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277)
  • Prologue. 사랑받기 위한 노력

    악역이 가련한 여주에게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널 죽여버릴 거야!”

    그만두지 못하겠느냐테레제 스콰이어!”]

    하나여주가 당할 리 없었다.

    이건 악역이자 배다른 언니를 처치하는 장면이니까.

    [“아버지.”

    네 동생을 죽이려 하다니기어이 도를 넘는구나자식이라 해도 더는 널 참아줄 수 없다.”]

    !

    나는 게임을 중지시킨 뒤 플레이타임을 체크했다.

    흐음이번에도 너무 빨리 죽는데.”

    긴 머리가 치렁치렁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잘라 대충 묶은 머리.

    며칠 동안 입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검은 후드티와 청바지.

    햇빛을 보지 않아 창백한 피부와 온종일 모니터만 보느라 퀭한 눈.

    방구석 폐인이라고 볼 수도 있는 몰골이지만나는 게임 개발자다.

    팀원이 모두 퇴근한게임 회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규모의 작업실에서 나만 덩그러니 남아 며칠째 철야 중이었다.

    현재 제작 중인 게임의 이름은 <신의 유희>. 역하렘 게임이었다.

    어느 공작의 잃어버린 딸인 주인공이 다시 가족을 찾아 사랑받으며 잘생긴 남자주인공들과 호감도를 쌓는단순한 스토리였다.

    게임은 오랜 시간 열정을 모조리 투자해 만든 만큼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악역이 너무 빨리 죽는다는 거였다.

    나는 악역을 단순하게 설정했다.

    사랑받는 주인공의 포지션을 극대화하려면 질투심 많은 배다른 자매를 집어넣는 게 가장 쉬웠으니까.

    빈민가에서 고생한 주인공과 달리 태생부터 고귀한 귀족이라 뼛속 깊이 내재 된 선민사상과 권위주의.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포악해지는 성격이기심무례함오만…….

    안 좋은 건 일단 다 때려 넣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인지 플레이 도중 너무 쉽게 처리당하는 악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는 도통 긴장감을 줄 수가 없었다.

    남자 주인공들이 활약할 건수도 부족해졌고.

    못해도 스토리 중반부까지는 가도록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데…….”

    나는 피로감에 물든 눈가를 문지르며 모니터 속 악역, [테레제]를 응시했다.

    흑발과 은회안의 걸작처럼 아름다운 여자.

    모든 걸 가진 듯 보이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악역 영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한쪽이 사랑받으려면 어느 한쪽은 사랑받지 못하게 되는 건가.

    그래서 사랑이 특별한 건가싶어서.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리비]에게 닿았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내가 만든 모두에게 사랑받는 주인공.

    그래서인지 좀처럼 이입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차라리 악역 쪽 서사가 더 납득갈 판이었다.

    ……하아피곤하긴 한가 보네별 쓸데없는 감상에나 젖고.”

    나는 재혼가정의 장녀였다.

    어머니는 8살이나 된 딸을 데리고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다.

    새아버지에게도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딸 하나아들 하나.

    그들은 새어머니라는 존재는 인정했으나 끝끝내 나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새아버지에게 쓸만한 딸임을 입증받으려 애쓸수록 동생들은 나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그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동생들에게 뭐든 양보했고 필요하다면 보살폈고 그들의 억지 요구를 참고 들어줬으며 부당한 대우를 견뎠다.

    기꺼이 스스로 편리한 딸이자 이용하기 좋은 언니와 누나가 되었다.

    아니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여러 번 느꼈으니까.

    그래서 버림받지 않게 더 필사적으로 굴었던 것 같다.

    징그러운 나날이었다.

    나는 어느덧 새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게조차 말을 잘 들어서 부려 먹기 좋은 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지쳤니?’

    …….

    단순히 그렇다는 대답은 마땅치 않았다.

    빛바랜 기억 속, 3년째 내 생일은 아무것도 아닌 날로 흐르고 나서야 포기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어린 시절부터 지쳐있었으므로.

    그간 나 역시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하나 동생들의 유년기 추억을 보관해놓은 장식장 속 낡은 인형과 이젠 작동하지 않는 오래된 게임기 따위를 보면 말문은 금세 막혀버렸다.

    그곳에 내 장난감은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만이 아쉬웠고 나만이 노력하는 관계라는 걸.

    그렇게 20살이 되었을 때가족이라 칭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런데도 아픈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던, ‘신지우로 나이만 먹어갔다.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이 찍혀버린 불량품이 된 기분이었다.

    !

    나는 뇌리를 부산스럽게 하던 상념을 떨쳐내고자 다시 게임을 시작 지점으로 되돌렸다.

    어떤 루트를 통해도 결국 죽을 운명인 악역을 점검해보기 위해서였다.

    [불러오는 중]

    이제는 하도 들어 지겹기 그지없는 오프닝 곡이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 왜 이렇게 어지러……?”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

    !

    내 머리가 아래로 처박히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히 들려왔다.

    그게 내가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 * *

    깨워라.”

