게 아닌 이상 테레제가 그럴 리 없었다.

    오늘 파비오 백작가도 경매에 참석한다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평소보다 더 시선이 모일 거예요.”

    파비오그게 누군데?”

    ……라고 말하자마자 깨달았다.

    테레제랑 파혼한 가문!’

    어쩐지 생일 편지에서도 자꾸 뭔가를 애석해하는 뉘앙스들이 적혀 있어 의아했었는데.

    그게 전부 파혼 이야기였구나.’

    본의 아니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파혼에 관한 내용은 무시하고 답장해버렸다.

    아니대충 아무렇게나 이름 붙여 만든 엑스트라 이름까지 어떻게 기억하겠어.’

    나는 대충 무마했다.

    어쩔 수 없잖아평생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파혼에는 내 잘못이 크니까.”

    아가씨…….”

    지난 일은 더 이야기하지 말자백작가에도 실례잖아.”

    상식적인 발언이 이어질수록 사용인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여전히 충격이 크신가 봐…….”

    그래차라리 말을 말자.

    나는 준비를 마무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를 가로지르던 중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주세페였다.

    날 발견한 주세페가 근처에 멈춰 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꼴이 그게 뭐야?”

    이상하니?”

    검은 망토 때문에 가려지긴 했으나 어깨를 드러낸 흑청색 드레스는 자잘한 보석이 달려있어 샹들리에의 빛에 예쁘게 반사되었다.

    우아하게 늘어뜨린 머리칼도 평소보다 더 완벽한 컬이 들어갔다.

    흑막의 포스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악역 영애다운 차림새였다.

    주세페는 내 손목에 걸린 실 팔찌를 힐끔 보더니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의상에 다소 맞지 않는 귀여운 팔찌였지만간접적으로 리비를 홍보할 기회였다.

    닳고 닳은 구렁이와 너구리들 사이에 나타난 아기 종달새 같은 리비의 순수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되리라.

    원래는 로잔의 역할이지만.’

    개망나니 테레제마저도 감화시킨 맹수조련사 이미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세페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한 얼굴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순간마력이 느껴졌다.

    옷자락이여걸음마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여라.”

    매우 작은 단위의 마력 입자를 다루는 일은 뛰어난 컨트롤 능력이 필요했다.

    섬세한 마력 컨트롤은 주세페의 특기였으며이 능력은 리비에게만 사용하는 애정의 표시였다.

    빛 가루는 딱 절묘할 만큼만 흩뿌려져 스치듯이 보면 신비로운 인상만 남을 정도였다.

    이제야 좀 볼만하네.”

    주세페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반대편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붉어진 귓바퀴가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저 녀석테며들었네]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만 생일선물을 챙겨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저러는 거지.’

    주세페는 테레제를 제외한 가족을 무척 사랑하는 아이다.

    내게 잘해주고 싶지 않더라도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한다면분위기를 맞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기도 했고.

    그런 것쯤은 나도 8살 때부터 한 일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랑살랑 움직이며 마차로 향했다.

    드레스 자락이 출렁일 때마다 흩날리는 빛 가루에 시녀들은 뒤따라오며 탄성을 내질렀다.

    도련님의 특기가 이런 섬세한 마력 조절이라고는 들었는데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 몰랐어요.”

    주세페 도련님이 요즘 테레제 아가씨와 부쩍 친해지고 싶어 하시더라니오늘도 아가씨의 외출을 기다리고 계셨나 봐요.”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지?

    주세페는 외출했다가 막 들어오고 있었잖아?”

    시녀들이 후후 웃었다.

    신발에 흙먼지 하나 안 묻어있었는걸요로비에서만 계속 왔다 갔다 하신 거지요.”

    시녀들은 확실히 내가 좀 편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아가씨저희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다른 마차를 타고 오겠다는 말에 의아해졌다.

    마차가 넓은데 굳이같이 타.”

    시녀들은 당황했는지 우물쭈물했다.

    테레제가 무서운 건 알겠지만무슨 말만 하면 놀라고 망설이니 조금 답답해졌다.

    빨리 타이러다 늦으면 너희들 책임이라고 할 거니까.”

    그제야 시녀들이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말했다.

    감사합니다아가씨이렇게 아름다운 마차를 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어떤 시녀도 이렇게 훌륭한 마차를 타본 적 없을 거예요.”

    나는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테레제는 그동안 상류층 행사에 격이 높은 집안의 친구들만 데려갔다.

    말이 친구지 시녀 대신 부릴 영애들이었다.

    따라서 이런 행사에 시녀들을 데려가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마차에 태워서.

    시녀들은 그 사실에 들떠 보였다.

    오늘 생트리오 호텔에 가면 어떤 마차도 이 마차 곁에 서고 싶지 않을 거예요.”

    마차만 그렇겠어요누구도 아가씨 곁에 서고 싶지 않을걸요?”

    나는 볼을 살짝 긁적거렸다.

    그래도 빙의한 뒤에는 딱히 폭력적으로 군 적 없었는데여전히 내가 주변에 있는 아무나 머리채를 쥐어뜯을 것처럼 보이나?’

    그러자 뭐가 웃긴 건지시녀들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가 아름다우셔서 다들 비교될까 봐 다가오지 못할 거라는 뜻이었어요.”

    그런 뜻이었어?’

    나는 민망한 마음에 마차에서 읽으려고 챙겨 온 마법서를 펼쳤다.

    시녀들은 또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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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되게 예쁜데 나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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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되게 인기 많은데 나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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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되게 예쁘고 인기도 많고 싸움도 잘하고 집안도 좋은데 내성적임]

    …….”

    하하버스’ 성좌는 대체 뭐에 신난 건지 미친 듯이 폭주했다.

    [다수의 성좌가 하하버스’ 님의 도배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채널 관리자-오즈월드가 성좌 하하버스’ 님의 후원 알림을 24시간 블라인드 처리합니다.]

    저런 기능도 있구나.’

    나는 떨떠름하게 후원창을 다 치워버린 후 마법서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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