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뱀과 야생고양이 (9)
‘하필 송유주가 1등이라니……!’
부들부들-
동탁은 분노에 떨었다.
물론 송유주가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야, 입학식 때도 신입생 대표였으니까.
하지만 의대에 들어와, 전공수업을 족보 없이 시험을 보고 과탑을 먹은 것은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젠장, 이러면…… 이러면 내 권위가 안 생긴단 말이다……!’
눈엣가시라는 표현이 이보다 적절할 수 있을까?
송유주는 학생회의 적이었다.
단 한 명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컸다.
신입생들의 기강을 잡을 때, 송유주 한 명 때문에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 녀석들, 염색 하면 혼난다!
-저기 핑크색 머리 언니 지나가는데요?
-어?
-뭐야, 염색 해도 되나 보네요?
-아니야, 안 돼!
그동안 이런 상황 때문에 혈압이 오른 적이 엄청 많았는데, 이제는…….
-이 녀석들, 우리 말을 잘 들어야 족보도 공유받고 시험 잘 본다!
-저기 말 안 듣는 과탑 지나가는데요?
-어?
-뭐야, 족보 별거 아닌가?
-아니야!!
이런 상황까지 겪어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지끈 아프다.
‘후…… 진정하자. 어차피 그래봤자 혼자 돌아다니는 한 명일 뿐이니까.’
나동탁.
그는 대학생활 7년차였다.
7년 전, 그가 충운대학교 의대에 재학할 때만 해도 학생회장은 엄청난 권위의 자리였다.
그래서 연국대의대의 학생회장이 되었을 때에는, 마치 왕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지금.
마치 손 안에 쥔 모래처럼, 권력이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더욱 주먹을 꽉 쥐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캠퍼스 곳곳에서 오게 된다.
아직은 먼 얘기지만, 생각보다는 빠르게.
* * *
겨울이 왔다.
예과 2학년 겨울방학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시간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좋은 시절 끝났다’고 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조금 과장해서 ‘인생의 마지막 자유시간이 끝날 때’고 표현하기도 할 정도다.
실제로 본과부터는 많은 양의 전공 공부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또한 본1 개강하자마자 보는 시험 또한 겨울방학 중으로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학업에 대한 긴장감을 가진 채 방학을 지내게 되는데…….
지금 이곳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한번에 가재이.”
“제발.”
“잘 해라.”
“너나 잘 해.”
작은 합주실.
여봉철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드럼스틱을 비장하게 올리고 부딪힌다.
-딱, 딱, 딱, 딱!
연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3초 후.
음이 어그러진다.
송유주와 김뱀은 기타 연주를 멈추고 서로를 잡아먹을듯 노려보았다.
“박자 또 틀렸잖아.”
“네가 느렸어.”
“장난하냐?”
“미리 연습 좀 하자. 시간 안 아깝냐?”
또 싸운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따로 없다.
그 모습을 보며, 초보 베이시스트 마동섭과 초보 드러머 여봉철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허…….”
“무슨 연습이 3초를 안 가노…….”
어떻게 저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없는 듀오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저럴 거면 왜 합주를 하는지…….
차라리 체육관을 빌려서 스파링을 하지…….
그렇게 정신없는 연습 시간이 끝난 뒤 합주실에서 나오자, 바깥 세상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으, 억수로 춥네!”
“야~ 눈 온다 눈!”
파닥닥닥!
여봉철과 마동섭은 전생에 본인들이 강아지였다고 주장하는 몸짓으로 튀어나간다.
한편 김뱀과 송유주는 멀찍이 떨어져 건물을 나왔다.
둘 사이에 어찌나 찬바람이 부는지…….
합주를 하지 않는 시간 동안은, 결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범수야~ 이리 온나! 같이 눈싸움 하자!”
“싫다.”
“유주도 이리 와라. 같이 놀자!”
“안 해.”
두 사람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덩치브라더스의 눈싸움을 관전했다.
퍽퍽퍽!
엄청난 소리가 들리는 혈투가 시작된다.
눈싸움으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잠시 후, 송유주가 하얗게 입김을 뿜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말해주면 안 되냐.”
“뭘.”
“진짜로 그때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랬냐?”
“뭐가, 또…….”
“……우리랑 밴드 왜 하러 왔냐고.”
송유주는 아직도 신기했다.
아니,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본인이야, 뭐. 워낙 락 마니아였으니…….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밴드를 한 번쯤 해보고 싶다 생각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밴드 하고 싶다는 기운을 온 사방에 펄펄 풍기고 다녔다.
틈만 나면 학교에서도 일렉트릭 기타를 연습했으니까.
한편 마동섭은…….
-유주가 하자면 해야지. 재미있겠네. 취미활동 하나쯤 필요하긴 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아주 심플한 이유로 흔쾌히 베이스를 맡아주었고.
-야, 드럼 치니까 스트레써 풀리고 좋네! 내 혹시 재능 있는 거 아이가! 재밌다 재밌어!
여봉철 또한 흔쾌히 드럼을 시작해주었다.
고마웠다.
그녀는 자신이 주축이 되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혼자 다니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아무튼 기타와 보컬은 송유주가 동시에 하는 걸로, 셋이서 시작하려 했는데.
김뱀이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갑자기 합주실로 찾아와서는…….
