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밥만 먹고 나갔다가는 터져 나오기 시작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질 것 같았다.
정작 당사자인 내가 아무렇지 않은데 성좌들이 난리인 게 어이없기는 했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성가시지만 뭐라도 해야지.
나는 두툼한 고기를 썰며 지나가는 투로 툭 말했다.
“아버지. 저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용돈이 필요해요.”
라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오늘처럼 좋은 날에 화내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중에 말하거라.”
더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성 다분한 어조였다.
하지만 테레제는 겨우 그런 걸로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지.
“그럼 언제 말씀드리면 될까요? 개강하기 전이면 좋겠는데요.”
라울은 도통 철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딸을 향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 동생이 막 돌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뭘 사고 싶다느니 용돈을 달라느니 그딴 소리나 하고…!”
“오늘 제 생일이잖아요.”
나는 최대한 여상스럽게 말하며 빈 수프 접시를 가리켜 하인에게 더 채우라 명했다.
생일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젠장.’
한데 입안이 깔끄러워 고깃덩어리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우습게도 스스로 역린을 건드려버린 탓이었다.
사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직접 말하는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네 생일이 중요하니? 내일 콩쿠르에 나가는 네 동생을 축하하는 자리잖아. 케이크가 먹고 싶은 거면 여기 있으니까 제발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날이라는 걸 확인받는 일에 불과할 뿐이니까.
‘체할 것 같아.’
수프조차 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고요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라울의 노기는 한결 누그러졌으나 약간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게 따로 찾아왔으면 되지 않았겠느냐.”
따로 찾아가? 그런 게 통할 리가.
<신의 유희>는 내 바람을, 또한 내 경험을 다수 녹여낸 시나리오로 진행되었다.
테레제의 불행에는 내가 경험한 것들이 녹아 있다는 말이었다.
리비가 사라지고 나서 5년.
주세페가 태어나고 나서 3년.
그 밖에도 여러 이유로 테레제의 생일은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지나갔다.
테레제의 깊은 원망과 새 가족을 향한 분노가 그냥 생겨난 것은 절대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장녀라니.’
너무 내 이야기 같았기에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었다.
지금은 그 짓거리를 한 게 너무도 후회되었다.
이렇게 테레제에 빙의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딴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입안의 속살을 깨물며 축 가라앉은 기분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싶었으니까.
“어차피 제 생일인 것도 모르실 텐데, 그렇게 했으면 번거로우셨을 거잖아요. 저도 말씀드리지 않으려다가 필요한 게 생겨서 부득이하게 이야기 꺼냈어요.”
라울이 멈칫했다.
일순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네 나이가 몇인데 생일 따위로 아비를 탓하느냐?”
라울의 반응을 보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려고 했지만, 나도 경황이 없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라울이 저를 탓하는 말로 들은 걸 보면.
“생일 따위…….”
나는 입술을 힘없이 다물었다.
이해했다. 그의 말도, 심정도 다.
라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엄한 듯해도 리비에게는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으니까.
테레제야 워낙 개망나니라 혹독하게 대하는 거였다.
거기다 정략혼으로 인해 의무감으로 낳은 아이이기도 했고, 그 아이가 영 사랑스럽지 않기도 했으니 그런 것이리라 이해했다.
‘누굴 원망하겠어. 내가, 우리 팀이 그렇게 설정했는데.’
그래서 정말로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좀 피곤할 뿐.
“제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네요. 아, 대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될까요? 생일선물은 이 허락으로 대신하고 싶은데요.”
만일 내 말투에 빈정거림이 있었다면 라울은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금방 호통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내가 전에 없이 담담하고 차분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 듯했다.
라울은 잠깐 침묵했다.
‘화난 건가.’
묵직한 시선만으로는 라울의 기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명확한 명분도 없이 테레제를 내칠 수는 없겠지만, 괜히 호감도를 더 떨어뜨리는 짓은 그만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아. 그냥 조용히 닥치고 식사하는 척이나 하자.’
꼴 보기 싫으면 돌려보내겠지.
차원의 열쇠를 살 돈은 테레제가 가진 패물을 좀 팔면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지으며 시선을 막 내렸을 때였다.
