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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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로잔에게 용건을 물었다.

    어쩐 일이신가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러보았단다.”

    로잔도 내가 리비를 찾았다고 말한 것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토록 굳은 표정으로 테레제를 찾아왔으리라.

    게다가 방까지 바꾸고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이 방을 쓰고 있으려니 부담스러워서요가장 좋은 방인데 리비가 써야 하지 않겠어요?”

    …….”

    로잔은 공작부인답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엄숙한 자세였으나 내 말에 여린 살갗 위를 손톱으로 확 긁어내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손톱이 조금이라도 날카롭다면 틀림없이 상처가 남을 정도였다.

    그만큼 리비는 로잔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멍울이었다.

    만일 리비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 방은 네가 써야지스콰이어의 장녀인데.”

    그렇게 말하는 로잔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시선에는 짙은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하여 예쁜 연두색 눈동자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안타깝기는 했지만 특별한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가족도 아니었고이곳 사람들은 테레제에게 위협이 되기까지 했으니까.

    리비가 돌아오면 공작가의 후계자 후보가 더 느는 셈이다.

    장녀라는 점 외의 어떤 특장점도 없는 테레제는 순식간에 후계자 후보군에서 밀려날 터였다.

    하지만 세간의 눈이 있으니 그냥 후보에서 끌어내릴 순 없을 테고 어떻게든 결정적인 흠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테레제가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게 원래 시나리오였으니.

    꼭 가문과 관계가 없더라도 로잔은 테레제가 제 딸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나는 공작부인의 설정에 꽤나 공을 들였었다.

    마냥 자상하고 온화해 보이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는 어머니.

    그것이 양딸을 죽이는 일이 될지언정 말이다.

    스콰이어 공작저에서 버티고 있다가는 공작부인의 손에 알게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루트가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니 난 반드시 안전하게 스콰이어 공작저를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는 내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들한테도 내가 순순히 꺼져주는 편이 훨씬 행복할 테고.’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새어머니.”

    로잔은 완전히 허를 찔린 듯 놀란 표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테레제는 로잔을 꼬박꼬박 공작부인이라 칭하며 단 한 번도 새어머니라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새어머니라는 호칭을 쓴 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거나 극적인 화해 노선을 타고자 함이 아니었다.

    애써 저를 위하려고 하실 것 없습니다어차피 저는 집안사람들과 살갑게 지낼 마음이 없으니까요.”

    그냥 더욱 확실하게 선을 긋기 위함이었지.

    그렇다고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요.”

    혈족이라는 미명하에 어쩔 수 없이 엮여버린 의무감 정도로만 서로를 대하자는 뜻이었다.

    로잔은 제 권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늘 난폭하게 굴고 발악하던 테레제가 차분하다 못해 서늘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영 낯선 듯했다.

    그녀는 한층 경계가 강해진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질척거린 것은 테레제였다.

    당신이 뭔데 엄마 노릇을 하려 드냐고자작가 여식 주제에 감히 공작부인 행세를 하느냐고 폭언을 일삼으며 집안의 불화를 조장해왔다.

    이런 일들을 한순간에 없던 것처럼 할 수는 없을 터.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테레제다운 발상이 필요했다.

    새어머니께서 이기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제가 졌다고요저는 후계자의 방을 썼지만 결국 후계자가 되진 못했잖아요그런데 리비가 돌아오면 어떻겠어요?”

    실제로 리비는 어렵지 않게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다.

    스토리 진행상 반드시 이루어지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억울하냐고?

    천만에.

    갑자기 빙의됐는데 앞으로 자신에게 공작가의 명운을 책임질 후계자 자리를 주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냐고.’

    그 대신 돈은 많고 아무런 책무가 없는 개망나니 재벌 2세가 되는 쪽이 훨씬 낫지.

    나는 어깨를 얕게 으쓱거렸다.

    전 여기서 나갈 생각이에요그러니 후계자의 방을 넘겨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집을 나간다고?”

    로잔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럴 테지테레제는 죽어도 기숙사에 묵으려 하지 않는 애 거든.

    기숙사도 엄청 예쁘게 디자인해뒀는데아무래도 태생부터가 고귀한 귀족인 테레제의 눈에는 서민이나 사는 빌라처럼 보였겠지 뭐.’

    애초에 기숙사를 이곳 공작저와 비교하는 게 우스운 일인데 말이다.

    들인 품이 다르다고들인 품이.

    발할라 기숙사 신청을 하려고요졸업할 때까지 집에 돌아올 일은 없을 거예요.”

    발할라는 테레제가 재학 중인 마법 학교 이름이었다.

    <신의 유희>는 보통의 미연시가 많이들 채택하는 학원물이었다.

