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뱀과 야생 고양이 (8)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두꺼운 프린트 뭉치!
동탁이 가방에서 꺼낸 것이 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뭔지 알지?”
“예.”
“이거 없이 어떻게 의대 공부할래? 짜식들아.”
……저게 무엇인지 알기 전에, 의대 공부의 분량을 살펴보자.
방대한 의학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본과 1학년 1학기에는 <내과>를 배운다.
<내과> 안에는 9개의 분과가 있다.
소화기 내과.
호흡기 내과.
순환기 내과.
신장 내과.
등등.
한 학기 안에 이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하려면?
두꺼운 책 한 권을 1~2주 안에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게 2주마다 책 한 권이 시험 범위인 시험을 계속 치러야 하고, 당연하게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럼 이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기출 문제 모음집인 <족보>!
엄청난 시험 범위를 공부하려다 보니, 시험 기출문제인 <족보>가 없이 시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담당 과목 교수들도 학생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약간의 변형과 새로운 문제를 추가해서 시험 문제를 내곤 했다.
“너희 선배 중에 선미 누나 알지?”
“아…… 그 항상 1등 놓치지 않으셨다던 선배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 선배가 우리 농구부 ‘크레이지4U’였잖아?”
학번에서 1등으로 졸업했다던, 이선미 선배.
그녀가 사실 동아리 활동을 극도로 혐오했다는 뒷이야기는 들었지만, 후배들은 나동탁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경청한다.
“이게 그 선배가 업데이트한 족보란 말이지! 우리 동아리에만 내려온다는 그 전설의 족보!”
“우와아―”
“역시 동탁이 형이 최고예요!”
다들 아부 모드다.
그럴수록 동탁은 기분이 좋아졌다.
의대라는 사회 안에서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 라인을 탄다는 게 뭔지 실감하게 되는 동아리 사람들…….
“이건 대외비다. 밖으로 돌리지 말고 동아리 안에서만 공유해!”
“네, 선배님!”
“야, 내 술잔 비었다!”
“예, 형. 받으세요.”
맞은편 김뱀이 술병을 드는 순간, 동탁이 테이블 아래로 발을 들었다.
퍽!
김뱀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이 아팠다.
장난이라기엔, 좀 세게 맞았다.
나동탁은 술이 들어가면 손버릇뿐만 아니라 발버릇도 나빴다. 그냥 총체적으로 버릇이 나쁜 놈이었다.
“어, 아팠냐? 장난인데 좀 세게 쳤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형.”
“에이, 그러게 눈치 없이! 김뱀 네가 왜 자꾸 내 술잔을 따라! 옆에 우리 효선이가 있구먼!”
“아, 오빠, 제가 따라 드릴게요.”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굴었나? 우리 효선이가 따라 주는 술 마시고 싶어서 그랬지. 내 맘 알지?”
“흐.”
최효선은 ‘ㅎ’ 하는 불편한 웃음과 함께 동탁의 잔을 채워 주었고, 김뱀은 짜증을 감추며 생각했다.
‘이게 맞나?’
물론 대학교에서 선배들의 라인을 타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나름 이득도 많고.
동탁 같은 놈을 제외하면 선배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많다.
앞으로의 의사 생활을 잘 설계하려면, 이게 맞긴 하다.
하지만…….
‘재미없네.’
원치 않는 술자리.
역겨운 선후배 꼰대 문화.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환멸이 나기 시작했다.
* * *
종로, 낙원상가.
음악인들의 메카라고 불리는 이곳.
핑크색 머리카락에 낙낙한 후드티를 입은 여자가 비장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송유주,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드디어 이곳에 왔다.
‘충동구매는 하지 말자…… 알아보기만 하는 거야.’
저벅, 저벅―
상가를 향해 당찬 걸음을 내디딘다.
록 마니아인 그녀에게, 밴드 악기를 익히는 것은 숙원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 이후에도, 그녀는 악기를 익히지 않았다.
한 번 빠지면 지나치게 탐닉하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의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된다는 핑계였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같이할 사람이 없다!
아싸니까!
밴드는 아무래도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의대 안에도 나한테 맞는 밴드부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아싸짓 안 했을지도.’
물론 연국대 의대에도 밴드 동아리가 있었다. 하지만 술만 마시는 동아리로 악명 높았다.
밴드 이름부터 <떡실신>.
모임만 했다 하면, 밴드 이름처럼 모두가 인사불성이 되어 기숙사로 돌아왔고…… 송유주가 원하는 그런 밴드는 아니었다.
연국대 중앙동아리도 몇 번 기웃거려 보긴 했으나,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 가입하지 않았다.
‘……만약 주변 애들한테 하자고 하면, 같이해 줄까?’
문득,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덩치 브라더스?
글쎄, 해 주려나?
마동섭은 묵직한 베이스가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여봉철은 드럼 잘 칠 것 같고.
그리고 또…….
김뱀?
송유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걔랑 밴드를 왜 해? 애초에 그 인간이 선배들 눈치 보느라 나랑 밴드를 할 리도 없고…….’
쯧―
송유주는 혀를 찼다.
이렇게 친구가 없단 말인가!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김뱀을 떠올리다니!
자신의 비좁은 인간관계를 한탄하며, 송유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와.’
신기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악기들―
각양각색의 점포들―
스물한 살 송유주는 조금 흥분된 채 걸음을 옮겼다.
곧 구석진 유리 벽 안에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사장님이 기타를 치는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송유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단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정보를 탐색할 생각이었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쇼.”
“기타를 좀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일단 종류별로 가격대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잠깐.”
사장님은 무언가 촉을 느낀 듯, 송유주의 말을 끊고 손을 불쑥 내밀었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
두근!
송유주의 가슴이 뛰었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1942~1970)의 명언이었다.