-야, 나도 껴라.
-???
-기타 사 왔다.
……그렇게 된 것이다.
밴드의 이름?
미정이다.
멤버들마다 의견차이가 심해서 아직 밴드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을 정도다.
특히 김뱀 vs 송유주.
이 두 사람은 무언가로 의견 일치를 본 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연습용 합주곡을 3시간동안 골랐으니 말 다 했다.
그런데도 김뱀이 연습시간에 계속 나오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말했잖아, 심심했다고.”
“웃기네.”
송유주는 입가의 미동도 없이 말했다.
“밴드 활동처럼 시간 많이 들어가는 취미를, 단순히 심심하다고 선택한다고? 그것도 네 성격에.”
그러자 김뱀은 김이 서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실토하듯 말했다.
“맞아, 시간 아깝긴 하지.”
“뭐 인마?”
“악기 연습하고 굳이 만나서 합 맞춰보고, 시간 엄청 많이 들어가니까. 특히 너랑 잘 안 맞을 땐, 시간을 돈으로 바꾼 다음 땅바닥에 찢어서 버리는 느낌이긴 한데…….”
송유주는 올~ 하는 눈길로 말했다.
“너 진짜 말…… 정 떨어지게 잘 한다.”
“칭찬이냐?”
“칭찬 같냐?”
“아무튼…… 하던 얘기 계속하면.”
김뱀은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혹시 그 말 기억하냐?”
“……백의신 교수님?”
“그래.”
김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강의 도중 백의신 교수가 보드 위에 적어두었던 문장.
“그때 교수님이, 왜 하필 신입생 예과 수업 때 이 문장을 가지고 왔을까……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항상 물 안에서만 살아가기에, 물의 존재를 모를 수밖에 없다.
아마 백의신 교수는, 이걸 의사들의 인생에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했을 때…….
“물고기가 물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튀어나가야지?”
김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튀어나가본 적이 없더라. 내가.”
“!”
“살면서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물 바깥으로 튀어나가보고 싶은데. 그런데 그걸 할 수 있는 나이가 딱…… 대학생 때인 것 같아서…….”
김뱀은 단어를 주섬주섬 주워올리다가 목을 벅벅 긁었다.
“아우, 닭살돋네. 그러니까 왜 자꾸 이유를 물어보냐?”
“미안. 난 그렇게 오그라드는 이유일 줄은…….”
송유주는 건조한 농담으로 화답한 뒤 픽 웃으며 정리했다.
“아무튼 쉽게 말하면, 쓸데없는 짓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이거네.”
“그래.”
“그럼 잘 골랐네. 쓸데없는 짓.”
송유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주 작은 미소였지만, 오랜만에 보이는 미소였다.
김뱀은 얼른 그 말에 꼬리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절대 오래 할 거 아니야. 봄에 공연 한 번 하면 끝이다.”
“아~ 몇 번을 말하냐? 귀에 딱지 앉겠네. 알았다고 인간아!”
“공연 끝나고 붙잡지 마라.”
“너나 더 하고 싶다고 징징대지 마.”
김뱀과 송유주는 오랜만에 의견을 맞추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면 애초에 의견을 맞출 수 없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 잠시 후.
과도한 눈싸움으로 설인 비슷한 몰골이 된 덩치 큰 두 사람과, 그 사이에 낀 야생고양이가 지하철 역으로 사라졌다.
“조심해서 가라!”
“다들 다음주에 봐!”
“어, 간다.”
그렇게 모두 각자의 집을 향해 떠난 뒤.
김뱀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눈이 와서 질척이는 계단을 올라, 창가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서늘한 감각이 와닿는다.
복잡하고 들뜬 생각들을 가라앉히기 좋은 온도였다.
‘……<우리랑 밴드 왜 하러 왔냐>고?’
질문이 잘못됐다.
만약 다른 질문을 했으면, 조금 다르게 대답했을 수도 있을 텐데.
“쯧…….”
알고 싶다.
이 초조한 감정의 정체가 뭔지.
누구 말마따나, 담장 위에 있는 고양이한테 손을 흔드는 호기심인지.
인정할 수 없는 상대를 계속 보다 보니, 무슨 오기가 생긴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나도 몰라, 씨X…….
스윽-
김뱀은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벌써 몇 번을 들었을까,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언젠가 오이도 앞바다에서 한쪽 이어폰으로만 잠시 들었던 노래를, 이제는 혼자서 느긋하게 듣는다.
-스트록스를 몰라?
안다, 이제.
나도 이제 좋아한다.
듣다 보니 좋더라.
익숙한 기타리프 위에 영어로 된 가사가 얹혀 흘렀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항상 옳다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조용히 불편해지지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슬프고 뒤틀렸을지 몰라
스물 아홉 가지 성격 중에
네 맘에 드는 건 일곱 개 뿐
세상을 보는 방법이 스무 가지라면,
싸움을 시작하는 방법도 스무 개일 거야
김뱀은 창을 열고 눈을 감았다.
코가 시릴 정도로 매서운 눈바람이 창틈으로 새어들어왔지만…….
이미 마음은 계절을 넘어가고 있었다.
봄이 기대됐다.
무사히 공연을 하게 된다면.
그 후에는…….
-1부 외전 : 뱀과 야생고양이 part.1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