    그것도 무려 판타지 마법 학원물.

    유럽의 예쁜 건물만 모아놓은 듯한 수도의 정경.

    창공을 노니는 흰 비둘기.

    광장의 시계탑.

    그리고 교복.

    여주인공이 다니는 마법 학교는 대학교를 모티브로 만들었지만교복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학원물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남주 후보들과의 사랑.

    감미료처럼 첨가된 어드벤처.

    오즈월드의 말대로 전형적인 클리셰였지만보장된 맛집이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주인공으로 플레이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테레제는 마법 학교의 4학년으로졸업반이다.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될 리비와는 단 1년만 같이 학교에 다니게 될 테지만 고작 1년이라고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게임에서는 딱 그 1년만 다루거든.

    남주 후보 중 무려 두 명이 테레제와 같은 4학년이라 스토리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발자들 사이에서 남주 후보로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너무 팽팽했던 탓이다.

    아무렴학원물인데 학생회장 캐릭터는 포기할 수 없지.’

    나는 이 사태를 구경하던 사용인들과 눈을 마주쳤다.

    뭣들하고 있지이래서 리비가 오기 전에 방을 완성하겠어?”

    이쪽으로 가구를 옮겨카펫을 밀어 봐!”

    사용인들은 그제야 다시금 일에 열중하는 척 다들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로잔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 뒤는 새어머니께서 확인해주세요저는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래그러렴.”

    꾸벅.

    나는 적당히 예를 갖춘 뒤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빠르게 방을 나왔다.

    얼핏 로잔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배고프다…….”

    눈떠서 지금까지 먹은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

    띠링!

    [성좌 먹방BJ찾는중’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제발 뭐라도 먹어줘ㅠ 그럼 500코인 쏠게]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니까 순순히 요청을 들어줘 볼까?

    나는 지나가는 사용인을 불러세웠다.

    거기잠깐만.”

    사용인은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내게 서둘러 다가왔다.

    말씀하십시오.”

    내 방으로 요깃거리 좀 가져 와줘.”

    알겠습니다.”

    사용인은 별거 아닌 용건에 안도하며 재빨리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 이게 악역의 삶인가.”

    우스운 취급은 당해봤어도 누군가가 나를 두려워하는 건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위엄에 굴복한 게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피하려는 태도이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네.”

    어쨌든 쉽게 무시당할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은 약간 마음에 들었다.

    [성좌 혼돈악’ 님이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성좌 질서선’ 님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근데 이 채널은 어제 막 생겨났는데도 보는 분이 많은 것 같네요?”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ㅇㅇ 오즈월드 채널이라 그럼 채널 관리자 중에서도 초네임드임.]

    그 양아치… 아니그 관리자가 초네임드라고요?”

    인물이 정말 없나 보다.

    [일부 성좌들이 BJ의 양아치 발언을 좋아합니다.]

    [성좌 잘생긴 관리자는 추방해’ 님이 오즈월드의 얼굴 영업력도 이제 끝이냐며 낄낄거립니다.]

    성좌가 신 같은 거 아닌가……?

    그런 존재도 남의 외모를 질투하나 보다.

    하긴지금껏 뜬 닉네임들만 봐도 다 정상은 아니야.’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그냥 지구의 시청자 같은 느낌이었다.

    실수로 양아치라고 불러버렸는데 오히려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네.’

    아무튼.

    나는 방으로 돌아가며 현재 상황을 점검해보았다.

    우선 시점부터.’

    아까 방을 옮기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2월 15.

    3월 1일 신입생 입학식까지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문제없이 잘 지내다 기숙사에 들어가면 스콰이어 가문과 얽힐 일도 끝.

    리비랑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엮여야겠지만.’

    남주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에 데리고 가서 풀어놓으면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겠지.

    내가 복도 맨 끝의 방문 앞에 서자 하인들이 문을 열었다.

    방을 들어가면 내 단칸방보다 훨씬 큰 응접실과 함께 중문이 보인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응접실보다 더 큰 침실이 나타났다.

    귀족의 저택이란 참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침실로 따라 들어오려던 시녀들에게 밖에 있으라고 명했다.

    혼자서 확인해볼 게 있거든.

    풀썩!

    나는 라울이 봤다면 틀림없이 혼냈을 방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발을 까딱거렸다.

    돈과 권력이 좋긴 좋네.”

    [성좌 혼돈악’ 님이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성좌 질서선’ 님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오즈월드가 다루는 채널이 정확히 어떤지는 몰라도 질서선이라는 성향과는 정반대일 건 확실했다.

    질서선이라면서 애초에 악역이 BJ인 채널에 왜 들어오지?’

    사소한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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