송유주는 홀린 듯 왼손을 내밀어 사장님과 악수하며 말했다.
“왼손이 심장과 더 가까우니까.”
“뭘 좀 아시는군.”
“그럼요.”
그렇다. 로큰롤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것……!
“이쪽으로 오쇼. 특별한 손님에게는 특별한 상품이 필요한 법이니까.”
장사꾼의 짬이란……!
낙원상가에서 오랜 내공을 쌓아 온 사장님의 상술은 엄청났고―
그날, 송유주는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 이펙터까지 충동적으로 와장창 구매하고 말았다.
* * *
김뱀은 생각했다.
얄미워 죽겠다고.
야생의 송유주를 마주쳤을 때, 그녀는 며칠 새 기타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
밤 11시.
중앙 도서관 뒤뜰.
시험 기간이라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 뒤편―
송유주는 벤치에 앉아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일렉 기타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뭘 연습하는지는 모르겠다.
머리카락은 언제 또 새로 염색을 했는지, 전보다 훨씬 그럴싸한 인디핑크 컬러가 되어 있다.
기타 줄 위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법 야무지게 움직이는 걸 보면,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구만.)’
한참 쳐다보다, 김뱀은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넌 재밌냐?”
“?”
“네 맘대로 대학 생활하면 재밌냐고?”
“무슨 시비를 걸려고, 또?”
“2학년도 됐으니까…… 이제 과 분위기에 적당히 맞춰 주면 안 되냐? 너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 받잖아.”
“무슨 피해?”
“요새 학생회 선배들이 화나서 벼르고 있어. 예과 1학년들이 자꾸 너처럼 규율 무시하고 따로 놀고 싶어 한다고. 어제도 시험공부 해야 하는데 집합 걸어서…….”
“야, 김뱀.”
송유주는 헤드셋을 벗고 물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지?”
“뭐?”
“그게 내 잘못이야? 괴롭히는 사람 잘못이 아니라?”
“…….”
학창 시절, 한국인이라면 수련회 때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않습니다! 만약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그렇게 얼차려를 받다가, 꼭 마지막 구호를 붙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저 자식이 문제다.’
‘멍청한 놈.’
‘민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렇게 옆 사람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순간, 애초에 그 불합리한 시스템을 강요받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싹 지워지기 마련이다.
유주는 그걸 지적하는 것이었다.
“김뱀아, 나도 나름대로 할 거 하고 있거든? 공식 행사는 쌍욕 먹으면서도 참석하고, 선배들 만나면 예의는 지켜. 네가 하도 시비 걸어서, 나도 최소한은 지키고 있다고.”
“…….”
“그러니까 오늘은 시비 걸지 말고 가라.”
“시험공부는 안 하냐?”
“남이사.”
그놈의 <남이사>.
김뱀은 짜증스레 다시 기타 연습에 매진하는 송유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백팩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뭐야 이게?”
“족보.”
“?”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예과 2학년.
이제 전공 수업이 시작될 시기다.
<해부학>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본격적인 의학 과목이다.
우리 몸의 수많은 구조물을 암기하고 이해해야 하는 만큼,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과목이었다.
“이걸 왜?”
“너 동아리도 없는 아싸인데, 어디서 족보를 구하겠냐?”
“…….”
“내가 줬다고 말하지 마라. 나 진짜 선배들한테 걸리면 뒤진다.”
김뱀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왜 송유주에게 그걸 건네주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스스로도 명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김뱀의 등에 툭 하고 프린트 뭉치가 와닿았다.
“필요 없어.”
“?”
“뭘 선심 써 주는 것처럼 멋있게 등 돌리고 있냐. 누가 족보 보여 달래?”
송유주는 족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도로 내민 것이다.
김뱀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진짜!
“아, 그래! 맘대로 해라! 너 잘났다!”
김뱀은 족보를 낚아채고 씩씩대며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
왜일까?
열받는다.
쟤를 보면, 유독 말이 곱게 안 나가고 자꾸 시비를 걸게 된다.
송유주가 사회 부적응자라서, 한심해서 열이 받는 걸까?
아니다.
“…….”
김뱀은 답을 알았다.
내가 틀린 것 같아서.
그래서…….
초조해지는 거다.
어쩌면 쟤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 * *
시험 시간.
펜이 분주히 움직인다.
대부분의 의대 시험이 그렇지만, 해부학 시험은 특히나 암기력이 중요한 시험이었다.
몇몇은 천장을 보면서 <족보>에서 보았던, 암기했던 것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수많은 것 중 어떤 것을 암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족보>보다 좋은 안내서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르륵―
송유주가 가장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모두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벌써 시험 다 쳤어?’
‘포기했나?’
‘하긴 그럴 만도…….’
쟤는 족보 없었으니까.
게다가 요새 송유주가 하루 종일 기타 연습에 빠져 있다는 것은 소문이 나 있었다.
‘쟤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전공 시험을 족보 없이 치르기는 힘들었을걸!’
하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송유주―
그녀가 고3 때 수능 만점을 받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OMR 카드 마킹 실수였다는 것을.
그리고 장학금 발표가 있는 날.
[장학금 수여자 명단]
송유주
이수지
강도원
진석훈
……
‘1등이라고?’
‘족보도 없이 공부한 송유주가?’
‘이게 말이 되나?’
다들 충격에 빠졌다.
모두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장학금 수여자 명단은 성적순으로 표기된다는 것을.
이 소문은 금방 의대 곳곳에 퍼졌고―
“뭐? 이…… 일 등?”
짤그랑!
학식을 먹던 나동탁의 수저가 식판 위로 떨어졌다.
기가 찼다.
말도 안 된다!
그는 학생회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고, 송유주가 과탑이라는 사실에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