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77)



내가 지금껏 테레제의 생일에 무얼 해줬는지 기억하나?”

호텔을 하나 빌려 생일파티를 열도록 하셨지요.”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그냥 이맘때쯤 그런 종류의 서류를 받으면 대충 도장을 찍어 허락해버렸으리라.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았으니.

아까테레제가 내게 자신의 생일을 모르지 않느냐더군묻는 것도 아니고 확신하고 있었어.”

라울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눈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런데 말일세난 리비의 생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겨우 2살 때 잃어버린 딸의 생일은 매년 아내와 챙겨왔단 말이지.”

그 사실이 오늘 처음으로 기이하게 느껴졌다.

라울은 쇳소리가 섞일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버린 건지 모르겠군.”

자식 일이라는 게 그렇지요자책하지 마십시오가주님.”

똑똑.

그때 시종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아가씨께서 쓰러지셔서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벌떡!

리비가 왜 쓰러져!”

이런 위급한 일을 어찌 저토록 차분하게 알린단 말인가!

시종이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빠르게 정정했다.

죄송합니다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말씀드린 것은 테레제 아가씨였습니다.”

.”

라울은 순간 안도했다가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테레제가 쓰러졌다는데 왜 안도했지?

리비가 아니어서?

기분 나쁜 악몽에 갇힌 듯한 감각이었다.

라울은 어금니를 꽉 닫아 물며 무작정 테레제의 방을 찾아갔다.

열어라.”

벌컥!

문이 열렸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주세페와 차를 마시는 중인 리비였다.

리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어쩐 일이신가요?”

라울은 당혹스러워졌다.

이 방에 왜 리비가 있지?’

그때 헐레벌떡 뒤따라온 도노반이 송구스럽게 아뢰었다.

가주님테레제 아가씨의 방은 이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분명…….”

라울은 뒤늦게 테레제가 후계자의 방을 리비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테레제 아가씨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라울은 저를 의아하게 보는 리비와 주세페에게 설명도 못 한 채 도노반을 따라 걸었다.

공작저는 규모가 대단히 큰 대저택이었다.

그랬기에 복도 맨 끝방으로 가려면 꽤나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게다가 테레제의 방은 모퉁이를 돌아야 나오는 곳이었다.

이렇게 외진 곳은 사용할 일이 없어 쭉 공실이었던 방.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영역이었다.

이런 곳을 테레제가 사용한다고?

달칵.

문이 열리자 방이 작아져 기존의 물건들이 미어터질 듯 복잡하게 들어찬 응접실이 보였다.

라울은 더욱 황당해졌다.

스콰이어 공녀가 무슨 이런 방을 쓰는가더 좋은 방이 남아도는데왜 다른 데를 내주지 않고?”

아가씨께서 꼭 이 방이어야 한다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꼭 이 방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 허영심 많은 테레제가.

뒤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때마침 진료를 마치고 나오던 주치의와 마주쳤다.

오셨군요그렇지 않아도 진료 결과를 말씀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테레제가 쓰러졌다던데지금 상태는 어떻지?”

의식을 잃으신 게 아니라 현기증으로 자리에 주저앉으셨던 거였습니다약을 처방해드렸으니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이닝룸에서 테레제는 지나치게 먹질 못했다.

고기는 아예 다 남겼고 간신히 먹던 수프도 물렸다.

안색은 창백했었지.

테레제는?”

방금 막 잠드셨습니다안에다 아뢸까요?”

라울은 굳은 얼굴로 고개 저었다.

아니됐다.”

일단 도무지 혼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사용인들도 라울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잠깐.”

라울은 사용인들이 복도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자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방에 있는 기존의 가구는 복잡해 보이기만 할 뿐 품위에 맞지 않는구나전부 더 좋은 것으로 바꿔라.”

가구는 매우 값비싼 품목이었다.

한데 테이블이나 의자 정도를 교체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라니?

사용인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도노반이 나서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왔다.

.”

문득 작년 초쯤의 일이 떠올랐다.

테레제가 느닷없이 전용 마차를 가지고 싶다고 했지만절대 안 된다고 일축했었던 기억이었다.

혹시 생일선물로 바랐던 거였나.’

라울은 서서히 닫히는 중인 문 너머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테레제에게 생일선물로 전용 마차를 사주어라.”

