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굳은 얼굴로 손을 풀어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풀어.”
“역시 서고가 나을까요? 요즘 당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까요.”
물리적인 힘도, 마력도 모조리 통하지 않았다.
“이거 풀라고!”
오즈월드는 내 격앙된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우 양의 반응은 언제나 저를 보람되게 하는군요.”
미친놈. 독재자. 역겨운 양아치.
나를 집어삼켰던 무력감은 거대한 불길 앞의 물방울처럼 증발해버렸다.
대신 내 안을 가득 채운 건 증오에 가까운 분노였다.
또 익숙하게 나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때맞춰 나를 시궁창에 처박은 장본인이 나타나 주다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증오를 표출할 생각은 없었다.
이 남자에게 난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하찮은 미물에게는 그에 맞는 행동 방식이 필요한 법.
이 남자는 내가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더럽게 꼬인 성격이었다.
난 차라리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제대로 에스코트 받기로 했다.
“서고로 가.”
오즈월드는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죠, 지우 양.”
우리는 한 쌍의 연인처럼 복도를 걸었다.
오즈월드가 나타날 때마다 현실의 시간은 멈추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전부 영상을 일시 정지해놓은 것처럼 멈춰 있었다.
지나치게 현실성이 떨어져 오싹한 괴리감이 드는 광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던 걸까?
오즈월드의 시선이 잠깐 내 손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 공부는 재미있습니까? 마도학이 발달한 차원의 지식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마법은 요즘 가장 흥미로워하는 주제였다.
그러나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혹시라도 이 빙의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말은 조금도 내뱉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주제를 돌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채널 등급은 몇 단계까지 있지?”
“브론즈부터 다이아까지 총 5단계가 있습니다. 채널 등급이 오를 때마다 최대 후원 금액도 10배씩 뜁니다.”
‘실버 채널은 최대 1,000코인씩 후원받는다는 말이네.’
다이아 등급까지 올라 봤자 100만 코인이었다. 그것도 후원 최대치가.
그걸로 어떻게 10억 코인을 모아서 소원권을 산다는 거지?
“소원권을 산 BJ가 있기는 있어?”
내가 의심스럽게 묻자 오즈월드가 별거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제가 선택한 BJ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억 코인을 벌어 소원권을 샀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전혀 고맙지 않은 독려였다.
그때 오즈월드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빙의에 적응했습니까? 꽤 적극적이로군요.”
내 속내를 꿰뚫으려는 듯 깊게 틀어박히는 시선이 불쾌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10억 코인이 필요해져서.”
오즈월드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으로 향했다.
“좋은 현상입니다. 오늘 보아하니 금방 성장할 것 같긴 하네요. 굉장히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도 하고요.”
그는 자신의 선택을 완벽히 신뢰하고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에 깃든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이 너무도 굳건해서 배알을 뒤틀리게 했다.
나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주제를 바꿨다.
더는 이 남자의 품평하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성좌들은 지구에서 사용하는 밈에 익숙한 것 같던데, 어떻게 그렇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게 초월 번역되는 부분도 있고 실제로 지구의 밈을 많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쪽이 미디어 콘텐츠가 가장 발달한 문명이라서요.”
오즈월드의 설명이 딱 끝맺어졌을 때 우리의 걸음도 멈췄다.
서고에 도착한 까닭이었다.
“들어갈까요?”
끼이익.
기름칠을 제때 해놓지 않은 문이 미약한 소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그제야 내게 강제되었던 힘이 사라지며 오즈월드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쳐버리면 섭섭하잖아요.”
오즈월드는 그런 내 행동에 뭔가 자극받은 듯,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한 속도로 다가왔다.
“이제 더 묻고 싶은 게 없을 뿐이야.”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고.
이내 등 뒤로 테이블에 마구잡이로 쌓아둔 책이 턱 걸렸다.
와르르!
한 곳에 대충 쌓아놓았던 책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 남자는 까마득하게 컸다.
