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적막을 깨뜨린 것은 시스템 창이었다.
[성좌들이 지루한 도입부에 염증을 느낍니다.]
나는 죽은 물고기 같은 눈으로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대체 몇이나 되는 성좌들이 날 주시하고 있을까?
그 생각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을 위해 재롱을 부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차가운 금속으로 된 사슬처럼 전신을 옭아맸다.
곧 느슨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이 흘렀다.
나는 <신의 유희> 개발자다.
그런 만큼 이 세계관이 얼마나 철저히 여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여주는 숨만 쉬어도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런 여주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사망 플래그를 깔아둔 악역이 테레제였고.
그런 테레제로 뭘 하라고?
‘죽지 않기 위해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
살기 위해 가족들의 애정을 구걸해야 했던 지난날과 다를 게 없었다.
정말이지 구역질 났다.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남주 언제 나옴?]
마치 너튜브 도네이션처럼 후원창이 떴다.
이런 식으로 후원을 통해 내게 직접 말을 걸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야말로 참신하고 획기적인 지옥이라 생각했다.
날 이딴 세계관의 악역으로 빙의시킨 오즈월드는 악마 새끼였고.
방송을 끝내려면 <신의 유희>를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끝까지 플레이해서 진엔딩을 봐야 한다.
막막했다. 대체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이 상황도, 닥쳐올 죽음도, 그로 인한 페널티도 전부 나를 공황에 빠뜨렸다.
난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굳세게 헤쳐나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냥 게임이나 만들던 평범한 개발자에 불과하다고…….
“……잠깐만.”
‘퀘스트 내용에 남자주인공과 이어져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퀘스트 내용을 살폈다.
[퀘스트: <신의 유희> 하드 모드로 진엔딩 보기]
“…!”
역시 남자주인공과 이어지는 엔딩이어야만 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러면 방법이 있어.’
외려 내가 테레제에 빙의했기에 하드 모드가 완전 최악은 아니었다.
남자주인공과 이어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진엔딩 [낙원]이 하드 모드에만 존재하거든.
나는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방금 ‘로맨스패스’라는 성좌가 남주를 찾던 것과 이 방송의 장르가 로맨스임을 고려했을 때, 누구도 이딴 엔딩을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심지어 이 엔딩을 만들어낸 우리 개발팀도 단지 서비스 차원에서 넣은 곁다리에 불과했으니까.
[낙원]은 찾기만 하면 당장 엔딩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성좌들이 원하는 걸 보여주며 10억 코인을 모아서 지구로 튈 생각이었다.
설령 10억 코인을 모으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낙원만 간다면 방송이 끝날 테고. 테레제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 모두 해결된다면, 그녀로 사는 삶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고민했다.
‘낙원을 찾으려면 우선 외출 금지령부터 풀고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해. 테레제에게 스콰이어 공작저는 사망 플래그 천지야.’
공작저에는 테레제를 미워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당장 부친인 라울 스콰이어부터가 테레제를 몹시 싫어하니까.
지금은 여주인공이 공작저를 들어오기 직전인 게임 스타트 지점이었다.
여기서 개망나니 테레제가 점수를 딸 방법은 하나였다.
나는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방을 나갔다.
목적지는 라울의 서재였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40분.
이때 공작은 늘 서재에 있거든.
사용인들은 잠옷 차림으로 활보하는 날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용건을 말씀해주시고 예의를 갖춘 차림으로 다시 오시면……”
나는 집사를 지나쳐 막무가내로 서재에 들어갔다.
벌컥!
“아버지!”
“…테레제?”
라울은 잠옷 차림의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호통치기 전에 내가 먼저 숨 가쁘게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리비가 살아있어요.”
라울은 잠깐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뭐라고?”
그래. 믿기 어려울 것이다.
“다운 타운에서 제가 직접 봤어요. 평민들이 보는 유랑극단의 단막극에서 새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여자애를요.”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다급히 만류합니다.]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왜 BJ가 불리해질 짓을 하느냐 꾸짖습니다.]
그러자 다른 성좌가 후원창을 띄웠다.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굳이 후원까지 하며 웃는 걸 보니 곯려주려는 의도인 듯했다.
라울은 선뜻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맹세해요. 사실이 아니라면 스콰이어의 권한을 박탈시키셔도 돼요.”
공녀의 권한을 박탈시켜라.
테레제에게는 저를 죽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그 정도로 세게 나가자 라울은 마냥 허튼소리 취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덥석 믿어주기에는 사안이 너무나도 중대했다.