그럼 백지수표는 없던 것으로 할까요?”

아니그건 그것대로 주고.”

손이 귀한 집안의 금지옥엽이라도 성년식도 아닌 평범한 생일에 이토록 많은 돈을 쓰지는 않을 터였다.

심지어 생일 당사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개망나니 테레제였다.

도노반은 하마터면 왜 그러시냐고 되물을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 차렸다.

알겠습니다적당한 마차를 알아보는 대로 서류를 올리겠습니다.”

테레제가 쓸 것이니 그 아이에게 갖고 싶은 걸 묻거라.”

연이어진 충격에 도노반은 결국 참지 못했다.

아가씨가 원하셨던 마차를 알고 있습니다고풍스러운 올리브색 염료로 칠한양각된 모든 부분에 금박을 입힌 호화로운 마차였지요.”

튤립처럼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모든 아가씨가 꿈처럼 바랄 마차였다.

그 정도 수준의 마차는 공작부인이나 황녀가 타는 것이었다.

그래그걸로 해주어라.”

가주님사교계에도 단번에 소문날 것입니다.”

자칫 기세등등해진 테레제의 방만이 도를 지나칠 수도 있었다.

딸의 생일에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 만큼 재정이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만일 리비에게 해주라고 말했다면 도노반은 전혀 토 달지 않고 최고의 것을 구해왔을 것이다.

……죄송합니다가주님제가 실언했습니다.”

됐다네가 한 말도 일리가 있으니.”

라울은 한층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거리가 멀다.

이곳에서는 후계자의 방도공작의 집무실도모든 게 다 멀었다.

이 거리감을 만들어 낸 건 누구일까?

라울의 표정이 착잡하게 물들었다.

* * *

다음날.

처방받은 약을 먹고 방금까지 푹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눈을 뜨자마자 황당한 알림창을 발견했다.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픈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이 방송은 온 우주가 돕는구나!]

……이게 뭐지?”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거 BJ가 설계한 그림임 ㅋㅋ 라울은 BJ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음 ㅋㅋ]

알림창은 내가 확인하지 않아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 떠 있는 후원창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성좌들이 지금까지 후원으로 떠들고 놀았나……굳이?’

코멘트 란에는 죄다 흥분에 찬 헛소리만 줄줄이 적혀 있어서 정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무렵시녀들이 방을 찾아왔다.

아가씨몸은 좀 괜찮으세요?”

멀쩡해.”

어제 다이닝룸에 있을 때부터 체기가 느껴지더라니.’

서고에서 오즈월드가 사라진 직후난 도저히 책을 펼칠 기분이 아니어서 방으로 돌아왔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겹쳤던 탓인지 침실에 들어가기도 전 갑자기 현기증으로 머리가 핑 돌았고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어제 공작님께서도 다녀가셨어요.”

나는 가벼운 몸단장을 하던 중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버지가?”

어쩐지 후원창에 라울에 대한 언급이 있더라니.

직접 응접실까지 찾아오셔서 주치의에게 아가씨의 용태를 물으시며 걱정하셨어요.”

자식이 쓰러졌다는데 부모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을 대하듯 보고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례적인 일이기는 했다.

굳이 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가를 꽉 눌렀다.

경험상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이 성가시기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무사히 공작저를 벗어나려면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나는 눈가를 짚은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시녀들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겨우 체한 걸로 아버지가 헛걸음하지 않으시게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

꾀병을 부려서라도 온 집안을 들쑤시는 게 테레제의 특기였다.

한데 이제는 아파도 말하지 말라니?

시녀들은 이게 진담인지 아닌지 분간되지 않는 듯 당혹스러워했다.

그래도 아가씨어제는 정말 쓰러지셨었는데요…….”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거야주치의도 별거 아니라고 했고.”

시녀들은 내 진심을 모르겠는지 어색한 침묵에 휩싸여있었다.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에 계속 눈치만 살피느라 얼어있을 거다.

나는 화장대로 가서 앉았다.

몸단장을 시작하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시녀들은 할 일이 생겨 다행이라는 얼굴로 몸단장을 돕기 시작했다.

화장대 위에는 고급스러운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안에 든 것은 백지수표였다.

이걸로 생일은 잘 마무리됐네.’

얻고자 한 것을 얻었다.

이제 수표를 쓸 일이 생길 때까지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