    중후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사용한 언어가 낯설지만이상하게 이해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

    촤악!

    푸웃!”

    나는 난데없는 물벼락에 정신없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뭐야?!”

    정신이 드느냐?”

    나를 깨우라던 목소리에 시선이 절로 옆을 향했다.

    흑발과 은회안을 지닌기품 있는 외모의 중년이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힘없이 벌리며 몹시도 낯익은 남자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라울……?”

    라울 스콰이어 공작.

    스콰이어 공작가의 가주이자 <신의 유희여자 주인공의 아버지였다.

    아비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 아직 술을 덜 깬 모양이구나공녀에게 물을 한 잔 더 끼얹거라.”

    그러자 라울 공작의 곁에 있던 심복으로 보이는 자가 찬물을 한 잔 따라 내게 끼얹으려 했다.

    잠깐!”

    나는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라울을 망연히 불렀다.

    아버지……?”

    라울이 내 아버지라고?

    그럼 난 누구지?’

    라울은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실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술이 깨느냐?”

    나는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술 냄새가 진동하더라니방 안에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걸 다 가 마신 건지 머리도 깨질 것 같았다.

    내 이해는 거기까지였다.

    도무지 그 이상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내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때였다.

    띠링!

    [채널명을 설정하시면 방송이 시작됩니다.]

    추천: BJ악역영애 [확인]

    ……시스템 창?’

    나는 눈을 비볐다.

    그래도 시스템 창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거 너무 클리셰잖아.’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과 익숙한 외모의 외국인.

    그리고 어딘가 달라진 듯한 내 몸.

    서브컬쳐에 능통한 게임 제작자로서 낯설지 않은 전개였다.

    설마… 게임 빙의라고그게 말이 돼?’

    이런 일을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거지 같은 현실을 벗어나 게임이나 소설에 빙의하게 되면 어떨까하고.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상상이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에 맘 편히 해볼 수 있는 그런 것.

    하지만 이건…… 절대 상상 같은 게 아니야.’

    턱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의 감각.

    빌어먹을 숙취가 주는 두통.

    코끝에 짙게 풍기는 술 냄새.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날 차갑게 비웃듯 모든 감각이 전신을 날카롭게 일깨웠다.

    나는 일단 확인을 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시스템 창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가 곧장 사망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오랜 클리셰였으니까.

    [방송을 시작합니다.]

    ……근데 방송을 한다는 건 뭐지?

    정황을 보면 난 지금 내가 제작 중이던 게임, <신의 유희>에 빙의했다.

    이 게임은 너튜브 채널처럼 방송을 할 수 있다는 설정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거 꼭 진짜…….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진짜로, ‘의 유희 같잖아.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BJ의 외모에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넋을 빼놓았다.

    분명 뭔가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이해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걸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래서 내가 누구지?’

    심장이 쿵쿵쿵쿵 거세게 뛰었다.

    내 아버지가 라울 스콰이어 공작이며채널명은 BJ악역영애였다.

    그렇다는 건설마설마…….

    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전신 거울을 향해 달렸다.

    당장 이리로 와서 똑바로 서거라그까짓 파혼으로 대체 어디까지 나를 실망시킬 셈이더냐!”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콩가루 집안에 잘 찾아온 것 같다며 흡족해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죄다 기행으로 느껴진 모양인지 라울이 버럭 호통쳤으나 들리지도 않았다.

    말도 안 돼.”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뺨머리카락을 마구 쓸어댔다.

    신의 걸작 같은 얼굴은 숙취로 인해 다소 퀭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퇴폐미로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외모였다.

    라울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과 막내아들 하나가 있었다.

    정략혼으로출산 중 죽은 본처에게서 본 장녀이자 악역, [테레제].

    연애 결혼으로 재혼한 아내에게서 본 이 세계의 주인공, [리비].

    그리고 막내아들 [주세페].

    여기서 중요한 건 ’ 쪽이었다.

    라울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피부가 벌게지도록 문지르던 내 손을 잡아채며 불같이 화냈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테레제!”

    나는 테레제 스콰이어였다.

    주인공인 리비가 아니라사랑받지 못하고 모든 루트에서 죽을 악역이라고내가.

    테레제 스콰이어방학이 끝날 때까지 외출을 금한다.”

    라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웅웅 울리는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았다.

    충격으로 머리가 너무 멍해서귓가가 아득해져서무엇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거짓말이지꿈이지그래꿈일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사랑받지 못하는 장녀가 되는 끔찍한 일이 또 벌어질 리가 없잖아?

    하하하하하…….”

    헛웃음은 곧 잦아들었다.

    대신 형용하기 어려운 뜨겁고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 흐윽…….”

    나는 구겨진 드레스의 가슴께를 잡아 뜯을 듯 꽉 쥐며 무너졌다.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두들겨 맞듯 집어삼켜져앞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눈물을 쏟았다.

    살면서 이토록 극렬한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었기에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

    하필이면 악역에 빙의했냐고!’

    그렇게 두 번째로!

    몹시 당황한 라울의 얼굴을 끝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