게다가 슈트를 입었음에도 위협적으로 단련된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절로 피식자의 본능을 깨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용건이 있다면, 말해.”
배우도 아닌 내가 뛰어난 연기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즈월드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본심을 숨기기가 더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용건?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럼 왜 나타난 건데?’
“저는 채널 관리자이니 지우 양을 자주 살펴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좋아하던데.”
무엇을?
내 눈빛에서 의문이 느껴진 건지 오즈월드가 답했다.
“BJ들은 채널 관리자인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데, 지우 양은 아닌가요?”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 머뭇거림을 본 오즈월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닌가 보네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무서워.”
나를 꼭꼭 감추려 애쓰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치부처럼 느껴지는 속내를 꺼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뿐이야.”
변명처럼 덧붙인 뒷말이 거짓인 건 분명 티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즈월드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직도 본인의 위치를 깨닫지 못했군요, 신지우 양.”
그의 손가락이 귓바퀴를 지나쳐 턱선을 타고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당신과 저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
“장난감이잖아요. 지우 양은.”
오즈월드는 손가락으로 맥박이 뛰는 자리를 지그시 눌렀다.
“당신의 역할을 잊지 마세요. 사랑받고 싶으면.”
빌어먹을 새끼.
오즈월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가볍게 혀를 찼다.
“더 상대해주고 싶지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광고가 길어졌네요.”
딱!
지팡이가 바닥을 찍자 전에 느껴본 미약한 정전기가 느껴졌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신호였다.
“앞으로는 당신을 테레제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그편이 본인 처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테니까요.”
“…….”
“다음에 또 보죠.”
오즈월드는 내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떠났다.
인사랍시고 한 짓이겠지만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나는 더러운 게 묻은 양 뺨을 거칠게 닦고 또 닦았다. 피부가 마찰로 인해 붉게 달아올라 쓰라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두 눈은 오즈월드가 사라진 자리에 붙박였다.
‘널 무너뜨릴 방법이 있다면 절대로 망설이지 않을 거야.’
* * *
“도노반.”
공작의 나직한 부름에 집사인 도노반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라울은 시가를 즐겨 피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볼 일이 생기거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을 때는 꼭 한 대쯤 끄트머리를 싹둑, 잘라내 불을 붙이고는 했다.
보통은 테레제 때문에 시가 케이스 안에 빈자리가 생겨났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내가 테레제에게 그토록 무심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애쓰셨지요.”
라울은 흠뻑 빨아들인 연기를 옅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그의 눈이 잠시간 허공을 맴도는 연기를 응시했다.
우묵한 시선은 연기에 닿아있으나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가 틀린 적 없다고 생각했네, 도노반. 그런데 오늘 그 아이의 눈을 보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어.”
라울은 온실에서 피운 꽃으로 장식한 다이닝룸의 화사하고 향기로운 정경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 전에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자신의 장녀도.
요즘 테레제는 조금 이상했다.
리비가 아닌 자신이 진정한 스콰이어 공녀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언제나 그랬듯 패악을 일삼을 줄 알았다.
폭풍전야일까?
그렇다기에는 테레제는 지금까지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내 속을 긁으려는 새로운 방식인가 의심도 해보았네.”
테레제는 그동안 원하는 것을 얻고자 단식투쟁, 칩거, 가출 등 속 썩이는 자식이 하는 행동은 전부 해왔다.
“한데 뭔가 이상해.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달라.”
사색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아이였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본능만 있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구제불능.
라울이 이미 오래전 테레제에게 찍은 낙인이었다.
“아가씨도 이제 22살이잖습니까.”
“……그렇지. 22살이나 되었군.”
라울은 테레제가 오늘이 제 생일이라고 말하던 순간이 좀처럼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듯한 눈. 메마른 표정. 텁텁하게 흘러나오던 목소리.
끔찍한 죄를 자백하는 죄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