“그딴 걸 선물로 줄 마음은 없다.”
화가 묻어난 목소리였다.
한데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화가 나를 향한 건 아닌 거 같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피곤하면 먼저 올라가 보아라. 도노반에게 백지수표를 끊어 보낼 테니 대금은 그것으로 치르고.”
백지수표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테레제한테 덥석 주려는 거지?
거북할 만큼 과한 선물이었다.
“아뇨, 백지수표까지는-”
“너는 스콰이어 공녀다. 생일선물로 고작 백지수표가 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냐?”
당연히 과했다. 스콰이어 가문에서 발행한 수표는 당장 광산도 매입할 수 있으니까.
하나 나는 눈치 없이 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목적도 달성했고,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화목한 가족 사이의 이물질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부디 가족들과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자리를 떠나기 전에 리비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리비에게 무척 뜻깊은 날이었을 텐데 나로 인해 분위기가 망쳐진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축하해, 리비.”
그래서 아까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축하를 건넸다.
“아, 네……! 고마워요, 언니.”
그다음, 오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로잔에게 가벼운 묵례를 한 후 미약한 체기를 느끼며 다이닝룸을 빠져나왔다.
후원창이 폭발한 것은 그때였다.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맛있다… 더 줘…]
띠링!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제발 채널 등급 좀 올라라ㅠ 브론즈는 한 번에 100코인만 쏠 수 있어서 답답해 죽겠음]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남주도 안 나오는데 꾸역꾸역 이 방송을 보는 내가 레전드]
띠링!
[성좌 ‘스겜하자’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분위기 어쩔 건데? 하… 나는 여기 눕는다]
띠링!
띠링!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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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코멘트 없이 코인만 보낸 것도 수두룩했다.
미친 듯이 울리는 알림 소리가 만족한 공연을 본 관객의 우레 같은 박수갈채처럼 느껴졌다.
철저히 나를 제외한 축제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새로 뜨는 시스템 창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최단기간 후원금 10,000코인 달성!]
[새로운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새로운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새로운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채널 등급 브론즈▶실버 승격]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미움이 두렵고 무관심이 서러운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임에도 나는 그게 지나치게 두렵고 서럽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벗어났는데.
이제야 겨우 혼자 오롯이 있는 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는데.
이 세계는 나를 극단적으로 내몰았다. 도망칠 곳도 없는 낭떠러지로 말이다.
사랑받도록 노력하라고. 애정을 갈구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넌 가치가 없다고.
‘속이 메스꺼워…….’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력감이 나를 옭아매어 깊은 늪으로 끌고 내려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뱀처럼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제가 큰 기대를 걸고 있는 BJ답네요. 신지우 양.”
“…!”
본능적인 위협감에 소스라치며 피하다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만큼 휘청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즈월드는 내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며 부드럽게 바로 세워주었다.
누가 보면 특별한 사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죠.”
하나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단지 값어치 있는 도자기가 깨질까 염려하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얼른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놀란 심장이 크게 수축했다 뛰기를 반복했다.
“왜, 온 거야?”
나는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을 꾹 주었으나 스스로도 긴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오즈월드는 가늘게 웃으며 퍽 친절하게 답했다.
“잘나가는 방송에는 광고가 붙기 마련이거든요.”
아직 순위에도 들지 못한 방송이 잘나가? 시답잖은 소리였다.
내가 잘게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오즈월드가 딱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군요.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침실로 갈까요? 아니면 서고?”
그러고서는 내게 에스코트를 청하는 신사처럼 팔을 내밀었다.
나는 맑은 핏방울처럼 붉은 양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가 막혔다.
내가 이 팔을 선뜻 쥐리라고 여기는 태도가. 그 오만이.
“조금 얹힌 것뿐이야.”
나는 명백한 거절 의사를 내비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아. 정말 귀찮게 구는군요.”
그때 오즈월드가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지팡이를 휙 휘둘렀다.
“읏?!”
내 육신은 의지와 상관없이 오즈월드의 팔을 감으며 완전히 기대었다.
차게 식은 손바닥 아래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틀림없이 피가 차가우리라 생각했는데, 사람처럼 따뜻했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