“그걸 이제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울은 테레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테레제가 배다른 여동생을 절대 기꺼워하지 않을 테니 설령 사실이라 해도 리비의 행방을 알릴 리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설정되어 있으니까.
내게는 라울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확실히 조사한 다음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셨잖아요.”
“그래서.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외출 금지령을 풀어달라는 뜻이더냐?”
“네.”
동생의 안위를 건 하찮은 거래.
이게 딱 테레제다운 발상이자 행동이었다.
[성좌들이 탄식을 쏟아냅니다.]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이게 자신이 바라던 거라며 소리칩니다.]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출생의 비밀은 없냐고 묻습니다.]
라울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너는 하인에게 내 명을 전달받지도 않고 기껏 한다는 짓이 부모의 슬픔을 쥐고 흔드는 일이로구나.”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딸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절망에 가까운 기대를 내비쳤다.
라울이 집사를 불렀다.
“도노반, 다운 타운을 방문한 유랑 극단을 샅샅이 뒤져… 아니다. 내 직접 가봐야겠다. 말을 준비시켜라.”
“예, 주인님.”
대귀족인 라울은 뭔가를 알아보고자 할 때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 잃은 줄 알았던 자식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를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 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저런 게 부모 마음이라는 거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라울은 외투를 챙겨입으며 나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테레제 넌 사실을 확인할 동안 근신하고 있거라.”
“네.”
“…….”
그는 내가 반발할 줄 알았는지 잠깐 멈칫했다.
“주인님?”
외투를 입혀주던 시종이 의아하게 부르자 그제야 표정을 갈무리하며 팔을 마저 꿰었다.
라울이 집사와 함께 서재를 나가고 나는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공녀라기에는 꽤 초라한 취급이었다.
나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손바닥에 땀이 차 있는 걸 발견했다.
향후 안위를 건 협상을 하느라 긴장했던 건지, 아니면 라울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라울이 리비를 찾으러 저택을 비운 동안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내 방을 빼는 일이었다.
“거기. 그 가구는 왼쪽으로. 잠깐만, 화장대를 여기다 두면 거울에 빛이 반사되잖아. 반대편으로 옮겨.”
“예, 아가씨.”
테레제는 공작 부부 다음으로 가장 좋은 방을 쓰고 있었다.
자식 중 가장 좋은 방을 쓴다는 것은 곧 가문의 후계자라는 뜻이기도 하였으니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나는 테레제의 짐을 몽땅 가족들과 마주칠 일이 잘 없을 만한 구석으로 옮겨버렸다.
“그 화병은 창가 콘솔에다가 둬.”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건 어디에 둘까요?”
“저쪽 장식장에.”
그러나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새로 옮긴 방이 아니라 원래 쓰던 후계자의 방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가구를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이 오면 바로 쓸 수 있게끔 빨리 정리해두렴. 내 옷 중에 아직 입지 않은 새것 몇 벌은 여기다 두고.”
“알겠습니다.”
나는 리비의 방을 어떻게 디자인했었는지 떠올리며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창작물이 실사화된 모습을 보는 일은 남다른 감회를 주었다.
이 빌어먹을 빙의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내가 이 방을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었는데.’
인테리어 잡지와 시대물 영화를 뒤지고 뒤져서 디자인한 방이라 나름대로 애착을 느꼈다.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나 알았음 ㅋㅋ 이렇게 해서 비밀 통로 같은 거 만들 거지? 보통 그렇게 해서 암살하던데]
이 성좌는 여기가 로맨스 방송이라는 걸 모르고 들어온 건가? 암살이 웬 말인지.
‘그리고 여주를 죽였다가는 그대로 배드엔딩 루트 진입이라고.’
난 누구보다도 여주의 승승장구와 행복을 바라야 할 처지였다.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즈월드가 픽한 인간치고 정상인 애를 못 봤음 ㅋㅋ 좀만 있으면 본색 드러낼걸?]
‘틀린 말은 아니지.’
낙원으로 갈 방법만 찾아내면 지구든 이 세계의 어딘가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게 성좌가 원하는 종류의 본색은 아니겠지만.
나는 더욱 열성적으로 리비의 방을 꾸몄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친자 검사 신청을 마친 라울이 리비를 데리고 공작저에 돌아올 테니까.
그때 시녀가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황금 장미가 인간이 된 듯 화려한 미인이 경직된 얼굴로 서 있었다.
로잔 스콰이어 공작부인. 테레제의 새어머니였다.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BJ의 행보에 모종의 기대감을 품습니다.]
……모종의 기대감이 대체 뭔데? 김치 싸대기라도 갈기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